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학의 눈으로 본 ‘죽어가는 자의 고독’
노르베르트 엘리아스, <죽어가는 자의 고독>, 문학동네
아버지의 고독
우리 아버지는 올해로 90세가 되었다. 아버지 돌봄을 한지 햇수로 6년 차.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버지가 입버릇처럼 하는 말, ‘사는 것이 천형이다’를 들을 때마다 왜 이렇게 매사를 비관적으로만 볼까, 생각하며 그런 아버지에게 화가 나고 속이 상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그런 말이 단지 아버지의 부정적 사고 패턴에서 나오는 신세 한탄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사는 것이 싫은 이유는 삶이 지루하고 외롭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70세가 되던 해에 평생 살던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밥벌이를 하는 자식들 근처로 주거지를 옮겼다. 한동안 아버지는 재경 동창회에 나가서 옛친구들을 만나고 친구들의 경조사도 챙기며 살았다. 또 낯선 도시에서 아침 운동을 하며 동네 친구들도 사귀었다. 그런데 서울 나들이도 어렵고 아침운동도 못하게 되자 친구들이 하나둘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래도 어머니가 아프기 전에는 함께 산책도 하고 장도 보러 다니고 외식도 자주했다. 주말에 자식들이 방문할 때 새로 찾은 맛집을 소개하는 것도 부모님의 즐거움이었다. 그런데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아버지의 치매가 진행되면서 모든 것이 변했다. 아버지의 삶은 완전히 쪼그라들었다.
종종 걸려오던 아버지 친구분들의 전화는 끊어졌다. 아버지 역시 누구에게도 전화하지 않는다. 간혹 친척들로부터 오는 안부 전화 외에 아버지와 세상을 연결하는 고리는 아들과 딸들, 그리고 데이케어센터가 전부다. 가족 돌봄 외에 데이케어센터라는 새로운 사회적 관계의 장이 생겨서 정말 다행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자신이 버려지고 잊혀진 존재인 것처럼 느낄 때가 많다.

사람들 속에서 늙고 병들고 죽던 시대
우리 아버지처럼 노인이 되면 움직일 수 있는 범위가 줄고 인간관계가 좁아져서 날이 갈수록 더 외로워질 수밖에 없는 것일까? 노르베르트 엘리아스(1897~1990)는 <죽어가는 자의 고독>에서 늙고 병들고 죽어가는 사람이 활동적인 사람들로부터 고립되거나 격리된 상황에 놓이게 되는 것은 숙명이 아니라 현대사회에서의 죽음의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특징일 뿐이라고 말한다. 노인이 오늘날처럼 고립감을 느끼지 않고 죽음을 맞을 수 있었던 사회도 있었기 때문이다.
현대인들의 고독한 죽음과 대비되는 죽음의 모습은 중세의 죽음이다. 오늘날 죽어가는 사람들 대부분은 병원의 침상이나 요양원과 같은 격리된 곳에서 죽어감을 경험한다. 그러나 유럽 중세에 죽음은 사람들이 함께 사는 곳, 누구나 볼 수 있는 공간에서 경험하는 일이었다. 수도원의 수사나 수녀가 아닌 이상 혼자서 죽는다는 것은 보통 사람들로서는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므로 중세에는 죽음과 죽어감의 과정이 현재보다 공공연하고 빈번하게 말해졌다.
오늘날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죽음에 대한 사실을 알려주기를 꺼려한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다 지켜보는 가운데 출생과 질병의 고통을 겪어야 했던 중세에는 죽음의 과정 역시 아이들이 지켜보는 가운에 일어났다. 이런 공개적인 죽음에서 격리된 죽음으로의 변화가 유럽에서는 수백년에 걸쳐 이루어졌다. 그런데 유럽과 달리 압축적 근대화를 경험한 우리 사회의 경우 사오십년전만 해도 죽음의 풍경이 중세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나의 할아버지도 할머니는 아프면 병원에 입원하기도 했지만, 그 시간은 길지 않았다. 집에서 아팠고, 집에서 돌아가셨고, 집에서 장사를 지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늙어가고 죽어가는 동안 이웃들이 끊임없이 왕래했다. 말기의 돌봄 역시 한집에 같이 사는 가족만의 일이 아니라 가까운 친척들이 참여하는 일이었다. 지금 우리 아버지처럼 혼자 버려졌다는 느낌을 갖기 어려운 조건이었다.
개인화된 사회와 죽어가는 자의 고독
서구사회의 문명화가 진행됨에 따라 사람들의 죽음에 대한 태도, 죽어가는 방식도 큰 변화를 겪었다. 엘리아스는 그 변화의 요인을 네 가지로 제시한다. 첫째, 수명연장, 둘째, 의학의 발달과 보험, 셋째, 국가에 강제력에 의한 사적 폭력의 통제다. 이 세 가지는 죽음을 일상으로부터 멀리 떼어 놓았다. 오래 살게 될수록 사람들은 늙음과 죽음을 언제든지 닥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점점 더 나중의 일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죽음은 언제든 닥칠 수 있는 내 문제가 아니라 운이 나쁜 남의 문제가 되었다. 아울러 의료기술이 진보하고 보험제도가 정착됨으로써 죽음을 연기할 수 있다는 희망이 사회를 뒤덮게 된다. 그 결과 노화와 죽음은 정상에서 벗어나는 일탈로 여겨진다. 생물학적 노화와 노화를 막는 기술에 대한 지식은 늘어난 반면 노화의 체험은 점점 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된, 이상한 상황이 벌어진다.
국가에 의한 물리력의 독점은 죽음에 대한 이중적인 태도와 심리상태를 낳았다. 한편으로는 죽음을 우연이나 사고가 아닌, 자연적 과정으로 보게 됨으로써 다른 사람의 손에 의해 죽는 것을 노화나 질병으로 죽는 것보다 더 끔찍하고 예외적인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다른 한편 국가가 일으키는 전쟁으로 인한 대량살상과 강제수용소에 대해 무비판적으로 용인하는 심리상태가 나타난다. 제2차 세계대전이나 나치 강제수용소까지 갈 것도 없이 지금 우리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과 인명 살상에 대한 무감각이 이것을 입증한다.
현대인들의 죽음에 대한 태도에서 빠뜨릴 수 없는 네 번째 특징은 현대 사회가 고도로, 그리고 아주 특수한 방식으로 개인화된 사회라는 점이다. 이 점은 위의 세가지 조건보다 더 깊이 ‘죽어가는 자의 고독’과 관계한다. 왜냐하면 각 개인이 죽음에 대해 갖는 이미지는 그 사회에 만연한 자기 자신에 대한 이미지, 인간에 대한 이미지와 깊게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현대사회에서 사람들은 대개 자신을 기본적으로 독립된 개별존재, 창문 없는 단자(monad), 고립된 ‘주체’로 간주한다. 이 경우 다른 모든 사람들을 포함한 전체 세계는 ‘외부세계’에 위치한다. 사람들의 ‘내부세계’는 이 ‘외부세계’와 단절되어 있고, 마치 보이지 않는 벽에 의해 타인들로부터 격리되어 있는 것과 같다. 자신을 체험하는 이 특수한 양식은 ‘갇혀있는 인간 Homo Clausus’라는 자기 이미지로서, 이것은 자기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는 방식 그리고 죽어가는 실제상황에서 행동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죽어가는 자의 고독>, 59)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삶의 의미를 고립된 단자적 개인의 의미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엘리아스는 이것을 비판한다. 왜냐하면 ‘의미’란 사회적 관계 속에서만 구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 사이의 의사소통과 사회생활이 없다면 삶의 의미 또한 구성될 수 없다. 그러므로 “개별 인간의 삶에서, 그 삶이 다른 사람들에게 의미하는 바와 동떨어진 어떤 의미를 찾으려는 시도는 헛되다(62).” 그런데 개별화된 현대사회 구성원들은 이러한 사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자신이 ‘외부세계’와 별도로 존재한다는 감정에 빠져 다른 존재와 대상들과 더불어 세계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을 성찰하지 못한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인간은 본디 고독한 존재이기 때문에 외로이 늙고 외로이 죽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그러나 역사상 오늘날처럼 혼자 죽는다는 관념이 빈번하게 나타난 적은 없다. 그것은 생활양식과 사회구조로 인해 현대인이 살면서 반복적으로 체험하는 형식에 속한다. 오늘날 홀로 죽는다는 관념이 각별한 것은 현대인들이 그것에 각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사회 속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사진=클립아트코리아
죽음이 삶의 일부가 되려면
엘리아스는 “오늘날처럼 조용하게, 위생적으로, 고독감을 조장하는 사회적 조건 속에서 죽게 되는 건 역사상 유례없는 일(92)”이라고 말한다. 오늘날 죽어가는 자가 처한 조건의 첫 번째는 그가 살던 삶의 방식과 장소로부터의 격리다. 노인에 대한 보호는 대개 가까운 사람들과 멀어져서 낯모르는 사람과 함께 사는 방식을 띠는 경우가 많다. 살던 곳으로부터의 격리는 오랜 감정적 유대가 끊어지는 것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이전에 어떤 관계도 가진 적이 없는 사람들과 강제로 같이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노인들이 이미 쇠약해진 몸과 마음으로 새로운 인간관계를 맺는 것은 지극히 어렵다. 그래서 엘리아스는 이렇게 단언한다. “많은 요양원이 고독한 사막과 같다(82)”
죽어가는 과정에서의 정서적 고립 역시 현대사회의 두드러진 특성이다. 최첨단의 과학적 진료를 받을 수 있는 병원에서의 죽음을 보자. 죽어가는 사람이 사랑했던 사람들, 곁에 있음으로서 위안이 될 수 있는 사람들의 접촉은 최소화되거나 심지어 금지되기도 한다. 많은 노인들의 임종 장소인 중환자실에서의 죽음이 그 실례다. 병원 침상에서 죽어가는 사람은 전문가의 간호를 받지만 거기에는 어떤 감정적 몰입도 존재하지 않는다.
생명을 연장하는 기술의 완벽성이 죽어가는 자의 고독을 만들어내는 요인인 것은 아니다. 죽음이 공식적인 것이 아니라 비공식적이고 개인적인 것이 됨으로써 사람들은 죽어가는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몰라 거리를 두기도 한다. 이뿐만이 아니다 문명화 과정에서의 문명적 제약도 있다. 그 단적인 예가 냄새에 대한 민감성이 높아진 것이다. 노인이나 죽어가는 사람의 몸에서 나는 냄새에 거부감을 느끼는 것도 죽어가는 사람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에 영향을 미치고 때 이른 격리를 당연시 하게 만든다.
이런 요인들로 인하여 죽어가는 사람이 자신이 다른 이들에게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고 느끼는 것이야말로 진정 외로운 것이라고 엘리아스는 말한다. 그런데 그 어떤 사회보다도 사람들이 오래 살고, 위생적이고, 의료와 과학이 발달한 현대사회야말로 죽어가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이 산 사람들의 공동체에서 이미 배제되었다고 느끼게 하는 사회이다. 그렇다면 덜 고독하고, 더 평화로운 죽음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아마도 우리는 보다 공개적으로 그리고 분명하게 죽음에 대해 말해야 할 것이다. 설령 죽음을 더 이상 신비스러운 것으로 제시하지 않게 되더라도 말이다. 죽음은 숨겨야 할 어떤 비밀도 없다. 죽음은 한 인간의 종말이다. 사람들이 죽음을 더 이상 배제하지 않고 인간 삶의 총체적 구성인자로서 인간의 표상 속에 끌어들일 때 스스로를 외로운 존재로 느끼는 ‘갇혀 있는 인간’이라는 에토스는 급속히 약화될 것이다.(<죽어가는 자의 고독>, 74)
엘리아스는 죽어가는 자의 고독이라는 문제를 철저하게 사회학적 시선으로 바라본다. 마치 뒤르켐이 자살을 사회학의 대상으로 만든 것처럼 엘리아스도 죽어가는 자의 고독을 사회학적 문제로 제기했다. 40년 전에 나온 오래된 책이지만 이 책이 던지는 문제의식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우리가 직면한 초고령화 사회에서 제기되는 문제들인 노인을 대하는 사회의 태도, 요양원과 같은 시설화의 문제, 죽음의 의료화를 포함하여 존엄한 노년, 존엄한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묻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썼을 때 엘리아스의 나이는 85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