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엄마의 구술 생애사를 써볼까 생각했던 적이 있다. 엄마의 삶을 기록으로 간직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엄마의 삶을 통해 우리의 현대사를 고스란히 볼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손녀딸이 인터뷰를 시작하긴 했는데 이런 저런 사정으로 진행을 못해서 좀 아쉽다. 이렇게 빨리 엄마가 기억을 잃고 이야기를 못하게 될 줄 그때는 몰랐다.
산업화세대 워킹맘
10년 전쯤 아버지가 대장암 재발로 병원에 오래 입원해 계실 때 엄마는 병원간호사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혈관이 잘 안 나오는 아버지에게 혈관 주사를 놓으려면 꽤나 힘이 들었는데 엄마가 곧잘 혈관을 잡아주었기 때문이다. 1935년생인 엄마는 간호사이자 조산사였다. 엄마가 간호사 면허번호를 말하면(0000번 대) 간호사들(면허번호 000000번 대)은 깜짝 놀라며 ‘선배님’이라 불렀다. 엄마는 은근히 그걸 즐기는 듯했다. 대학병원 수술실에서 근무하던 엄마는 결혼하면서 그만두었고, 시골학교 교사인 아빠의 고향에서 많은 아이들이 태어나는 걸 도왔다고 했다.
엄마는 의대에 가고 싶었다. 중학생 때 친엄마가 병으로 돌아가시고 새엄마가 들어오셨는데 엄마가 의대 가는 걸 반대해서 간호학교에 갔다. 동생인 삼촌 두 분은 의사다. 엄마 세대, 즉 산업화 세대에 많은 딸들은 아들들을 위해서 진학을 포기하고 산업전선에 뛰어들었다. 남동생을 위해 희생한 누나들. 엄마는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딸이었기 때문에 원하는 의대에 갈 수 없었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후에 엄마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내 또래는 대부분 형제가 4~5명 정도 된다. 유독 우리집은 형제가 오빠와 나 딱 두 명이다. 어렸을 때 왜 나는 언니 동생이 없는지 궁금하고 속상하기도 했었는데 나중에야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아들 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 우리 어렸을 때 많이 듣고 보던 문구다. 지금은 출산율이 0.7이 안될 정도로 떨어져 저출산이 큰 문제가 되고 있지만, 당시 정부는 산아제한 정책으로 가족계획 사업을 시행했다. 처음에는 민간 중심으로 진행되던 것이(1961년 4월 민간운동 단체인 대한가족계획협회 창립) 1961년 11월 정부의 공식적인 시책으로 채택되었고 1962년부터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일환으로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오빠와 내가 학교에 다닐 나이가 되자 부모님은 대도시로 이사했고, 엄마는 이 사업을 맡아 현장에서 추진하는 지자체 담당부서(도청 보건과)에 재취업해서 일하고 있었다. 가족계획 사업이 본격화하던 시점에 엄마는 솔선수범 이를 실천했던 것이다.
얼마 전 엄마네 집을 정리하러 갔다. 서랍장에서 옛날 사진 몇 장과 끝부분이 나달나달해진 편지지 같은 것을 발견했다. 펼쳐보니 엄마 필체로 A4 한 장 정도의 글이 적혀 있었다. 교육이 끝나고 소감을 발표하는 글이었다. 50여 년 전 엄마가 짧은 원피스를 입고 해외에서 찍은 사진이 있었는데 그때였나 보다. 도청에 다니던 1970년대 초반 해외연수에 참여했고 그 연수가 끝난 후 연수생을 대표하여 감사와 소감을 발표한 것이다.
당시 엄마의 직장생활이 어땠는지는 잘 모른다. 내가 직장생활을 할 때에도 남녀차별이 심해서 계속 싸워야했는데 엄마는 어땠을까? 공무원이어서 좀 덜했을까? 직장도 다분히 가부장적인 분위기였을텐데 힘들었다는 이야기보다는 동료들과 재미있게 일했던 에피소드를 더 많이 들었다. 남자들이 대부분인 직장에서 몇 안 되는 여성으로서 그 분위기에 저항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 같긴 하다. 더구나 엄마는 매사에 긍정적인 성격이다.
엄마는 정년퇴직 때까지 쉬지 않고 일했다. 정년퇴직 직후 친구와 아프리카 배낭여행을 다녀온 엄마는 르완다로 의료봉사를 가겠다고 했다. 가족들의 만류로 아프리카행은 접었지만 곧바로 연세대학교 보건대학원 가정간호교실에 등록을 하고 1년 동안 개근하면서 그 코스를 마쳤다.
특별한 교육열
어느 날 엄마는 서울로 이사를 했다. 내가 고등학교를 전주로 가서 기숙사생활을 할 때였는데 오빠가 대학입시에 실패하자 오빠를 데리고 서울로 올라간 것이다. 광주 집에는 아빠와 할머니만 남았다. 광주에 엄마와 아들, 서울에 또 엄마와 아들, 그리고 나는 전주에. 광주와 서울에서 두 엄마는 각각 자신의 아들을 돌보게 되었다. 집에 없었던 나는 어떻게 된 일인지 잘 몰랐고 다만 고등학생 시절 내내 주말마다 한 주는 광주로, 한 주는 서울로 왔다 갔다 했다. 안정적인 직장도 그만두고, 남편도 시어머니도 내버려두고, 아들만 데리고 아무 연고도 없는 서울로 그냥 올라온 엄마. 엄마는 셋방을 얻고 보건소에 재취업을 했다.
그러고 보면 우리 부모님의 교육열은 대단했던 것 같다. 오빠와 나는 광주의 사립초등학교를 다녔다. 광주에서 내로라하는 사람들이 자식들을 보내던 학교다. 그 시절에 교실에 개인 사물함이 있었고, 실내에 수세식 화장실이 있었다. 학생들은 한 학년에 남녀 한반씩 100명 정도로, 교복을 입었고 스쿨버스를 운영했다. 우리집은 이런 사립학교를 다닐 만큼 넉넉하지 않았다. 초등학교 3학년 때쯤 집을 지어 이사하기 전까지 우리는 학교 앞 셋집에 살았다. 내가 전주로 고등학교를 가게 된 것도 넘치는 교육열 때문이었다. 마침 그 때 대도시부터 시행되던 고등학교 평준화가 광주까지 오게 되었고 전주는 아직 평준화되기 전이어서 아빠는 나를 전주로 보내 고등학교 입시를 치르게 한 것이다.
우리 부모님만이 아니라 당시 부모님들의 교육열은 참 대단했다. 한창 성장하는 시절에 부모들처럼 고생하지 않으려면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때는 개천에서 용이 나던 시절이었다. 다들 땅 팔고 소 팔아 대학을 보내려고 애를 썼다. 그래도 지방에서 서울로 대학을 보내는 일은 쉽지 않았다. 재수하는 친구들은 친척집에 가거나 다른 형제들과 자취를 하거나 혹은 간혹 하숙을 하기도 했지만, 엄마처럼 직장을 그만 두고 아들을 데리고 서울로 올라오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지금 생각해도 참 대단한 엄마다.
종가집 종부
엄마는 나씨 집안의 18대 종부다. 어릴 때 시골집에는 증조할머니부터 나까지 4대가 살았는데, 증조할머니, 할머니, 엄마가 다 종부였지만 할머니는 집안일을 거의 할 줄 몰랐고 여장부 증조할머니가 집안 대소사를 관리했다. 할머니는 명절이나 특별한 날에만 유과나 강정 같은 것을 만들었고 평소에는 늘 참빗으로 곱게 빗어 쪽진 머리에 정갈한 한복을 입고 <숙영낭자전> 같은 책을 필사했다. 시골집에서는 그 마을 사람들의 대소사를 다 챙겼고 젊은 엄마는 증조할머니의 지휘에 따라 실질적인 일을 도맡아 했다고 한다. 증조할머니 돌아가시고 대도시로 이사할 때 할머니 할아버지도 함께 오셨고, 엄마는 평생 두 분을 모시고 살았다.
일 년이면 기제사가 열세 번 있었고 시골 선산에서 시제도 두 번 씩 있었다. 엄마는 직장생활을 하면서 애 둘을 키우고 ‘접빈객 봉제사’를 다 해냈다. 그러느라 엄마는 늘 바빴다. 퇴근하고 그때부터 음식을 장만해서 제사를 지내는 날도 많았다. 그러던 어느 해 한 달에 두 번 지내기도 했던 제사가 확 줄었다. 엄마가 몇 년간 할아버지를 설득했고 드디어 3대조 위 조상들의 제사를 한꺼번에 합제로 지내기로 허락을 얻어냈던 것이다. 1~2년 후에 ‘가정의례준칙’이 발표되자 할아버지는 “우리 며느리가 선견지명이 있다. 우리집은 벌써 가정의례준칙에 맞는 제사를 지내고 있다.”고 자랑했다고 한다. 가정의례준칙에 기제사는 2대조까지로 하라고 되어 있다. 마지못해 허락했지만 마음이 찜찜했을 할아버지가 ‘가정의례준칙’ 발표로 마음이 홀가분해졌을 것도 같다.
‘가정의례준칙’은 관혼상제를 간소화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장례식을 3일장으로 하는 것, 전통적인 상복을 벗고 흰색이나 검은색 한복 또는 검은색 양복을 입는 것 등 현재의 장례식 관련 내용이 이 준칙에 따른 것이고, 결혼식의 식순(신랑 신부 입장, 신랑 신부 맞절, 혼인서약, 성혼선언문, 주례사, 신랑 신부 행진)도 이 준칙에서 정한 것이다.
“너는 가난한 집 막내아들하고 결혼해라.” 엄마는 내게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가끔 엄마는 종부노릇이 버거웠던 것 같다. 왜 안 그랬겠는가. 직장생활하면서 시부모 모시고 애들 키우며 문중 행사까지 챙겨야 했으니. 그런데 막상 아빠가 돌아가시고 나자 엄마는 종친회 일까지 신경을 썼다. 아빠도 안계시니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싶을 만도 한데 그 끝없는 책임감은 도대체 어디까지인지.
돌봄의 화신
8남매의 장녀인 엄마는 주변의 모든 사람들을 돌보며 살았다. 시할머니와 시부모는 물론이고 시댁과 친정 쪽의 온갖 친척들이 우리집을 거쳐 갔다. 외할아버지 돌아가신 이후 둘째 이모가 우리집에서 몇 년간 대학을 다니고 졸업했고, 시골에서 올라온 먼 친척뻘되는 고모도 우리집에서 학교를 다니고 시집을 갔다.
내가 대학을 가면서 우리 식구는 모두 서울로 올라왔는데, 서울에 살게 된 이후에는 우리 식구끼리 산 적이 별로 없었던 것 같다. 내 또래 사촌동생들이 우리집에서 대학을 다녔고, 나보다 몇 살 많은 이모, 삼촌, 그리고 오빠 친구까지 길게는 1년, 짧게는 몇 개월씩 우리집에서 살았다. 방도 많지 않은 집에 늘 객식구가 들락거렸고 엄마는 직장에 다니면서도 그 식구들에게 밥을 해 먹였다. 오빠 친구나 내 친구들도 수시로 드나들었다. 한꺼번에 10여 명씩 몰려와도 그 때마다 밥을 새로 해주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우리가 살던 5층 아파트 단지의 모든 주민들은 우리집에 와서 예방주사를 맞았다. 엄마는 퇴근 후 늦은 시간에 찾아오는 이웃도 마다하지 않았다. 결혼 후 아이들을 공동육아로 키울 때 엄마는 신촌까지 와서 공동육아 어린이집 아이들의 예방접종을 도맡아 해주었고, 통합 교육하던 발달장애 아이를 부모 대신 병원에 데려가기도 했다. 옆에서 볼 때 엄마는 이런 일을 힘들어하지 않는 것 같았다.
60세에 정년퇴직 할 때까지 엄마는 정말 일을 사랑하는 사람 같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일도 일이지만 사람들을 돌보는 일을 좋아했던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대학원에서 가정간호코스를 수료한 것도 그래서였지 않을까. 그걸 활용해 일을 하지는 않았지만 정년퇴직 후에도 엄마는 지속적으로 여러 사람들을 돌봤다. 이모들이 아파서 서울에 있는 병원에 진료하러 올 때면 늘 엄마가 먼저 나서서 예약부터 당일 날 데리고 다니는 것까지 다하고 집에 데려와 밥도 해 먹였다. 이모 아들 딸이 다 서울에 살고 있어도 이모들은 엄마네 집으로 갔다. 엄마 힘들게 한다고 사촌에게 “네가 모시고 다녀”라고 말하기라도 하면 엄마는 된통 나를 나무랐다. “너보고 하라는 것도 아니고 내가 하는 건데 왜 그러느냐”며.
심지어는 사돈도 보살폈다. 새언니네 엄마가 엄마네서 멀지 않은 곳에 사셨는데 도움이 필요하면 엄마를 찾았다. 엄마는 새벽 2시에 연락이 와도 뛰어가셨고, 그 분을 모시고 병원에도 다녔다. 엄마는 주변에 돌봄이 필요한 사람이 있으면 그냥 자신이 나섰다. 이럴 때 보면 다른 엄마들이랑 좀 다른 면이 있는 것 같다. 엄마 세대 부모님들은 기본적으로 자신을 희생하며 열심히 사셨다. 그 희생은 대부분 가족들을 벗어나지 않는다. 엄마는 그 범위가 좀 넓었고 사회적 책임감도 있었던 것이다.
엄마는 사람들만 돌본 게 아니다. 나 어릴 때는 집에 새들이 많았다. 서울로 이사 온 후에도 마당 있는 집에 살 때는 닭, 토끼 등도 키우고 열대어는 몇 년 전까지도 키웠다. 엄마는 동물들을 잘 키웠고 새끼들을 분양하느라 바빴다. 동물만이 아니라 식물들도 많이 키웠다. 넓지 않은 정원에 나무도 꽃도 많았다. 석류 따서 소화제 만들고, 맨드라미꽃으로 분홍색 송편을 만들었다. 주변사람들은 화분의 식물이 시들시들하면 엄마에게 가져 왔고 1~2주일 쯤 지나면 거의 다 상태가 좋아져서 되돌아갔다.
아빠를 돌본 것도 물론 엄마였다. 심장에 스탠트를 넣을 때도, 대장암 수술을 하고 항암치료를 할 때도 늘 엄마가 보살폈고 아빠는 어린 아이처럼 엄마에게 기댔다. 아빠는 중환자실을 정말 싫어하셨는데, 이유는 엄마가 옆에 없기 때문이다. 대장암 발병 3년 만에 하복부에 암이 전이되었고 항암치료를 하다가 백혈구수치가 거의 제로가 되어 돌아가실 뻔했다. 두 달 간 병원에 입원해 계시는 동안 간병인은 엄마였다. 나도 매일 병원에 갔지만 나는 아빠보다는 엄마를 돌보러 갔다. 아빠는 퇴원을 하실 만큼 회복이 되셨지만 6개월 후에 결국 돌아가셨다. 엄마는 아빠가 좀 더 사실 걸로 기대했었나보다. 힘들어하는 엄마를 손주인 딸, 아들이 번갈아 함께 살며 2년을 보냈고, 우리집으로 오시라고 그렇게 졸랐지만 엄마는 2년간 더 버티면서 혼자 사셨다.
“이렇게 똑똑한 할머니는 처음 봤어요!” 엄마네 집을 지은 시공회사 사장님 말씀이다. 얼마 전 엄마네 집 동네 부동산 사장님도 “그 할머니 참 똑똑 하셨는데.”라고 하셨다. 엄마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엄마가 똑똑하다고 입을 모은다. 직장에서도 인정받았고 일에 필요한 공부도 꾸준히 했다. 종부 역할도 어른들이 만족스러워할 만큼 해냈고, 자식들 교육에도 열성을 다했다. 그러면서도 주변 사람들을 누구랄 것도 없이 두루두루 돌보며 살았다. 우리 엄마, 울트라수퍼 돌봄우먼이다! 그런 엄마가 치매에 걸릴 거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