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와미 비베카난다, 『마음의 요가』, 판미동
스와미 비베카난다는 누구인가
스와미 비베카난다(1863~1902)는 영국 지배하의 인도 캘커타에서 태어났다. 그는 간디가 “만일 인도를 알려면 비베카난다를 공부하라”고 말할 정도로 근대 인도의 힌두교 영성에 큰 족적을 남겼다. 비베카난다는 대학에서 서구식 교육을 받고 서양사상과 논리학에 빠지기도 했지만 라마크리슈나(1836~1886)를 만나고부터는 그의 제자로 살았다. 비베카난다는 라마크리슈나와의 첫 만남(1881년)을 이렇게 회상한다.
어느날 나도 이 사람에 대한 말을 듣고 한번 찾아가 보았습니다. 나는 속으로 “이런 평범한 사람이 훌륭한 스승이라고?” 생각하며 질문을 했습니다. “당신은 신을 믿으십니까” “아아, 믿습니다.” 하고 그는 대답했습니다. “그것을 증명하실 수가 있으십니까?” “아아, 그럼요.” “어떻게 증명할 수가 있습니까?” “나는 여기에서 당신을 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를 봅니다. 다만 당신을 보는 것보다 훨씬 더 분명히 봅니다.”(『라마크리슈나가 남긴 말』나의 스승 라마크리슈나, 1896년 2월 비베카난다의 뉴욕 강연에서)
앞에 있는 사람을 보는 것보다 더 분명하게 신을 본다는 대답에 비베카난다는 깊이 감동했다. 그는 모든 욕망을 극복하고 사랑으로 충만한 살아있는 한 인간을 보았다. 라마크리슈나는 인생의 반을 구도에, 나머지 반을 자신의 깨달음을 전하는 데 바쳤다. 그 만남은 비베카난다의 삶을 바꾸었다. 스승이 죽은 후 그는 스승의 가르침을 서양에 전하는 것을 소명으로 삼고, 1893년 시카고의 만국박람회에서 열린 제1차 세계종교회의에 힌두교 대표로 참석했다. 힌두교의 영성을 소개하는 그의 연설은 서구인 청중들을 매료시켰다. 그의 연설은 영국의 식민지로 전락한 인도의 종교를 열등한 것으로 생각했던 서구 지성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그 뒤 비베카난다는 인도는 물론 미국과 영국에 베단타 협회를 조직하고 베단타 철학과 영성을 알리는 데 삶을 바쳤다. 비록 짧은 기간 활동하고 3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지만 비베카난다는 세계적인 영적 지도자로 지워지지 않을 깊은 발자취를 남겼다.
‘베단타(Vedānta)’는 베다의 끝이라는 의미를 가진 말로 베다 중 가장 마지막에 나온 『우파니샤드』를 뜻하기도 하고 베단타학파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베단타학파는 인도의 정통 6파 철학의 하나로 『우파니샤드』와 『바가바드기타』를 중시한다. 베단타학파는 8세기의 위대한 학자 상카라에 의해 불이일원론(不二一元論)적 베단타로 완성되었으며 오늘날 힌두교를 대표하는 철학이 되었다. 인도에서는 종교와 철학, 수행과 이론이 분리된 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불교가 그러하듯이 베단타 철학 역시 철학이면서 종교이고, 영성 수련이자 영성에 대한 지식 탐구였다.
『마음의 요가』는 비베카난다가 1896년과 1900년에 런던과 뉴욕에서 행한 베단타의 불이일원론을 소개하는 강연 12편을 모은 책이다. 나는 비베카난다의 강연을 기초로 힌두교의 죽음관을 내가 이해한 수준에서 묘사해 보려고 한다.
업(까르마)의 법칙과 윤회
우리는 죽으면 어떻게 될까? 지금 여기에서의 삶이 전부일까? 고대 인도인들도 이런 의문을 가졌다. 이 의문에 대한 답의 하나가 윤회다. 윤회를 해명하는 철학이었던 고대 인도의 이원론을 먼저 알아보자. 알다시피 거의 모든 이원론은 물질과 정신, 필멸의 몸과 불멸의 정신(영혼)을 완전히 다른 것으로 분리한다. 고대 인도의 이원론은 개인의 정체성을 담보하는 실체를 아트만(atman), 혹은 지바(jiva)라고 이름 붙였다. 이원론자들은 몸에는 거친 몸과 미세한 몸이 있다고 생각했다. 거친 몸은 육신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한 몸은 생명력과 마음, 프라나(prana/에너지)로 구성된다. 죽어서 몸이 분해될 때 생명력은 더 미세한 마음으로 되돌아가고, 마음은 더 미세한 프라나로 녹아든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프라나는 인간의 영혼 속으로 돌아간다. 우리가 살면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위한 모든 것(신업, 구업, 의업)은 사라지지 않고 미세한 몸에 인상으로 저장된다. 우리가 죽음을 맞이하면 미세한 몸에 둘러싸인 영혼이 몸 밖으로 빠져나간다. 이 영혼이 수정란을 만나면 새로운 생이 이어진다. 이원론에서 윤회란 이러한 설명체계를 갖춘 영혼의 윤회를 말한다.
이원론에 따르면 사람이 죽은 후 영혼은 세 가지 영역, 태양의 영역과 달의 영역과 동물의 영역 중 하나로 간다. 순수한 영혼은 태양의 영역으로 가서 브라흐마-로카(brahma-loka)에서 신들과 함께 그곳에 영원히 머문다. 이기적 동기로 선행을 한 영혼은 달의 영역으로 가서 잠시 신적인 몸을 얻지만 자신이 쌓은 선업의 힘을 다 쓰고 나면 다시 세상으로 돌아온다. 악업을 쌓은 사람들은 귀신이나 동물이 되지만 그들 역시 악업의 힘이 다하면 다시 인간으로 돌아와 새로운 생을 시작할 기회가 주어진다. 영혼은 오직 인간의 세상에서만 선업과 악업을 쌓을 수 있다. 그 영혼의 최종 목적지는 순수한 영혼이 가는 브라흐마-로카다.
이 순수한 영혼은 개체적 영혼이며 그 자체로 완전한 것이자 불멸이다. 영혼은 창조된 것도 아니고, 태어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다. 이 입장은 고대 그리스 철학의 영혼불멸론과 매우 유사해 보이기도 한다. 인도 이원론이 말하는 개체적 영혼은 비록 완전한 존재지만 인간의 몸으로 행한 까르마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마치 누에가 몸에서 실을 뽑아내어 스스로를 가두는 고치를 만들 듯이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위가 미세한 몸에 저장되어 자신의 영혼을 제약하기 때문이다. 그 힘의 결과를 모두 맛보기 전에는 영혼에 대한 제약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영혼이 윤회를 거듭하며 빛의 세계로 가는 순환을 완성한다. 이 영혼은 거친 몸이나 미세한 몸을 통해 일하지 않는다. 브라흐마 로카로 간 영혼은 자신의 빛으로 찬란하게 빛나며 더 이상 태어나지도 죽지도 않는다.
그대가 바로 ‘그것’이다
개체의 영혼을 가정하는 고대 인도의 이원론은 불교의 비판을 피할 수 없었다. 불교는 몸도 마음도 무상한 변화 속에 있는 것이므로 변하지 않는 실체를 가정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나’는 다만 몸과 느낌과 지각과 의지 등의 집합체일 뿐이다. 이 비판에 대한 응답으로 베단타는 불이일원론을 내놓았다.
비베카난다는 이원론의 실체론과 불교의 비실체론을 통합한 것이 고차적인 불이일원론이라고 말한다. 어떻게 통합된다는 것일까? 먼저 경험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무상한 변화와 개체적 영혼이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판을 수용한다. 그러나 이원론이 전제한, 궁극의 원리로서 변하지 않는 영원한 실체의 존재를 긍정한다. 불이일원론에서는 불변하는 실체와 변화하는 현상이 둘이 아니다. 본체는 존재하지만 그것은 다만 현상으로 스스로를 드러낸다. 불이일원론이 불교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변화하는 몸과 마음의 배후에, 무수한 형상과 다양성의 이면에, 그 모든 것의 근거인 단일성이 놓여있다고 말한다는 것이다. 단일한 것, 그것은 우주적 영혼이다. 그러므로 이 입장에 따르면 우리가 보는 다양하고 천변만화하는 몸과 마음과 세계는 그 단일한 우주적 영혼이 풀려나와 ‘육화(involving)’된 것일 뿐이다.
그렇다면 우주적 영혼이란 무엇일까? 우주적 영혼은 적어도 우리가 아는 한에 있어서의 물질도 아니고 정신도 아니다. 또 그것은 원인도 아니고 결과도 아니다. 이것은 무슨 말일까? 우주적 영혼은 인과의 법칙 너머에 있다. 이것은 모든 것의 총체로서의 우주도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우주가 우주적 영혼 안에 있을 수는 있지만, 우주적 영혼이 우주 안에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연의 배후에 서 있다. 그것이 있기 때문에 자연이 있다고 말해질 수 있다. 그런데 그 존재는 오직 하나 뿐이기 때문에 마땅히 모든 곳에 존재한다. 그것만이 진정한 ‘존재’이고 진정한 ‘인식자’이고, 진정한 ‘향유자’다. 모든 것의 배후에 있는 그것은 참된 자기(Real Self), 브라흐만(Brahman), 아트만(Atman)이라 불린다.
모든 것이 그 하나라면 우리가 경험하는 이 다양한 존재들은 무엇이란 말인가? 불이일원론은 다양성은 이름과 형상이 만들어 낸 모습에 지나지 않는다고 본다. 불이일원론적 베단타는 그렇게 다양성을 산출하는 힘을 마야(maya)라고 부른다. 그런데 마야는 이 세계가 하나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만 작동한다. 마야는 무지의 산물이다. 무지를 극복하지 못한 자에게 이 환상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불이일원론자는 무지한 자가 보는 세상은 그가 보는 대로 나타난다는 점에서 진실이지만, 실은 그것은 그 자신이 만들어 낸 환상이자 창조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변하는 것은 마야의 산물인 자연에 속한 것일 뿐 브라흐만에 속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태어남과 죽음 역시 브라흐만에 속한 것이 아니라 자연에 속한 것이다.
한덩이의 진흙만 이해하면 진흙으로 만들어진 모든 것을 저절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그것을 이해함으로써 전 우주를 이해할 수 있는 것, 그것은 대체 무엇인가?(『찬도기야 우파니샤드』)
마치 바닷물 어디에나 소금이 존재하는 것처럼 브라흐만은 어디에나 있다. 그러므로 당연히 브라흐만은 내 안에도 존재한다. 이원론이 개체적 영혼이라 본 것, 그것은 실은 개체적 영혼이 아니라 우주적 영혼인 브라흐만이자 아트만이었다! 그렇다! “네가 바로 그것이다!” “당신이 바로 ‘그’이며, 당신과 ‘그’는 하나다.” 그러므로 ‘나는 태어났다, 나는 죽을 것이다’라는 생각과 말은 무지의 언어가 된다. 어디에나 편재하는 브라흐만과 하나인 나(아트만)는 태어난 적이 없고 앞으로도 태어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윤회하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다. 탄생과 죽음은 마음이라 부르는 미세한 몸이 일으킨 환각이자 뇌의 착란에 지나지 않는다. ‘나’와 ‘나의 것’이라는 관념은 다만 미신일 뿐이다. 우리의 인식에서 이러한 거짓된 자아 관념이 사라지는 그만큼 진정한 자아가 드러나게 될 것이다. 그렇게 그 ‘하나’로 되돌아가는 것, 그것이 우리 삶의 목적이다.

비베카난다
깨달은 자는 세상을 신성화한다
이것이 영원한 아슈밧타 나무다. 나무는 뿌리를 위로, 가지를 아래로 향해 뻗고 있다. 그 뿌리는 광휘Brigt라 불린다. 그것이 브라흐만이고, 그것만이 불멸자다. 그 속에 세계가 다 들어 있고, 그 누구도 ‘그것’을 넘어설 수 없다.(『카타 우파니샤드』)
다수성을 보는 자는 죽음에서 죽음으로 옮겨 다니지만 단일성을 보는 자는 자유를 얻는다. 도대체 어떻게 단일성을 볼 수 있을까? “먼저 아트만에 대해 들어야 하고, 그런 뒤 그것에 대해 숙고해야 하며, 다음으로 그것에 대해 명상해야 한다.” 고귀한 생각에 밤낮으로 자신을 노출시켜야 한다. 비베카난다는 진리를 이해하려면 용기를 가지고 대범하게 감각적 삶으로 이루어진 세상을 포기해야 한다고 말한다. 세상의 포기란 삶을 떠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의 세상, 우리가 아는 대로의 세상, 우리에게 나타나는 대로의 세상을 포기하는 것이다. 베단타가 가르치는 포기는 자신이 당연하다고 믿고 있는 세상, 내가 원하는 대로 되어야 한다고 집착하고 있는 세상을 포기하는 것이다. 그것은 세상의 진정한 모습을 아는 것, 바닷물에 녹아있는 소금을 보는 것, 온세상에 녹아들어 있는 아트만을 보는 것이다. 그것은 세상에서 신을 보고, 세상을 신성화하는 것이다. 충만한 영적 삶을 사는 것이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비베카난다가 라마크리슈나를 처음 만났을 때 나눈 대화로 돌아갈 수 있다. 라마크리슈나가 세상 모든 것에서 신을 보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비베카난다는 기꺼이 라마크리슈나의 제자가 되었다. 세상을 포기하고 신을 보는 사람은 어떻게 살까? 세상을 포기하라는 가르침을 잘못 이해하면 아무것도 하지 말고 흙덩이 같은 존재가 되라는 말인가 오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세상을 포기하는 자는 숙명론자도 허무론자도 아니다. 그는 세상을 신성화하는 일을 한다.
욕망에 쉽쓸리지 않고 일하는 자, 어떤 이기심에도 사로잡히지 않은 채 일하는 자, 그가 진정으로 일하는 사람입니다. 은밀한 기대를 품지 않고 일하는 자, 일로부터 그 무엇도 기대하지 않은 채 일하는 자, 그가 진정으로 일하는 사람입니다.(『마음의 요가』 87쪽)
베단타 철학의 이상은 모든 것에서 신을 보는 것이지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다. 베단타의 목적은 살아있으면서 해탈에 도달하는 것이다.(이런 사람을 생전해탈자, 지반묵타jivan mukta라고 부른다) 그는 자신의 개체성에 거의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는 세상을 전쟁터가 아니라 놀이터로 느낀다. 그렇다면 모든 것에서 브라흐만을 보고, 참된 자기에게는 삶도 죽음도 없다는 것을 깨달은 자는 어떻게 살까? 그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일꾼이 된다. 비베카난다는 깨달음이야말로 가장 실용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깨달은 자는 스스로 선이 됨으로써 우주를 바꾸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비베카난다의 스승 라마크리슈나도, 붓다도, 예수도 바로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이었다.

비베카난다의 스승, 라마크리슈나
불멸은 얻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내 안에 있다
“불이일원론은 천국을 목적이나 이상으로 삼지 않는다. 불이일원론의 이상은 몸을 완전히 없애는 것이다.”(『마음의 요가』, 316쪽)
왜 몸을 없애야 하는가? 유한한 존재로서 무한한 ‘하나’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한한 ‘몸’이라고 하는 것 역시 성립할 수 없다. 왜냐하면 몸은 제한을 통해 성립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음도 그렇다. 그렇다면 불이일원론의 ‘하나’는 몸과 마음을 완전히 넘어서는 ‘하나’이다. 그런데 이 ‘하나’는 현상의 세계를 초월하여 도달해야 하는 무언가도 아니다.
왜 그러한가? 비베카난다에 의하면 ‘하나’도 ‘브라흐만’도 ‘완전성’도 이미 우리 내면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원래 우리의 것이었기 때문에 우리가 진실로 ‘나는 자유롭다’고 선언한다면 그 순간 우리는 지유로워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나다’라는 것을 아는 존재에게는 삶도 죽음도 윤회도 없다. 오직 환희와 지복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것을 알지 못한다면 마야의 속박 속에서 탄생과 죽음, 윤회의 바퀴를 돌고 도는 삶을 살 수밖에 없으리라. 불이일원론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낡은 자아를 떨쳐버릴 수 있게 하는 이 지식을 지금 여기에서 자신의 내면에 일깨워야 한다. 삶의 모든 영역에서 우리를 구원해줄 수 있는 것은 지식밖에 없기 때문이다. 베단타에서는 지식의 습득 그 자체가 바로 영적 자각을 일깨우는 종교적 행위이고 예배이다. 그리고 그 예배자는 ‘하나’를 향해 이렇게 기도한다. 그 기도는 무지와 어둠을 부수기 위해 자신의 본성을 일깨우는 행위이다.
“일어나라, 그대 찬란한 자여! 일어나라. 그대 영원히 순수한 자여, 그대 탄생도 죽음도 없는 자여! 일어나라, 전능한 자여! 일어나서 그대의 진정한 본성을 드러내라, 그 작은 모습은 그대에게 어울리지 않나니.”(『마음의 요가』, 33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