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다쿠로쇼 요리아이가 만들어지기까지의 좌충우돌 히스토리를 담은 <정신은 좀 없습니다만 품위까지 잃은 건 아닙니다>(가노코 히로후미, 2017)의 후속편이다. 1991년부터 참여해 요리아이의 총괄 소장을 맡고 있는 무라세 다카오의 저서 중 처음으로 우리나라에 소개된 이 책은 그가 경험담으로 풀어낸 특별한 치매노인 돌봄 이야기이다.(치매(癡呆)는 ‘어리석고 어리석다’라는 의미로 해당 장애의 특징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하며 당사자에게 차별적이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치매’를 사용하는 한자문화권 국가들에도 비슷한 문제의식이 있었고 2000년대 들어 대만은 실지증(失知症), 일본은 인지증(認知症), 중국과 홍콩은 ‘뇌퇴화증(腦退化症)’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한국에서도 여러 차례 법률을 개정하여 ‘인지장애증’, ‘인지저하증’ 등으로 변경하려 했으나 매번 보류되었다. 이 책에서는 치매 대신 인지저하증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일러두기 중에서. 이 글에서는 편의상 치매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후쿠오카에는 주간돌봄센터인 다쿠로쇼 요리아이 두 곳과 특별양호노인홈 ‘요리아이의 숲’이 있다. 이 책은 요리아이의 숲에서의 일상을 그려내고 있다. 치매와 자유. 언뜻 어울리지 않는 단어로 보여 진다. 하지만 요리아이에서는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이 곳에 모인 노인들에게는 어떠한 규제나 규율도 강제되지 않기 때문이다. 다쿠로쇼 요리아이(宅老所 よりあい)라는 이름에서, 다쿠로쇼는 자택처럼 편안한 노인요양시설을 뜻하고 요리아이는 모임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하면 자택처럼 편안하게 노인들이 모여 사는 집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통상적인 요양시설에서 노인들과 시간을 보내기 위해 만들어 놓은 프로그램이 여기엔 존재하지 않는다. 꽃이 피면 꽃구경을 가고 더우면 시원한 바람을 쐬러 박물관 로비에 가고 차를 마시고 싶으면 커피숍에 가는 식이다. 이곳에서는 숫자로 가시화해서 제어하기 쉬운 돌봄을 지향하지 않는다. 요리아이에는 효율적인 것 대신 한 사람 한 사람의 리듬에 맞추어 느낌을 주고받으며, 지배하는 것이 아닌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매우 주관적인 돌봄의 세계가 존재한다.
집에서 출발한 ‘돌봄’, 무엇으로도 구속하지 않는 ‘자유’
최근 한 모임에서 요리아이의 숲에 방문했던 분의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정해진 프로그램이 없다는 것만큼 놀라운 점은 문을 잠그지 않는다는 것이다.(데이케어센터나 요양병원 같은 곳에 부모님을 모셔 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치매환자들이 생활하는 곳에는 이분들이 행여 시설에서 벗어나는 일(탈출?)을 방지하기 위해 출입문에 잠금장치가 설치되어 있다. 요양병원에는 비밀번호를 눌러야 엘리베이터가 작동하고, 데이케어센터에 정해진 시간 이외에 방문할 때면 출입문에 큰 자물쇠를 누군가 풀어주어야 들어갈 수 있다.) 가족들의 출입에도 제한이 없으며, 베란다에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다. 배변을 스스로 할 수 없는 등급의 노인들이지만 기저귀를 차지 않는다. 매점에서는 과자는 물론 술도 직접 사서 먹을 수 있다. 즉, 시설의 시스템에 사람을 맞추는 방식이 아니라 각각의 사람들에게 맞추어 돌봄을 제공한다.
요리아이의 숲 구조는 1인 1실이고 서너 명이 거실을 공유하는 유닛형태이다. 방마다 화장실과 세면대가 있고 방안에는 본인이 쓰던 가구를 가져와 사용할 수 있다. 주방은 오픈되어 있어서 노인들이 밥하는 모습을 볼 수 있고 밥 냄새를 맡는 것을 좋아한다고 했다. 이곳이 집과 같은 편안함을 제공한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이렇듯 입소가 집과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 아니라 자신의 추억과 역사도 함께 옮겨오는 것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이런 곳이니 입소한 노인들 모두가 각자 자연스럽고 자유롭게 생활할 수 있다. 그래서 자유에 대한 감각도 다르다. 물론 여기서 자유란 어디까지나 치매 노인의 입장에서 자유이고 돌보는 사람의 입장에선 억지와 떼쓰기이다.
“자유롭지 않게 된 몸은 나에게 새로운 자유를 가져다준다. 시간을 가늠할 수 없게 됨으로써 나는 시간에서 자유로워진다. 내가 있는 공간이 어딘지 모르면 상황에 맞춰 언행을 주의해야 한다는 규율에 얽매이지 않게 된다. 설령 누워서만 지내게 되어도 정신까지 그 자리에 묶여 있지는 않는다. 자식의 얼굴을 잊어버림으로써 부모의 역할에서 벗어날 수 있다.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루하루가 신선하다. 분노와 증오에서 잘 벗어나게 되고 기쁨을 느끼기 쉬워진다.”(65쪽) 이것은 저자가 치매에 걸린 노인의 입장에서 치매가 가져온 변화를 역설적으로 쓴 글이다. 실제로 내 가족에게서 이러한 증상을 목격한다면 나는 그 사람이 더 이상 내가 알던 사람과 같은 사람이라고 인식하기 어려울 것 같다. 그리고 이전의 모습에 집착하며 서글퍼하거나 괴로워할 것이다. 하지만 무라세 다카오는 치매와 노화로 인해 겪게 되는 정신적 신체적 변화를 오히려 새로운 자유로의 초대로 이해한다. 그 자유로운 몸과 마음을 받아들이기 위해 기꺼이 상대방에게 주파수를 맞추는 저자의 모습은 경이로울 따름이다.
단지 느낌으로 접속하는 몸의 ‘동기화’
처음 책을 접했을 때 동기화라는 단어가 눈길을 끌었다. 평소 나에게 동기화란 내 폰과 노트북의 콘텐츠를 동기화해서 어떤 디바이스에서도 최근 내 활동이 저장되어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그러니까 물리적 장소는 다르지만 같은 내용이 존재하도록 맞추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동기화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그것이다. 서로 다른 사람이 같은 생각을 하고 같은 욕구를 느낀다는 것인데 그게 말이 된다고? 20년이 넘도록 요리아이에서 노인들을 돌봐온 무라세 다카오에게는 놀랍게도 그것이 가능한 일이며 그곳에서 일하는 숙련된 직원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에게는 함께 생활하는 노인들의 미세한 신호들을 재빨리 캐치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왜냐하면 그 노인들 한명 한명을 밀착하여 돌보는 일이 그들의 일이기 때문이다. 기저귀를 채우지 않기 때문에 뜻하지 않은 실수를 막기 위해서는 돌봄 직원들의 눈치가 빨라야 한다. 배변 욕구에 맞추어 자연스럽게 화장실로 인도해 무사히 일을 마치는 것이 그들에게 요구되는 매우 중요한 스킬이다. 그러니까 그에게 동기화란 ‘하나의 행위를 둘이서 해내는 작업’이다. 물론 쉽게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다. 끝없이 반복한 끝에 마법처럼 ‘우리’가 만들어진다. AI기술이 아무리 발달한들 이게 가능할까. 돌봄은 역시 사람의 일이라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한다.
요리아이의 숲, 사진출처: 한겨레신문
너무 비현실적이지만 현실적인
내가 5~6년 전에 <정신은 좀 없습니다만,…>을 읽었을 때 요리아이라는 곳은 치매 노인들에게 얻어맞는 것을 감수하면서 헌신적으로 돌보는 사람들이 만든 시설로 다가왔었다. 당시의 나는 치매 환자들보다는 돌보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감정이입이 되었던 것 같다. 우리나라의 현실을 생각할 때, 그리고 일본에서도 매우 드문 케이스이기 때문에 이 책의 내용은 여전히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지저하증의 증상만 잘 보이고 당사자는 보이지 않게 된 것 같습니다”라는 한 문장은 나를 뜨끔하게 했다. 저자는 치매를 질병이 아니라 노화로 인한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본다. 그는 치매 환자들도 각자의 방식으로 누군가를 배려하고 걱정하고 보살핀다고 했다. 일방적인 것 같지만 서로 돌보는 존재들이라는 의미다. 네덜란드의 호그벡 마을(나이듦아카이빙 2024년 6월호 참조)과 같은 마을 형태의 지역사회 통합 시설이 세계의 각 곳에 생기고 있다. 반면 우리나라는 용산구가 호그벡을 벤치마킹해 양주에 펜션형태의 ‘공립 치매 전담형 노인요양시설’을 추진했으나 주민의 반발과 지자체의 불허로 백지화되었다. 우리나라의 치매 추정 유병률은 10.3%이며 2024년에는 치매환자수가 100만명을 돌파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제 더 이상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 것 같다.
노화가 진행될수록 인간의 몸은 근육보다 내장을 중심으로 움직인다. 애초부터 내장에는 시간과 공간의 개념이 없는 것 같다. 근육과 달리 사람의 의지로 제어할 수 없고 몸 속의 일정한 지점에서 죽을 때까지 계속 움직이는 내장은 시간과 공간을 신경쓰지 않는다.(70)
몸의 접촉에는 섬세하고 신경질적인 감정이 뒤따른다. 다양한 ‘두려움’과 ‘부끄러움’이 뒤섞여서 때로는 매우 심각해지기도 한다. 그럴 때는 일부러 둔감하게 접하려 한다.(100)
할아버지는 안마를 받으면서 조금씩, 조금씩 이야기했다.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힘들어. 차라리 죽고 싶어. 하지만 스스로 죽는 건 못 해. 죽지 못하니까 밥을 먹어야 해. 하지만 밥을 먹는 것도 힘들어. 어차피 밥을 먹어야 한다면, 맛있는 걸 먹고 싶어.”(104)
할머니의 몸이 발신하는 소변 신호를 돌보는 몸이 무의식 중에 수신하는 느낌이 들었다. 내게는 기록과 배뇨 간격을 파악해 이뤄지는 의식적인 돌봄보다 몸의 교감에 이끌려서 이뤄지는 무의식적인 돌봄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115)
생각해보면 할아버지의 1인 생활이 지속될 수 있었던 이유는 주위에 친척이 없었기 때문이다. 혹시 가족과 함께 살았다면 할아버지의 행동에 마음을 졸이다 시설로 입주시켰을지도 모른다.
얄궂은 이야기지만, 할아버지에게 깊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도시의 인간관계 덕분에 할아버지는 사회에서 배제되지 않을 수 있었다.(322)
1) 치매에 걸리면 더 이상 내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
2) 치매라는 병에 대해 막연한 두려움을 갖고 있는 사람
3) 돌봄이 필요한 누군가를 돌보고 있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