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은 지혜를 완성하는 클라이막스
시부모님 두 분 다 장례식 후에 불교 의례인 49재를 치르며 극락왕생을 빌었다. 부모님 천도재에서는 <천수경>과 <반야심경>을 읽었다. 뒤에 알게 된 것이지만 <금강경>을 독송하는 경우도 많은 것 같다. 티베트불교에서 죽은 자를 위해 독송하는 경전은 <티베트 사자의 서>로 알려져 있다. 이 책은 지금으로부터 백여년전인 1927년에 미국 인류학자 에반스 웬츠에 의해 처음으로 티베트 외부세계에 소개되었다. <티베트 사자의 서>는 경전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해 에반스 웬츠가 붙인 이름이고, 원제목은 <바르도퇴돌>이다. ‘바르도’란 죽음에서 환생 까지의 기간, 사이를 뜻하고, ‘퇴돌’이란 듣는 것을 통해 해탈한다는 의미이다. <바르도퇴돌>의 내용은 죽음을 맞이한 망자에게 죽음에서 환생까지의 49일간의 과정과 매 단계마다 해탈과 좋은 환생을 위해 어떻게 해야하는지 알려주는 친절한 안내라 할 수 있다.
에반스 웬츠가 <티베트 사자의 서>를 출판한 직후 칼 융은 이 책을 읽고 깊은 영감을 받았다. 융은 이 책이 당시 서양의 정신분석학을 뛰어넘는 죽음에 대한 탁월한 심리학을 보여준다고 찬탄했다. 그는 <바르도 퇴돌>에서 인류의 집단 무의식 속에 녹아있는 죽음에 대한 어떤 사유의 원형, 즉 신성을 향한 정신의 여행을 읽어냈다. 그에게 이 경전이 전하는 메시지는 신성을 향한 영적 여행은 죽음 이후에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죽음으로 완성된다는 것이었다. 칼 융은 <바르도퇴돌>이 죽음을 지혜를 완성하는 클라이막스로 이해한다는 점에 주목했다.
삶은 ‘바르도’의 흐름이다
티베트에서 불교 승려가 배우는 전통적인 수련과정을 18세에 마친 초감 트룽파는 1959년 중국 침공 이후 인도로 망명하여 티베트의 젊은 라마들을 지도했다. 그런 후 그는 영국으로 건너가 공부하고 최종적으로는 미국에 이주하여 유창한 영어실력으로 티베트 불교를 전했다. 그는 1975년에 <티베트 사자의 서>를 번역하고 해설했다. 류시화님이 번역한 <티벳사자의 서> 주석에도 트룽파의 해석이 간간이 소개된다. 아니 페마 초드론(Ani Pema Chodron)은 초감 트룽파의 제자로 티베트 불교의 금강승 수행을 완성한 최초의 미국인이다. 페마 초드론은 <죽음은 내 인생 최고의 작품> 을 썼는데 이 책 역시 <바르도퇴돌>에 대한 해설서이다. 이 책에서 페마 초드론은 티베트 불교를 잘 모르는 서양 독자들의 눈높이에 맞추어 바르도의 가르침을 풀이하고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티베트 금강승의 수행방법을 알려준다. 참고로 이 책의 원제는 how we live is how to die다.
페마 초드론은 지적 배경이 티베트 불교의 금강승인 만큼 칼 융이 인류의 정신을 구성하는 집단 무의식의 관점에서 <바르도 퇴돌>을 읽어낸 것과는 다르게 <바르도퇴돌>을 읽는다. 먼저 그는 ‘바르도’란 무엇인가에 초점을 맞춘다. 그는 ‘바르도’를 이행(移行)으로 풀이한다. 아무래도 바르도의 원래 의미가 죽음 이후의 과정을 의미하는 것이다보니 자신이 나고 자란 문화의 사람들에게 더 자연스런 방식으로 다가가려 한 것 아닐까 싶기도 하다. 페마 초드론은 죽음 이후만이 아니라 우리의 삶 전체가 ‘바르도’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한다. 그렇게 ‘바르도’를 보면 “우리는 언제나 바르도 상태에 있고 중간 상태에 있다.”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순간이 여기에서 저기로 이행 중에 있는 ‘바르도’ 이고 우리의 삶에는 수많은 시작과 끝이 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우리가 수많은 탄생과 죽음의 한 가운데를 살고 있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정말 그렇다. 몸을 구성하는 세포들은 몸이 생물학적 죽음을 맞이하여 해체되기 이전에도 끊임없이 죽고 새로 태어난다. 세포들은 늘 탄생과 죽음 사이에 있다. 우리가 자신의 정체성을 구성한다고 굳게 믿고 있는 성격이나 습관, 취향조차도 계속해서 어떤 이행 속에 있다. 그뿐만 아니라 마음을 구성하는 느낌과 생각도 언제나 무상한 변화 속에 있다. 페마 초드론은 삶도 죽음도 ‘바르도’의 흐름이라는 관점에서 <바르도퇴돌> 읽기를 제안한다. 그래서 이렇게 말했다. “죽음은 단지 삶의 끝에서 일어나는 특정한 사건이 아니다. 우리의 삶은 태어남과 죽음 그리고 죽음과 태어남이라는 끝없이 이어지는 경이로운 흐름 속에 있다.”
바르도에서 나타나는 평화의 신들 만다라 (대원사 티벳박물관)
어떻게 사느냐가 어떻게 죽느냐를 결정한다
그렇다고 해도 <바르도 퇴돌>이 말하는 죽음의 과정을 건너뛸 수는 없다. 이 경전은 죽음 이후의 과정에 대한 묘사가 자세하기 때문이다. 그 내용을 간단히 살펴보자. 죽음은 세 단계를 거친다. 첫 번째 단계는 ‘죽어감의 바르도’다. 죽음의 과정에서는 우리가 죽음이라고 생각하는 숨의 중단 이후에도 이어진다. 의식의 해체이자 내면의 분해다. 내면의 분해가 끝나면 마음은 에고가 사라진, 맑은 하늘 같은 상태가 된다. 이것은 누구에게도 예외가 없는 생리학적 과정이다. 그러나 평소 삶을 끊임없는 분해의 과정으로 보면서 명상과 수행으로 마음을 수련해 온 사람이 아니면, 이 때 찾아오는 에고 없이 텅 비고 무한하게 열린 마음과 연결되지 못한다. 안타깝게도 앞서 칼 융도 말한 바 있는 영적 완성의 클라이막스를 놓치게 된다.
그렇지만 첫 번째 단계에서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고 끝은 아니다. 두 번째 바르도와 세 번째 바르도가 있다. 두 번째 바르도에서는 망자가 살면서 마음에 품어왔던 환영들이 나타나는데 그것은 우리의 마음의 습관, 성향, 경향성이 투사된 환영들이다. 환영과 함께 지혜의 빛과 어슴프레하고 편안하지만 우리를 지혜 없는 무명으로 이끄는 빛이 나타난다. 지혜의 빛을 따르면 좋으련만 수행이 되지 않은 마음은 편안함을 주는 빛을 따를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현재의 삶에서 안락함과 편안함을 중독적으로 추구하는 방식을 죽을 때도 똑같이 가져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두 번째 바르도에서 선택은 지금 어떻게 사느냐에 달려 있다. “지금 우리가 사는 방식이 우리가 죽은 방식을 결정한다.”
두 번째 바르도에서 해탈하지 못하면 세 번째 바르도로 간다, 세 번째는 ‘되어감의 바르도’다. ‘되어감의 바르도’는 어디에 태어날 것인가를 선택하는 단계이다. 이때도 우리는 사는 동안 형성해온 마음의 경향성에 이끌려 자신이 태어날 곳으로 달려간다. 우리가 몸과 말과 생각으로 구성해 온 경향성이 우리의 댜음 생을 결정한다는 이야기다.
죽음의 단계인 ‘바르도’에 대해 어떻게 받아들이는가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처음에 페마 초드론이 제안한 것처럼 ‘바르도’를 삶의 모든 순간으로 확장해보면 문제는 의외로 단순해진다.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가가 그 다음의 삶에 아주 큰 영향을 미친다. 원리적으로 그 관련성은 죽음의 바르도까지 확장될 수 있다. 죽음의 바르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와 상관없이 삶과 죽음을 지혜의 완성의 과정으로 바꾸기 위해 우리가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때는 바로 여기, 살아있는 지금이다.
페마 초드론은 <바르도퇴돌>은 금강승의 접근 방식에 입각해 있다고 알려준다. 금강승이 다른 가르침과 구별되는 것은 지금 여기가 바로 최종 목적지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우리는 이미 깨어난 존재이고, 단지 그것을 알기만 하면 된다. 그것을 알기만 하면 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페마 초드론은 번뇌를 지혜로 바꾸는 수행을 설명하면서 얼음과 물의 비유를 든다. 얼음과 물은 같은 분자로 구성되어 있지만 얼음은 딱딱하게 굳어있고 물은 유동하며 흐른다. 번뇌의 에너지에서 지혜를 발견하는 것 역시 그와 같다. <바르도퇴돌>의 ‘바르도’는 그런 전환이 이루어지는 사이이고 틈이다.
삶의 속도를 충분히 늦추어 생각이 빼곡이 들어찬 우리의 경험에도 언제나 틈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아보는 것이 명상의 주요 목적이다. 그리하여 꾸미지 않은 비개념적인 마음의 성질인 이 틈에 친숙해지는 것, 이것이야말로 명상의 주요한 목적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명상방석에 앉아 있는 잠깐에도 우리는 우리의 의식이 얼마나 유동적인지 스스로 볼 수 있다. 생각과 감정, 지각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과정을 관찰할 수 있으며, 이 과정이 쉼없이 이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 명상을 수련하면 우리의 경험이 고정되지 않은 채 끊임없이 흘러가는 것에 점차 익숙해진다. 이런 경험을 하는 주체를 특정할 수는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분명히 볼 수 있다.
우리의 삶을 바르도가 계속 이어지는 과정으로 보는 수련은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된다. 과거는 지나갔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우리는 과거와 미래 사이에 놓인 순간을 포착할 수 없지만, 그것이 바로 우리에게 존재하는 전부이다. 나는 우리가 두 가지 상황 사이에 놓인 그 틈, 그 멈춤, 그 열린 공간을 알아보는 능력을 키울 수 있음을 알았다. 우리는 끊임없이 시작하고 끝나는 삶 속에 서 있다고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을 우리의 지속적인 알아차림 수행으로 삼을 수 있다. ‘이것’이 끝나면 ‘저것’이 시작된다. 우리가 죽어 다시 태어난다는 생각은 순전히 육체의 탄생과 죽음에 관한 것만은 아니다. 다시 태어남은 매 순간 일어나고 있는 과정이다. 우리는 다시 태어남을 이런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다.
통렌수행은 괴로움은 피하고 즐거움만 좇는 우리의 평소 논리를 뒤집는 수행이다. 통렌수행에서 우리는 숨을 들이쉴 때마다 다른 사람의 고통을 자기 안에 받아들이고 숨을 내쉴 때마다 다른 사람에게 이로움이 되는 것을 내보낸다고 상상한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자신의 아주 오랜 이기적 패턴에서 벗어난다. 통렌수행은 아픈사람, 죽어가는 사람, 이미 죽은 사람, 또는 어던 종류이든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을 위해 할 수 있다. 정식 명상수행으로 할 수도 있고, 바로 그 자리에서 언제든 해도 좋다. 길을 걷다 아픈 사람을 보면 숨을 들이쉬면서 그의 고통을 자기 안에 받아들이고, 숨을 내쉬면서 그에게 편안함을 보낸다.
- 죽음에 대해 깊이 있게 탐구하고 싶은 사람
- 죽음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
- <티베트 사자의 서>을 쉽게 풀이한 책을 읽고 싶은 사람
- 이미 돌아가신 분의 명복을 빌고 죽음을 앞두고 있는 분에게 도움이 되고 싶은 사람
- 삶을 바꾸는 명상과 수행에 대해 관심이 많은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