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머니튜드 혁명
이브 지네스트, 로젯 마레스코티 지음. 대광의학
휴머니튜드는 ‘HUMAN+ATTITUDE’로 만들어진 용어이다. 인간적인 케어, 인권을 중시하는 케어, 케어 받는 사람이 인간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고 그 존엄성을 지켜야 한다는 의미의 케어 철학이자 케어 기술이다. 휴머니즘은 이미 한물 간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데, 휴머니튜드에서 ‘인간’ 조건으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내 생각에는) ‘선다’는 것이다. ‘사람은 죽는 날까지 설 수 있다.’고 생각하고 ‘죽는 날까지 계속 서야’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나에게는 가장 핵심적인 메시지로 다가왔다.
저자들은 프랑스 체육교사였다. 프랑스 국민교육 고등교육 연구청의 요청으로 병원직원교육 담당자로 파견되어 병원 직원의 요통대책에 몰두한 것을 계기로 휴머니튜드 라는 것을 만들어내게 되었다. 침대에 누워있는 환자들이 침대 위에서 대변으로 더러워진 몸을 씻고, 심한 욕창을 치료하기 위해 마취도 하지 않고 생살을 도려내는 것을 목격한 후 ‘죽는 날까지 계속 서야하는 중요성을 깨달았다’고 한다.
이 때가 1980년대 초인데, 대부분의 병원에서 치매노인들은 침상에 누운 채로 씻겨 지고, 공격적이라며 신체를 묶어 구속하고, 말을 걸거나 눈을 마주치지도 않았다. 간호사가 치매인에게 직접 말을 건 시간이 24시간 중 평균 120초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 희생정신으로 치매인을 위해 열심히 케어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스스로 치매인을 인간으로 생각하지 않고 학대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도 노인요양시설에서 흔히 있는 일이다. 저자들은 침상목욕을 하지 않기 위해 ‘좋은 케어’를 생각했고 그것은 선 자세로 목욕하는 것이었다.
“선다는 것은 존엄과 관계가 있다. 존엄이란 누구의 것인가? 대상자인가? 케어하는 사람의 것인가? 욕창 간호를 하기 전에 진통처지를 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나는 자신의 존엄을 되찾았다.”(29쪽)
기존의 케어 개념에 혁명이 필요하다
휴머니튜드의 전제는 치매노인의 폭력에 대한 다른 시각에서 출발한다. 치매인은 공격하려던 것이 아니라 자신을 방어하려는 것일 뿐, 오히려 공격한 사람은 케어하는 쪽이라는 것이다. 치매인을 사람이 아니라 물건처럼 취급하기 때문에 할퀴거나 깨물기도 하고 소리를 지르기도 한다는 것. 예를 들어 목욕을 시키면서 음부를 씻기 위해 당연하다는 듯이 다리를 벌리려 하면 상대방은 무릎을 오므리고 저항하게 된다. 치매인이든 아니든 아무렇게나 붙들리고 다리가 벌려지면 매우 굴욕적으로 느낀다. 씻고 있으니까 움직이지 마세요. 이렇게 하고 계속 같은 자세를 유지하려고 누르고 있으면 상대방은 할퀴거나 깨물 수밖에 없다. 그러면 그는 ‘공격적인 치매인’이 되는 것이다. 인지가 낮아졌다고 해서 이렇게 해도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의 존엄성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다. 케어하는 사람들도 존엄은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인지적, 신체적으로 제약이 있는 노인에게서 권리를 빼앗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행하는 여러 가지 행동들이 사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치매인에게 폭력을 가하면서 그 폭력성을 치매인의 탓으로 돌리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저자들은 케어하는 사람에게는 ‘일종의 혁명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기존에 가지고 있는 개념을 완전히 버리고 전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나쁜 케어를 하려고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는 것. 잠자는 시간, 먹는 시간을 동일하게 하는 것만 해도 조직이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각자가 원하는 시간에 자고 먹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막연히 비용이 많이 들거라 생각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도 않으며, 기존의 케어 개념, 철학을 재검토한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한다.
의존하는 것이 자율을 가능하게 한다
휴머니튜드는 자유와 자율에 관한 모든 권리를 존중한다. 그 기반은 ‘세계인권선언’이다.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로우며 동등한 존엄과 권리를 가진다. 모든 사람은 이성과 양심을 타고나며 인류애의 정신으로 서로를 대해야 한다.’
자유와 자율. 인지적, 신체적으로 제약이 있는 치매인에게 자유와 자율이 가능할까? 치매인에게 가장 힘든 것이 바로 자유와 자율 아닐까? 휴머니튜드는 여기서 의존을 이야기한다. 자율을 가능하게 하는 의존, 여기에 휴머니튜드의 혁명성이 있다. 의존은 바람직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노인이 의존하는 상태를 부정적으로 파악하지 않고 의존이야말로 힘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누구에게 의존하는가? 자신의 자율을 실현하기 위해 도움을 주는 사람에게 의존한다. 여기서 자율은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 있거나 또는 선택할 가능성이 있는 상태’를 말한다. 신체적인 제약은 있지만 지적 능력이 있는 경우에는 도움을 받아 자율적인 선택이 가능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인지장애가 있는 경우에는 어떻게 자율이 가능할까? 특히나 우리 엄마처럼 말로 자신의 의사를 잘 전달할 수 없는 경우에는?
“당신이 무엇을 바라는지를 전달할 수 있고 또는 그것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상태라면 당신은 자율적이다. 전달하는 수단이 반드시 언어일 필요는 없다. 케어하는 사람이 당신이 전달하려고 하는 것, 그 지향성을 파악할 수 있다면 당신의 자율은 존중되어야 한다. 나는 사람은 어떠한 상태가 되더라도 무엇을 요구하는지, 자신에게 무엇이 좋은지를 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마지막 순간까지 자율은 존중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85쪽)
여기에서 휴머니튜드는 유대결속을 말한다. 힘의 관계가 아니라 케어하는 사람과 받는 사람 사이에 긍정적인 의존관계에서 나오는 유대관계가 있으면 그 사람의 자율과 자주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떠한 상태가 되더라도 전달할 수 있다.’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다.
존엄은 그 사람의 ‘지금’에 주목한다
휴머니튜드에서 케어하는 사람은 ‘1)회복을 목표로 한다, 2)현재의 기능을 유지한다. 3)위의 두가지가 모두 불가능할 때는 마지막까지 옆에 있어준다’는 세가지 레벨의 목표를 가진다. 질병이 아니라 상대방 그 사람을 보고 그 사람을 중심으로 케어한다. 여기서는 ‘대상자 중심의 케어’라고 말하는데 우에노 지즈코가 <돌봄의 사회학>에서 말하는 ‘당사자 중심의 케어’와 같은 개념이라고 볼 수 있는데, 거기서 좀 나아간다. 휴머니튜드는 케어받는 사람을 중심에 두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의 관계, 유대관계의 질을 중심에 둔다. 치매인이 자고 있을 때 대부분의 병원이나 시설에서는 식사나 기저귀 교환 등을 이유로 그를 깨운다. 휴머니튜드는 그가 자는 동안은 무리하게 깨우지 않는다는 원칙이 있다. 치매의 핵심 증상 중 하나가 기억장애인데, 기억은 잠을 자는 동안 뇌 안에서 재형성된다고 한다. 수면을 방해하면 기억이 악화된다. 케어하는 사람은 케어받는 사람의 건강을 해쳐서는 안된다는 철칙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실행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휴머니튜드라면 더는 치매인을 깨울 수 없다. 그것이 케어받는 사람과의 유대관계에 기초한 상대방을 존중하는 행위가 되기 때문이다.
<똥꽃>을 읽으면서 나는 ‘건강보다 존엄’이라고 생각했는데 휴머니튜드에서는 존엄이 바로 건강을 위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사람이 사람으로 다루어지는 것이 존엄인데, 심리적으로나 신체적으로 무엇 하나 빠지지 않는 ‘온전성’이 지켜질 때 존엄이 생겨난다. 마음이나 몸이 상처를 입으면 존엄하다는 느낌을 빼앗긴다. 사람은 살면서 계속 변화한다. 마찬가지로 사람의 온전성도 변화한다.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으로 완전하게 양호한 상태’가 건강한 상태라면, 치매인은 취약한 상태에서 새로운 온전성이 형성된다. 아이가 되거나 사람이 아닌 상태가 되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도 제 손으로 밥을 먹을 수도 없고 두 다리로 설 수도 없으며 말하는 것도 불가능해진 치매인을 보며 ‘더 이상 인간은 아니다’라고 생각해버리는 것이 아닐까.
“그 사람의 그때의 상황을 받아들이고, 그 사람이 현재 바람, 하고자 하는 것을 존중하며 진실된 관계를 형성해야 한다. 존엄은 온전성과 연결되어 있다. 그것은 본인이 느끼는 것이지 다른 사람이 느낄 수는 없다. 하지만 존엄을 느끼는 대상자의 반응을 케어하는 사람이 알아낼 수는 있다.”(131쪽)
보다, 말하다, 만지다, 서다
휴머니튜드는 ‘당신을 소중히 생각한다’를 전달하기 위한 기술로 ‘보다, 말하다, 만지다, 서다’라는 네 가지 기법을 활용한다. 전혀 말을 하지 않던 노인과 눈을 맞추어 말하고 친밀하게 만지는 행동은 우리 인간이 인간이 되기 위한 중요한 관계라고 보기 때문이다. 즉, ‘보다, 말하다, 만지다’는 살아남기를 약속하는 행위인 것이다.
보는 것은 사랑의 표현이며, 보지 않는 행위는 ‘당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수평의 시선으로 평등한 관계성을 전달하고 이렇게 오래 바라볼 때 긍정과 애정이 표현되며 연결됨을 느낀다.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것만 해서는 유대관계는 만들어지지 않으며, 애정을 전달하는 기술로서 바라보는 방법을 배울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는 철학도 결부되는데 나는 어떤 사람이고 눈 앞의 사람은 누구인가? 우리 관계는 어떠한 것인가?라고 질문해야 한다.
말을 하지 않는 노인에 대해 ‘이 사람은 아무 것도 모른다. 이해를 못한다’고 생각하면 안되지만, 우리 엄마처럼 반응이 없는 치매인에게는 어떻게 말을 걸면 좋을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애정이 부족하거나 배려가 없어서가 아니다. 휴머니튜드는 ‘오토피드백’을 하라고 한다. 내가 하는 행동을 실황중계하라는 것이다. 감정기억만 남는 치매인에게 좋은 감정을 남길 수 있는 긍정적인 말로 움직임을 표현한다. 손을 들어보세요. 팔을 살짝 올려볼게요. 어깨를 주무르고 있어요. 기분 좋죠? 따뜻한 물을 부을게요. 따뜻하죠?… 반응이 없다고 해서 들리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당신을 소중하게 생각한다는 메시지를 계속 전달할 수 있고, 상대방의 눈빛이 달라진다고 한다.
만지는 것은 상대방에게 친절함을 전달하는 방법이다. 넓게 부드럽게 천천히 쓰다듬으면서 감싸듯이 만지는 다정한 접촉법. 몸을 만지는 것은 뇌를 만지는 것이라고 한다. 피부를 만지지만 뇌에서는 이 상대방은 위험한가? 몸을 맡겨도 좋은가?를 판단하고 있다는 것. 좋은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만져도 괜찮은 부위와 순서가 정해져 있다. 문화에 따라 다르겠지만.
휴머니튜드가 제4의 기법으로 중시하는 ‘서다’. 선 자세는 뼈나 관절, 호흡기, 심장 등의 순환기계, 피부 등에 영향을 미친다. 휴머니튜드는 대상자에게 가장 해서는 안되는 것이 움직이지 못하게 구속하는 것이라고 한다.
“몸을 움직이고, 걷는다는 것은 지성의 근간이며 또 인간임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케어하는 사람은 반드시 이 사실을 이해하기 바란다.”(163쪽)
오랫동안 걷지 않던 사람을 걷게 하면 갑자기 말을 하기 시작한다고 한다. 엄마도 입원을 하면서 걷지 않게 되었다. 하루 중 20분만 설 수 있으면 거동을 못해 누워 지내는 일은 결코 없으며 죽는 마지막 날까지 서는 기능을 유지할 수 있다고 하는데, 그 20분도 약간씩의 시간을 모아서 하면 된다고 한다. 서서 걸을 때 다른 사람의 도움을 필요로 하더라도 자율을 마지막까지 잃지 않는다고. 엄마에게도 해보고 싶다. 너무 빨리 엄마 스스로 움직이고 걷는 것을 내가, 의사가, 포기해버린 건 아닐까 후회가 몰려온다.
우리나라에서도 인천시를 중심으로 휴머니튜드 전문가 양성교육이 실시되고, 여러 지자체나 노인요양시설 등에서 휴머니튜드 케어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휴머니튜드 자격증 제도를 고민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아직도 대부분의 병원이나 시설에서는 이런 방법이 도입되지 않고 있는 것도 현실이다. <휴머니튜드 입문> <가족을 위한 휴머니튜드> 등의 책도 나와 있으니 집에서라도 실천해보라고 권해보고 싶다.
저도 마지막까지 가능한 자기 힘으로 서 있는 게 중요하다는 이야기가 인상적이었어요.
엄마 때도 정신과 의사가 계속 그랬어요.
누워있지 않는 것, 밥은 식탁에서 드시고 세수는 화장실에서 하는 것, 가능한 그걸 계속 하는게 젤 중요하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율’, ‘주권’ 이런 개념은 여전히 문제적이지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