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봄에는 예고가 없다
부모님 돌봄은 어떤 사전 징후도 없이 들이닥쳤다. 그 모든 일이 시작된 것은 어머니 아버지가 84세였던 2020년 10월 중순이었다. 아침 일찍 남동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머니가 허리가 아파서 꼼짝 못 한다며 응급실에 모시고 가달라는 연락이었다. 골다공증이 있는 어머니는 뼈가 약했다. 가벼운 충격에도 쉽게 갈비뼈에 금이 갔고, 운동하다 넘어져 고관절 수술을 받은 적도 있어서 우리는 늘 어머니 뼈 건강이 걱정이었다. 그렇지만 어머니는 웬만해서는 자식들에게 아프다는 말을 하는 분이 아니었다. 그런데 어머니가 먼저 동생에게 아프다고 전화를 했다니 보통 일이 아니라는 직감이 왔다.
급히 달려가 119를 불러서 어머니를 응급실로 모시고 갔다. 의사는 진통제 처방을 하고 돌아가라고 했다. 통증이 쉬 가라앉지 않아서 한방병원에서 요양을 겸해 치료를 받기로 했다. 코로나 방역으로 면회는 불가능했다. 전에도 어머니가 아파서 입원했을 때, 아버지가 혼자서 잘 지냈기 때문에 이번에도 그러려니 했다. 그러나 상황은 우리의 기대와 다르게 흘러갔다. 초기 치매인 아버지는 어머니가 당신 곁에 없자 혼자 있는 시간을 잠시도 견디지 못했다. 아버지는 끊임없이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빨리 집으로 오라고 재촉하며 화를 내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상태를 잘 아는 어머니는 안절부절하며 불안해 했다.
어머니가 더 병원에 있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아버지 때문에 어머니를 퇴원시키는 수밖에 없었다. 집에서 어머니를 돌보기 위해 아버지의 장기요양등급(6등급)으로 어머니에게 필요한 봉, 보행기, 휠체어 등 복지 용구를 신청하고, 의사 소견서를 첨부하여 어머니의 장기요양등급을 신청했다. 다행히 2주 만에 4등급이 나왔다. 일주일에 하루 오시던 도우미분에게 당분간 매일 오전 와달라고 하고, 오후에는 요양보호사가 오는 것으로 돌봄 일정을 짰고, 밤에는 자식들이 돌아가며 불침번을 서기로 했다. 한 달 정도 기다리다 보면 어머니가 좋아질 거라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자식들 넷이 장성해서 집을 떠난 뒤부터 부모님은 오랫동안 2인 가구로 살아왔다. 두 분은 경제활동에서 은퇴한 후에도 경제적으로나 정서적으로 자식들과 독립된 생활을 했다. 부모님에게 간간이 건강 문제가 생기기도 했지만 아버지가 아프면 어머니가 돌보았고, 어머니가 아프면 자식들이 간병을 책임졌다. 어머니가 입원하면 아버지의 밥만 챙기면 별문제 없을 줄 알았다. 그런데 이제는 그럴 수가 없었다.
치매와 우울증
우리는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어머니가 회복될 거라 믿었고 예전처럼 다시 평온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닫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어머니의 병은 허리만 아픈 것이 아니었다. 어머니는 어떤 상황에서도 웃음이 많고 밝은 분이었다. 코로나 팬데믹이 오기 1년 전에 폐암 진단을 받고 폐 절제 수술을 받을 때도 어머니는 낙관적 태도를 잃지 않고 의연하고 담담하게 대처했다. 그랬던 어머니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걱정 근심이 가득한 얼굴을 한 어머니는 얼굴을 찡그리고 땅이 꺼질 듯 한숨을 쉬었다. 밤에도 도통 잠을 못 자고, 자다가 깨서 횡설수설하고, 때로 헛것을 보기도 했다. 손도 떨었다. 평소 다니시던 병원의 신경과 의사를 만나 상담을 했다. 의사는 인지검사를 하더니 치매약을 처방했고 잠을 못 잔다고 하면 수면제와 안정제를 추가 처방했다. 아버지에 이어 어머니도 치매진단을 받은 것이다.
우울감이 깊어져 가던 어머니는 난데없이 자신이 사기꾼이고 중죄인이고 빚쟁이라고 자책하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 아무런 맥락이 없는 말인지라 도무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내가 일을 저질렀다.” “내가 한 일을 말할 수가 없어 숨겨왔다.” “내가 악마다.” “돈이 한 푼도 없다.” “모든 게 내 잘못이다.” “나 때문에 자식들이 다 잡혀가게 생겼다.” “빚쟁이들이 집에 들이닥칠 것이다.” “애들도 회사도 못 다니게 생겼다.” 어머니는 자신으로 인해 자식들에게 엄청난 불이익이 생기고야 말 거라는 말을 하면서 마치 무엇엔가 쫒기는 것처럼 불안과 두려움에 떨었다. 어머니는 근거 없는 망상에 사로잡혀 빠져나오지 못했다.
몸이 아파서 우울감이 깊어지고 치매가 온 것인지, 치매여서 우울감과 함께 몸이 아픈 것인지 인과를 알 수 없었다. 나는 어머니에게 나타난 불안과 망상이 혹시 초기 치매 상태의 아버지를 혼자서 감당하며 생긴 마음의 병은 아닐까 의심했다. 사람들과 교류하는 것을 좋아하는 어머니가 코로나 상황이 만든 사회적 고립 속에서 아버지하고만 지내다 보니 자신도 모르는 가운데 병이 든 것은 아니었을까. 부모와 일상을 함께 하지 않는 자식으로서는 두 분이 어떻게 살았는지 어머니가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속마음을 알지도 못했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내가 새삼스럽게 깨달은 부모 자식 관계의 민낯이었다. 어머니가 힘들다고 말하지 않으니 몰라서 편했고, 몰라서 자유로웠던 나는 어머니의 일상에 무관심했던 것을 뒤늦게 후회했다. 그러나 돌이킬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돌아가신 뒤 첫 제사. 어머니가 쓴 부모은중경 글씨로 만든 병풍이다
새벽에 집을 나간 어머니
어머니의 기분이 늘 흐린 것은 아니었다. 맑은 날도 있었다. 간혹 어떤 날은 다 나은 것처럼 정신이 또렷하고 에너지가 넘치기도 했다. 맑은 날과 흐린 날이 반복되는 것에 조금씩 적응해 가던 어느 날 요양 보호사로부터 어머니가 밥도 거부하고 약도 거부한다는 연락이 왔다. 급히 달려갔더니 어머니가 흥분해서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몇 시간째 그러고 있다고 했다. 침대에서 잘 일어나지도 못하던 분이 어디서 그렇게 힘이 나서 용을 쓰는지 놀랍기만 했다. “죽는 것 말고 방법이 없다.”, “베란다에서 뛰어 내려야겠다”, “목을 맬 줄을 찾아야 한다”고 했다. 그저 누군가를 겁주기 위한 위협이 아니라 정말 그렇게 하고야 말겠다는 단호함이 느껴졌다. 자살 충동을 느끼는 어머니의 모습을 내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았다.
나 역시 패닉이었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도와 달라며 119에 전화를 했다. 두 번째 119 호출이었다. 병원 응급실에서 몇 시간을 기다렸다 정신과 의사를 만났다. 입원은 불가능하다고 했다. 신경 안정제와 수면제 처방을 받아 집으로 돌아왔다. 그때 나는 어머니가 얼마나 위험한 상황에 놓여 있는지 알지 못했다. 병원에서도 자살 충동이 또 나타날 수 있다거나 보호자로서 어떤 주의를 해야 하는지에 대해 알려주지 않았다. 어머니의 흥분이 가라앉은 것에 안심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어머니는 약을 먹고 잠이 들었다. 지쳐있던 나도 어머니 옆에서 잠에 빠져들었다.
자다가 새벽에 언뜻 눈을 떴을 때 내 옆에 있어야 할 어머니가 보이지 않았다. 순간 섬뜩한 느낌이 덮쳐왔다. 집안 어디에도 어머니는 없었다. 어머니가 어제 입었던 외투와 신발이 보이지 않았다. 전날 어머니의 자살 소동에 놀라 달려왔던 여동생 내외와 아버지를 깨웠다. 시계를 보니 새벽 4시. 112에 전화를 걸어 가출 신고를 했고, 곧 경찰이 도착했다. 내가 깨기 15분 전에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파트 밖으로 나가는 어머니를 CCTV로 확인할 수 있었다.
11월 하순, 영하의 겨울 새벽이었다. 경찰들과 식구들이 흩어져서 어머니를 찾기 시작했다. 만일 어머니가 잘못되면 나는 평생 죄인이 될 것만 같았다. 어머니를 부르며 온 동네를 헤매고 다니는 사이에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그때 동생에게서 어머니를 찾았다는 연락이 왔다. 가슴을 쓸어내렸다. 어머니는 집에서 멀지 않은 산책길 외진 곳에 쓰러져 있었다. 동생이 부르는 소리에 본능적으로 신음하듯 대답하는 소리가 들려와 찾았다고 했다. 추운 날씨 탓에 어머니는 벌벌 떨고 있었다. 어머니는 죽으려는 생각으로 집을 나갔다고 했다. 그 와중에도 어머니는 “죽게 내버려 두지 왜 나를 찾았느냐”며 우리를 원망했다. 저체온증이 걱정된 나는 다시 119를 불렀다. 한 달 사이 세 번째 119 호출이었다.
이제 잠시도 어머니를 혼자 둘 수 없었다. 정신과가 있는 병원마다 전화를 돌려서 어머니의 상태에 대해 상담을 했다. 상담자들은 급성 우울증으로 인한 자살 충동으로 보이고 매우 위험한 상황이므로 입원해서 보호해야 한다고 했다. 노인 우울증이 자살 충동으로도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을 까맣게 모른 채 허리 아픈 게 나아지면 모든 게 좋아지리라 기대했던 내가 바보 같았다. 응급실에 갔을 때 무슨 수를 써서라도 어머니를 입원시켜야 했다는 자책감이 밀려왔다. 잘못된 판단으로 적절한 보호조치를 취하지 못하고 어머니를 위험에 몰아넣은 것만 같았다. 우리는 서둘러 어머니가 입원할 병원을 찾았다.
일산 아버지집에서 찾은 옛날 사진. 여동생과 둘이서 부모님을 모시고 간 효도여행
그때 딸들과 여행한다고 엄청 좋아하셨다
정신과 폐쇄병동 입원
어머니는 병원에 가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어머니가 또 죽으려고 집을 나가거나 자해를 하는 일이 생길까 봐 두려웠다. 어머니의 안전을 지키려면 정신과 입원과 보호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마음만 앞서고 정작 사태파악에는 서툰 자식들 대신 전문지식으로 무장한 의료진들이 어머니를 구원할 방법을 찾아 줄 것처럼 기대했던 것 같기도 하다. 어머니는 정신과 폐쇄병동에 입원했다. 정신과 병동에는 개방병동과 폐쇄병동이 있다는 것도 그때 처음 알았다. 환자들의 출입이 엄격하게 통제되는 폐쇄병동에는 자살 충동이 있거나 자해를 할 위험이 있는 사람들이 입원하여 집중적인 보호조치와 약물치료를 받았다. 폐쇄병동에서 어머니는 유일하게 간병인을 대동한, 나이 여든이 넘은 노인 환자였다.
어머니가 입원해 있는 동안 주치의와의 연락은 내가 맡았다. 어머니가 정확한 의사 표현을 못하는 만큼 주치의와 소통하는 보호자의 책임이 컸다. 그러나 나 역시 정확한 상황 판단을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간병인을 통해 전해 듣는 것만으로는 어머니의 상태를 잘 알 수가 없어서 내가 병동에 들어갔다. 어머니는 나아진 것이 별로 없었다. 삼 주 만에 만난 어머니는 말도 어눌해지고 단추도 제대로 끼우지 못하고 화장실에서 뒤처리도 혼자 못할 정도로 인지와 행동 능력이 나빠져 있었다. 입원하기 전에는 자신의 잘못으로 자식들에게 큰 피해가 갈지도 모른다며 불안해 했던 어머니는 이제 “세상이 다 망하게 생겼다”고 했다. 모든 잘못이 자신에게 있다고 자책하는 것도, “내가 죄인이다”는 생각도 변함이 없었다. 어떨 때는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물건의 이름도 헷갈려 하고, 병원에 있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했다. 급격히 진행되고 있는 치매가 분명했다.
컨디션이 좋을 때는 “별일 아니다”며 나를 안심시키려 하고, 아버지의 끼니를 걱정하기도 했지만 그건 아주 잠깐일 뿐이었다. 정신줄을 놓았지만 그래도 어머니는 어머니였다. 병원에 있는 동안 내가 악몽을 꾸고 잠꼬대를 하면 어머니는 내 이름을 부르며 “괜찮다”, “걱정하지 마라”며 나를 안심시키려 애썼다. 당신은 밥도 약도 안 먹겠다고 버티다가도 내가 밥을 제대로 먹는지 걱정했다. 그럴 때마다 왈칵 눈물이 났다. 젊은 사람들처럼 눈에 띄는 진전이 없어서 그랬는지 병원 쪽에서는 위험한 상태는 넘긴 것 같다며 이제 외래진료를 하면서 서서히 나아지도록 하는 것 외에 방법이 없다고 했다. 편안하고 익숙한 집에 가면 좋아질 수도 있다는 거였다. 정신과 입원 한 달이 지났는데도 무엇 하나 확실한 것이 없었다. 일주일간 어머니 옆에서 지내보니 이렇게 계속 폐쇄병동에 어머니를 두는 것도 답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산 넘어 산, 불운은 우리를 비켜가지 않았다
결국 극적인 차도가 없는 상태에서 우리는 의료진의 권유대로 퇴원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어머니의 입원 기간이 길어짐에 따라 공격적으로 변한 아버지를 잠시 강제 입원시킨 상태였기 때문에 아버지가 안정되어 돌아오기 전까지 자식들이 집에서 최선을 다해 어머니를 돌보기로 했다. 겨울이라 농한기를 맞은 여동생이 어머니를 집중적으로 케어할 수 있는 조건이라는 점, 그리고 아버지가 퇴원할 때 어머니가 집에 있는 것이 좋겠다는 것을 고려한 결정이기도 했다.
어머니의 허리 통증이 발병한 것이 10월 중순, 우울감이 뚜렷해진 것이 11월 초, 자살 충동으로 정신병동에 입원한 것이 11월 말, 퇴원을 결정한 것은 12월 말이었다. 그 두 달 반 사이에 어머니는 이전과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어머니의 몸과 마음은 겉잡을 수 없이 빠른 속도로 쇠약해지고 있었다. 문제가 생길 때마다 정형외과, 신경과, 정신과 등 해당 문제에 특화된 전문의를 찾아갔고 의사의 처방에 따랐음에도 어머니의 상태는 좋아지지 않았다. 여전히 나는 어머니가 왜 아픈지, 이전과 같은 상태로 회복될 수 있는지 없는지, 어떻게 돌보아야 잘 돌보는 것인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였다.?
그런데 퇴원한 당일 아차, 하는 사이에 어머니는 집에서 넘어졌다. 어머니가 다쳤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믿고 싶지 않았다. 울면서 그 소식을 전하는 동생은 정신이 반쯤 나가 있었다. 동생을 달래고 어머니의 상태를 확인한 다음 네 번째로 119를 불렀다. 엑스레이 결과는 고관절 골절이었다. 어머니를 모시고 간 병원은 코로나 중점병원인지라 수술 환자를 받을 수 없다고 했다. 우리는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어머니의 고관절 수술을 해줄 병원을 찾아 며칠을 헤맸다. 우리에게 닥친 불행에 놀라거나 슬퍼할 겨를이 없었다. 예고 없이 찾아온 부모 돌봄 앞에서 하나의 파도를 넘으면 또 다른 파도가 밀려오는 불운한 날들이 계속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