이슬람의 예언자, 무함마드
『신의 예언자 무함마드』(카렌 암스트롱, 교양인)/『마호메트 평전』(카렌 암스트롱, 미다스문고)
올해 나는 세계 종교의 주요 인물들의 생애와 사상을 공부하며 ‘종교와 죽음’이라는 주제에 다가가려고 한다. 작년에 나이듦연구소의 죽음 세미나에서 읽은 『세계종교로 본 죽음의 의미』가 이 주제에 관심을 갖게 한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 이 책은 일신교인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과 힌두교, 불교의 죽음관을 비교하고 있다. 저자는 이슬람교가 말하는 부활, 최후의 심판, 지옥과 천국에 대해 해설하면서 이슬람은 다른 일신교와 달리 <꾸란>을 문자주의적으로 해석한다고 말한다. 나는 그런 저자의 관점에 의문을 느꼈지만 이슬람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 보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답답함을 느꼈다.
이슬람이라고 하면 9·11테러, 여성차별, IS와 같은 폭력적 이미지를 떠올리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그런 까닭에 서구에서는 이슬람 포비아가 만연해 있기도 하다. 나는 이슬람과 관련해 전혀 다른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중국 서안여행을 갔을 때 무슬림의 번화한 시장 안에 있는 이슬람 사원 청진사를 방문한 적이 있다. 고풍스러우면서도 아름다운 모스크였다. 저녁 예배시간이 되자 바자르에서 물건을 팔던 상인들이 일손을 멈추고 모여 들었다. 기도를 마친 뒤 다시 일터로 돌아가는 상인들을 보며 나는 무슬림(이슬람 신자)들에게 시장과 사원, 장사와 기도, 분주함과 고요함, 세속과 영성이 둘이 아니라는 강렬한 느낌을 받았다.
이런 모순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는 이슬람은 대체 어떤 종교일까? 무함마드는 무엇을 가르쳤고,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었을까? 이슬람에게 <꾸란>은 어떤 텍스트일까? 그런 질문을 품고 카렌 암스트롱이 쓴 무함마드 평전을 집어 들었다.
자힐리야의 시대
이슬람에서는 이슬람 이전 시대를 자힐리야(jahiliyyah)라고 부른다. 자힐리야는 무지의 시대라는 뜻이다. 자힐리야 시대에 아라비아에 살던 부족들은 각자의 무루와(muruwah)에 따라 행동했다. 무루와는 부족에 대한 충성을 최고의 가치로 둔다. 각 부족별로 자신들의 전통과 관습을 지키는 것을 최우선으로 둔다. 부족의 생존이 중요했기 때문에 다른 부족을 약탈하는 가주(ghazu)가 정당한 재분배의 하나로 받아들여지는 시대였다. 부족간의 약탈과 전쟁에서 한 사람이 죽으면 한 사람을 죽이는 것을 당연시하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복수가 자힐리야 시대에 아라비아 반도를 지배하던 정의였다.
당시 아라비아 반도의 북쪽에는 기독교를 믿는 비잔틴 제국과 강대한 페르시아 제국이 동서로 자웅을 겨루고 있었다. 기후가 온난한 남부 아라비아는 제국의 지배하에 있었지만 주로 유목이 행해진 초원지대는 야만인들의 거주지로 여겨졌다. 무함마드가 태어난 곳인 메카는 주요 교역로 상에 있다는 위치를 활용해 강력한 도시로 성장했다. 메카에는 반도의 여러 부족들이 숭배하는 검은 돌 카바가 있어서 순례객을 끌어모으는 영적 중심지이기도 했다. 메카의 쿠라이시족은 카바를 관리하며 시장을 열고 교역 활동을 통해 부를 축적하고 세력을 확장했다. 이슬람이 탄생 직전 메카는 부의 불평등이 심화되면서 서로를 돌보던 윤리가 약화하고 가문들 사이, 세대 사이, 개인들 간의 불안과 긴장이 높아지고 있었다.
그런 시대인 570년경 무함마드는 메카의 하심가문에서 유복자로 태어났다. 무함마드가 여섯 살이 되었을 때 어머니가 죽었고 2년 후 보호자였던 할아버지도 죽었다. 고아가 된 무함마드는 가문의 수장인 숙부의 보호하에 놓였다. 그는 자신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고단한 성장기를 보냈다. 무함마드는 카라반을 따라 다니며 세상에 대한 견문을 넓히며 주위 사람들로부터 신뢰받는 사람으로 성장했다. 25세가 되던 때 상단을 이끄는 부유한 과부인 카디자가 청혼했고, 결혼으로 경제적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카디자와의 사이에서 2남4녀를 얻었는데 아들 둘은 어려서 죽었다. 무함마드는 매년 순례철이면 히라산에서 한 달간 묵상하며 수행하는 영적인 사람이기도 했다.
무함마드에게 내린 신의 계시, “읽어라!”
40세가 되던 610년, 히라산의 동굴에서 명상하고 있던 무함마드는 알지 못할 영적 힘에 사로잡혔다. “읽어라!” 무함마드는 두려움에 떨며 자신은 읽지 못한다고 답했다. 그러나 천사 가브리엘이 그를 힘껏 껴안았고 자신도 모르게 입에서 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렇게 무함마드가 계시를 받을 때마다 암송한 것을 글로 옮긴 것이 『꾸란(Qur‘an)』이다. ‘꾸란’은 아랍어 “읽어라”의 동사 “까라아(qura’a)에서 파생한 동명사다. 그러므로 무슬림들에게 『꾸란』은 예언자의 말이 아니라 예언자를 통해 전해진 하느님의 말씀이다. 『꾸란』의 완전한 편집본은 무함마드 사후 20년 경 매우 이른 시기에 완성되었다.
무함마드는 아담, 아브라함, 모세, 예수 등의 예언자가 있었다는 것과 유대교와 기독교의 성서에 대해 알고 있었다. 무함마드는 예언자의 소명을 받아들인 후에도 말씀을 전하는 것에 매우 조심스러웠다. 처음에는 아내 카디자와 친구 아부 바크르를 비롯한 아주 가까운 사람들만이 그를 예언자로 인정했다. 그러나 2년 후 공개적으로 활동하라는 계시가 내린 뒤 일상 속에서 더 자주 말씀이 찾아왔다. 무함마드는 계시를 이해하기 위해 온 마음을 다했다. ”계시를 받을 때면 언제나 내 영혼이 나에게서 찢겨 나가는 듯했다.“
메카 시대에 내려진 계시들은 주로 당시 사회를 지배하는 이기적이고 물질 숭배적인 분위기와 사회적 약자에 대한 돌봄이 아니라 개인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것을 비판했다. 계시는 여아 살해를 금지했고, 고아와 여성 등 사회적 약자를 돌볼 것을 요구했으며, 모든 사람은 알라 앞에서 평등하다고 말했다. 계시에는 최후의 심판에서 현세의 삶에 대한 심판이 내려질 것이라는 경고도 포함되어 있었다. 계시는 개인과 사회의 삶의 방식을 바꿀 것을 요구했다.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 그리고 변화를 원하는 젊은이들이 무함마드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메카의 유력자들은 무함마드를 신들리거나 미친 사람이라고 조롱했으며 무슬림들을 경제적으로 물리적으로 핍박했다. 그러나 하심 가문의 수장이 무함마드를 보호하는 한 쿠라이시족은 무함마드를 해칠 수는 없었다.
메디나로의 이주, 히즈라
619년은 무함마드에게는 슬픔의 해였다. 언제나 무함마드를 지지해 주던 아내 카디자가 세상을 떠났다. 무함마드를 지켜주던 숙부 아부 탈리브가 죽었다. 하심 가문의 새로운 수장은 무함마드를 보호하는 시늉만 했기 때문에 메카에서 무함마드의 처지는 점점 위태로워졌다.
620년, 생명의 위협을 받는 무함마드와 무슬림들의 운명을 바꿀 만남이 찾아왔다. 400키로 떨어진 메디나의 순례자들이 메카에 와서 무함마드를 만난 것이다. 메디나는 여러 부족이 오아시스를 공유하는 정착지로 부족들 사이의 불화가 심각했다. 메디나의 순례자들은 무함마드가 자신들의 분쟁을 조정할만한 역량이 충분한 사람이라고 판단했다. 1년 뒤, 다시 메디나에서 온 순례자들은 무슬림에 대한 보호를 약속하고 무함마드에게 메디나의 분쟁을 해결할 중재자로 와달라고 부탁했다.
622년 무함마드는 메디나로의 이주, 히즈라(hijrah)를 결정했다. 이후 이슬람 역사에서 히즈라는 이슬람 원년이 된다. 무함마드는 메디나에서 메카의 이주민과 조력자들로 이루어진 공동체 움마(umma)를 만들어 나갔다. 알라의 유일성과 무함마드가 예언자라는 것을 확신하는 자는 누구나 움마의 구성원이 될 수 있었다. 움마는 탈부족적이고 초부족적인, 하나의 종교 공동체이자 생활 공동체이면서 정치공동체였다. 움마는 빈부, 피부색, 혈통을 넘어서는 평등한 공동체를 지향했다. 메디나에서의 계시는 경고에서 새로운 사회의 건설과 관련된 것으로 옮아가고 있었다. 움마는 계시에 근거해 예배, 라마단 단식, 자선, 여성의 상속권, 결혼과 이혼 등에 관련된 공동체의 규칙을 새롭게 만들어 나갔고, 메디나 안팎의 위협에 대처해나갔다.
히즈라를 단행한 지 5년간 움마는 엄청난 도전에 직면했다. 메디나의 경제력에는 제한이 있었고 조력자들의 지원으로만 생계를 유지할 수 없었다. 움마의 지도자였던 무함마드는 부족사회의 관습에 따라 사막의 카라반을 공격하는 약탈-가주를 조직했다. 메디나 내부에서 움마를 위협하는 반대 세력과 협상을 하고 싸움을 해야 했다. 물리적 충돌도 피할 수 없었다. 움마를 말살시키려는 메카의 공격도 계속되었다. 그 과정에서 승리와 패배의 경험을 쌓으며 무함마드는 예언자로서만이 아니라 메디나의 영적·정치적 지도자로, 군사적 전략가로서 경이로운 역량을 발휘해 나갔다.
자신과 사회를 바꾸는 투쟁, 지하드
당시 부족간 전쟁에서 패배한 이들에게 자비는 없었다. 죽은 자들의 몸은 훼손되고 포로들은 살해되거나 고문을 당했다. 그러나 무함마드는 잔인한 행위를 금지하고 전쟁포로들은 무상으로든 몸값을 받든 풀어주라고 명령했다. 『꾸란』은 전쟁에서도 자비와 용서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싸울 때는 용기와 굳건함이 요구되었지만 적이 휴전을 요청하면 즉시 무슬림은 무기를 내려 놓아야 했다. 휴전조건이 무엇이든, 설령 적의 의도가 의심되더라도 받아들여야만 했다.
그러나 무함마드에게도 피할 수 없는 폭력의 시간이 있었다. 627년, 메카의 군대가 메디나를 포위 공격한 절체절명의 순간에 움마를 배신하고 메카에 협조한 부족이 있었다. 무함마드는 전쟁에서의 승리 이후 이 부족의 남자 700명을 처형하는 평결에 동의했다. 이 일이 있기 전, 무함마드는 이슬람을 배신한 부족들을 여러 차례 용서하는 관대함을 보여주었다. 이 처형은 아랍 전체를 의식한, 배신자들에 대한 강력한 정치적 경고였다고 볼 수밖에 없다. 왜 무함마드는 오늘날 우리가 종교지도자에게 기대하는 무조건적 용서로 일관하지 않았을까? 예수라면, 붓다라면 어땠을까, 의문이 생긴다.
카렌 암스트롱은 예수의 시간과 무함마드의 시간이 달랐다고 말한다. 예수는 팍스 로마나의 시대에 제국의 변방인 유대땅에서 태어났다. 예수는 정치의 문제에 관여할 까닭이 없었다. 유대인들은 로마 제국의 통치하에서 거의 완전한 종교적 자유를 누렸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는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라고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무함마드는 폭력과 약탈이 일상인 땅에서 살았다. 예수와 달리 무함마드는 목숨을 건 전쟁의 한 가운데를 통과하고 있던 메디나의 수장이었다. 이슬람에는 처음부터 교회와 정치의 분리라는 개념이 없었다. 근대 사회에서 통용되는 정교분리의 논리로 7세기의 무함마드를 평가하는 것은 공정하지 못하다고 카렌 암스트롱은 지적한다.
성전(聖戰)이라고 번역되는 지하드는 논란이 되는 이슬람의 개념이다. 아직도 ‘한 손에 검, 한 손에 꾸란’이라는 출처가 모호한 말을 이슬람의 핵심 교의로 오해하는 사람도 많다. 이슬람은 칼을 앞세워 개종을 강요한 적이 없다. 물론 무함마드는 우리가 바라는 것과 같은 철저한 비폭력 평화주의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가 침략과 폭력을 용기로 생각하던 당대의 습속에 맞서 관용과 용서라는 새로운 윤리을 세운 사람이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꾸란』은 침략전쟁을 옹호하지 않고, 자기 방어를 위한 전쟁만이 정당화된다고 계시했다. 신의 계시에 따르기 위해 분투하며 자신과 사회를 개혁하는 것이 무함마드의 지하드였다. 지하드에 대해 카렌 암스트롱은 이렇게 말한다.
“이 단어(지하드)는 신의 뜻을 실행하는 데 필요한 노력 또는 분투를 의미한다. 무슬림들은 지적·사회적·경제적·영적인 면과 가정을 포함한 모든 측면에서 이러한 노력에 힘쓰도록 요구받는다. 때로는 싸워야 할 때도 있지만 싸움이 주된 의무는 아니었다. 지하드는 그들 자신의 사회와 자신의 마음을 개혁하는 훨씬 더 중요하고 어려운 투쟁을 의미했다.”(『신의 예언자 무함마드』 168쪽)
무함마드는 아라비아에 평화를 심기 위해 끊임없이 투쟁했다. 계시가 내리기만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개인과 사회의 윤리와 정의를 세우기 위해 숙고하고 성찰했다. 그는 구시대적 해결책이 아닌, 새로운 해결책을 찾기 위해 쉼 없이 분투하는 사람이었다. 불안과 위기가 덮친 7세기의 아라비아 반도에서 무함마드가 지향한 것은 분쟁과 폭력의 종식, 평화와 화해였다.
평화와 화해를 향하여
628년, 메카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이듬해에 무함마드는 완전한 비무장 상태로 메카로 순례 여행을 가겠다고 발표했다. 이 결정은 아라비아 반도의 정치적·영적 지형을 바꾸게 될 천재적이고 영감에 찬 선택이었다. 무슬림 1,000명이 순례자의 복장을 하고, 희생제물로 쓸 낙타를 끌고 메카로 향했다. 메카는 순례기간의 전쟁 금지 규칙을 깨고 무슬림 순례자를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일촉즉발의 위기에도 무함마드는 메카 가까이에서 연좌농성을 하면서 메카의 진입 허가를 기다렸다. 메카와 무함마드 사이에는 중재자들이 오갔다. 결국 무함마드는 메카의 요구를 전폭적으로 수용함으로써 히즈라 이후의 길고 긴 적대관계를 중단하는 휴전협정을 성사시켰다. 평화가 찾아오자 무함마드의 위상이 높아졌다. 메디나와의 동맹을 원하는 부족이 늘었고 이슬람으로의 개종도 줄을 이었다.
메카 쪽에서 휴전협정을 위반하는 일이 생겼다. 무함마드는 대규모 군대를 모집했고 1만명이 메카로 출병했다. 이들이 메카 가까이에서 경건하게 아침 예배를 올리는 모습을 본 메카 사람들은 전투의지를 상실했다. 무함마드는 무슬림의 적이었던 메카에 무혈입성했다. 그러나 복수와 약탈은 없었다. 누구도 죽이지 않았고 누구의 재산도 뺏지 않았다. 무함마드는 카바를 둘러싼, 토템 360개를 부순 뒤 메카를 이슬람의 성지로 선포했다. 이로부터 몇 년 이내에 무함마드는 거의 모든 아라비아를 수중에 넣고 향후 천년의 이슬람 제국의 통치를 위한 기초를 놓았다.
인간으로 태어나 인간으로 죽은 예언자, 무함마드
무함마드는 매우 친절하고 감성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동물에게 낙인을 찍거나 동물들 간에 싸움을 붙이지 못하도록 금지했다. 무함마드는 언제나 소박하고 절제된 삶을 살았다. 그는 집안일을 도왔으며 자기 옷을 직접 꿰매었고 자기 신발을 닦고 염소를 돌보았다. 카디자가 죽은 이후 정치적 동맹을 위해 여러 가문의 여성과 결혼했지만 아부 바크르의 딸인 아이샤를 제외하고는 모두 전쟁에서 남편을 잃은 과부였다. 그는 아내들을 존중했고 중요한 일들에 조언을 구했다. 예언자와 아내들의 평등한 관계는 신실한 무슬림들에게도 놀라운 일이었다. 일부다처는 그 시대의 관습이었다. 오늘날 이슬람은 여성의 몸을 가리는 복장을 요구하거나 일부다처의 관습을 유지하고 명예살인과 같은 전근대적 악습으로 자주 여성혐오적 종교라는 혐의를 받는다. 그러나 카렌 암스트롱은 무함마드의 시대로부터 근대 초기까지 이슬람만큼 여성을 존중하는 종교는 없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아라비아 반도가 거의 이슬람으로 통일된 632년, 무함마드는 눈에 띄게 쇠약해졌다. 그는 죽음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무함마드는 마지막 메카 순례를 떠났고, 아라파트산 부근에서 최후의 고별연설을 했다. 그는 무슬림들이 서로에게 공정하게 대하고, 여자에게 친절하고, ‘자힐리야’ 정신에서 나온 피의 불화와 복수심을 버려야 한다고 일깨웠다. 무함마드는 그에게 많은 위로를 주었던 아내 아이샤의 무릎에서 눈을 감았다. 무슬림들은 예언자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했다. 어떻게 신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가 죽을 수 있단 말인가? 그는 예수처럼 살아서 승천해야 하는 것 아닌가?
카렌 암스트롱은 이슬람의 죽음관에 대해 이렇게 요약하고 있다. “이슬람교는 기독교적 의미에서 인간의 타락과 원죄를 믿지 않는다. 죽음, 고통, 그리고 슬픔은 인간이 저지른 실패에 대한 벌이 아니라, 하느님의 신비한 계획에 속한 것이었다.”(『마호메트평전』, 247쪽) 무슬림에게 죽음과 고통은 신이 내리는 벌이 아니라 신의 현현을 드러내는 징표의 하나일 뿐이다.
무함마드도 언제나 자신은 신의 말을 전하는 인간일 뿐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언젠가 메카와의 전투 중에 무함마드가 죽었다는 소문이 돌았던 적이 있다. 그때 무함마드는 이런 말을 했다. “무함마드는 한 예언자에 불과하며 그 이전 예언자들도 세상을 떠났노라. 만일 그가 죽거나 혹은 살해당한다면 너희는 돌아서겠느냐? 만약 어느 누가 돌아선다고 하더라도 조금도 하느님을 해하지 않을 것이며 하느님은 감사하는 자들에게 보상을 주실 것이다.” 무함마드의 죽음에 당황해 하는 사람들 앞에서 평생의 벗 아부 바크르는 무함마드가 한 말을 암송한 뒤 이렇게 말했다. “오, 사람들이여, 만약 누군가 무함마드를 경배한다면, 무함마드는 죽었다. 만약 누군가가 신을 경배한다면 신은 살아 계시며 불멸이시다.” 무함마드는 인간으로 태어나 인간으로 죽었지만 무슬림들의 마음에 영원히 빛나는 존재가 되었다. 무슬림들에게 무함마드는 신의 계시를 전한 역사상 마지막 예언자였다.
‘하나의 종교만 아는 사람은 아무 종교도 모른다.’ 종교학자 막스 뮐러가 한 말이다. 카렌 암스트롱이 쓴 무함마드 평전을 읽으며 이 말을 자주 떠올렸다. 이제 겨우 이슬람을 알기 위한 첫 걸음을 뗀 것 같다.

이슬람의 탄생을 다룬 영화 <메시지>(1976) 유투브에서 찾아볼 수 있다.
(사족)
1. 카렌 암스트롱이 쓴 두 평전은 어떻게 다른가?
카렌 암스트롱은 두 권의 평전을 썼다. 한 권은 1992년, 다른 한 권은 2006년에 나왔다. 우리나라에서는 첫 책이 2002년 『마호메트 평전』(미다스문고)으로, 두 번째 책은 2024년 『신의 예언자 무함마드』(교양인)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되었다. 첫번째 책은 1988년에 출간된 살만 루슈디의 소설 『악마의 시』로 인해 벌어진 소란, 즉 호메이니가 저자와 출판사에 사형을 선고한 파트와(fatwah)와 서구 자유주의 진영의 이슬람에 대한 비난에 대응하기 위해 기획되었다. 이 책으로 카렌 암스트롱은 이슬람에 대한 균형있는 시각과 전문성을 인정받았고 무슬림 출판 협회가 주는 미디어상을 받았다. 두 번째 책은 2001년 9월 11일 이후 서구의 이슬람 포비아에 대응하기 위해 출판되었다.
두 권 모두 무함마드와 이슬람을 악마화하는 서구의 시각을 바로잡기 위한 책이라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다. 그러나 두 책은 강조점이 다르다. 첫 책은 살만 루슈디의 소설에서 문제 삼은 무함마드의 개인적 행적과 관련된 오해를 바로잡는 데 공을 들였다. 반면 두 번째 책은 지하드(Jihad)가 타자에 대한 폭력이 아니라 관용과 인내를 요구하는 영적 투쟁이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2. 마호메트인가, 무함마드인가?
마호메트는 옛 유럽식 표기이고 무함마드는 아랍어 발음에 따른 표기이다. 이슬람에서는 마호메트가 무함마드를 악마화하려는 발음이라고 생각하여 극구 싫어한다고 한다. 아랍어 발음에 따라 무함마드라고 쓰는 것이 좋다고 본다. 같은 이유로 『코란』도 『꾸란』으로 통일했다.
“카렌 암스트롱은 이슬람의 죽음관에 대해 이렇게 요약하고 있다. “이슬람교는 기독교적 의미에서 인간의 타락과 원죄를 믿지 않는다. 죽음, 고통, 그리고 슬픔은 인간이 저지른 실패에 대한 벌이 아니라, 하느님의 신비한 계획에 속한 것이었다.”(『마호메트평전』, 247쪽) 무슬림에게 죽음과 고통은 신이 내리는 벌이 아니라 신의 현현을 드러내는 징표의 하나일 뿐이다.”
죽음은 신의 벌이 아니라 신의 현현을 드러내는 징표라….
더 생각해보고 싶은 문장이네요
지난해 세미나에서 이슬람은 원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는데… 그래서 죽음은 벌이 아닌 신의 현현을 드러내는 신비한 계획에 속하는 것…
카렌 암스트롱이 이슬람을 악마화하는 서구사람들의 시각을 바로잡기 위해 두번이나 무함마드 평전을 썼다는 것을 요요샘의 글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이슬람… 좀 더 공부해보고 싶은 종교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