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대중매체 속 젠더화된 노년 재현
<꽃보다 할배>(2013)는 나영석 PD가 KBS에서 tvN으로 이적한 후 처음 선보인 프로그램이다. 이질적인 요소들을 결합해 새로운 감응을 생산하는 ‘나영석표 리얼리티 예능’의 정체성을 확립했으며, 높은 화제성과 시청률을 기록하며 한국 예능의 흐름을 재편하는 변곡점이 되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출연진인 이순재, 신구, 박근형, 백일섭은 예능 출연 경험이 거의 없는, 평균 연기 경력 50년, 평균 연령 74.5세에 달하는 한국의 대표 배우들이다. 당시 이들은 드라마나 영화에서 주로 노년 조역을 맡고 있었으나, ‘여행’이라는 설정 안에서 다시금 서사의 주인공이 되어 일상의 순간마다 각자의 개성을 자연스럽게 드러냈다. 제작진은 이러한 지점을 포착해 ‘직진순재’(이순재), ‘구아형’(신구), ‘감성근형’(박근형), ‘투덜막내’(백일섭)라는 캐릭터를 부여했고, 서로 다른 이 캐릭터들의 충돌과 시너지는 서사의 역동성을 형성했다. 그 결과, 이들은 ‘국민 배우’나 ‘인자한 할아버지’라는 단일한 이미지로 납작해지지 않은 채, 고유한 유머와 개성을 지닌 입체적 존재로 재현될 수 있었다.
반면, <꽃보다 누나>는 ‘꽃할배’의 성공을 발판 삼아 제작된 여성 버전임에도 재현 방식에서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출연자인 윤여정, 김자옥, 김희애, 이미연 역시 평균 연기 경력 36.5년, 평균 연령 54세의 베테랑 배우들이지만, 이들은 처음부터 ‘여성성’을 중심에 둔 프레임 안에서 묘사되었다. “깐깐하고 예민하지만 귀여운” 여정, “웃음도 눈물도 호기심도 많은 천상 소녀” 자옥, “한국주부 흥정엔진 발동”한 희애, 언니들을 “챙기는 싹싹한 막내” 미연1) 식의 설정은 이들을 독립된 개별자로 조명하기보다 ‘엄마-언니-막내’라는 가족주의 체계 안의 역할에 고착시킨다.
결국 “꽃같은 여배우들, 물오른 누나들로 돌아왔다”2)는 반복적 멘트에서 보여지듯, ‘꽃누나’ 이야기는 잔소리와 격려, 지켜봄 같은 모성적 돌봄을 통해 ‘허당 막내 온달’(짐꾼 이승기)을 성장시키는 ‘누나 서사’3)로 수렴된다. 결과적으로 이 프로그램은 중·노년 여성 배우들의 다층적인 삶과 개별적 욕망을 충분히 드러내는 데까지는 나아가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평균 연령 71.7세, 평균 연기 경력 51.7년에 이르는 배우들-김혜자, 고두심, 나문희, 윤여정, 박원숙, 김영옥-을 주연으로 내세우며 한국 드라마 역사상 유례없는 ‘여성 시니어 어벤져스’를 구축한 <디어 마이 프렌즈>(tvN, 2016)는 어떨까? 이 드라마는 “성소수자와 사회적 약자를 따뜻한 시선으로 그린다”는 평가와 함께 2018년 성평등문화상을 수상한 노희경 작가의 작품답게, 과연 “가부장제의 상징 질서를 넘어서는 늙은 여자의 주체화 가능성”을 탐색하는데 성공하고 있을까?4)
‘디마프’에는 기존의 관습적인 젠더 수행성을 비트는 장면들이 분명 다수 등장한다. 가부장적인 남편의 구박 속에서 평생을 견뎌온 70대 초반의 정아(나문희)는 세계여행을 시켜주겠다는 남편의 약속이 허언으로 드러나자 가출을 감행하며 이혼을 선언한다. 남편의 배신이 평생의 트라우마였던 난희(고두심)는 운영 중인 ‘대박 짬뽕집’이 쉬는 날이면 한껏 꾸미고 콜라텍에 가서 춤을 춘다. 치매를 앓는 희자(김혜자)는 “나는 혼자 할 수 있다. 나는 혼자 살 수 있다”며 자립을 시도하고, 난희의 모친 쌍분(김영옥)은 과거 남편의 외도와 가정폭력에 복수라도 하듯 병든 남편에게 매일 반성문을 쓰게 한다. 한때 난희의 절친이었던 영원(박원숙) 또한 두 번의 결혼과 이혼을 거친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로 그려진다.
그러나 이러한 균열은 이내 수습된다. 정아는 남편의 회심을 계기로 다시 가족 공동체로 복귀하며, 난희의 콜라텍 출입은 ‘부킹 없는 스트레스 해소’ 정도로 그 의미가 축소된다. 난희와 영원의 수십 년에 걸친 갈등 역시 두 사람 모두 암 환자가 되면서 ‘동병상련’의 감정 속으로 손쉽게 해소된다. 즉, 노희경표 휴먼 드라마에서 가족주의와 섹슈얼리티 규범으로부터의 일탈은 영화 <델마와 루이스>처럼 파국으로 치닫지 않는다. 대신 이해와 화해, 배려와 치유라는 플롯을 통해 서둘러 안전한 관계망 안으로 귀환한다. 드라마의 마지막 장면에서 여성들이 두 명의 남자(정아 남편, 희자 남친)까지 대동한 채 벤을 타고 여행을 떠나며 “우리 멋지게 객사하자”라고 외치는 장면이 급진적 정치 선언이라기보다 힐링에 가까운 낭만적 제스처처럼 보이는 이유다.
결국 한국 대중매체 속 노년 여성은 따뜻하고 인자한 모성을 중심으로 약간씩 변주될 뿐, ‘정상성’이라는 울타리를 결코 벗어나지 못하는 존재로 머물고 만다.
2. 악독한 할머니(‘hag witch’)의 출현
담론이란. 미셸 푸코에 따르면 단순한 말이나 텍스트가 아니다. 무엇이 말해질 수 있고 무엇이 침묵 되어야 하는지, 어떤 존재가 정상으로 인정받고 어떤 존재가 배제되는지를 규정하는 지식/권력 체계이다. 특히 특정한 몸과 삶을 ‘자연스럽고 정상적인 것’으로 반복적으로 재현하며 사회적 규범을 내면화시키는 대중매체는, 그 자체로 담론 권력이 행사되는 가장 강력한 기제다.
그간 대중매체에서 노년 여성의 재현은 크게 두 가지 상반된 경로로 이루어져 왔다. 하나는 1장에서 살펴보았듯 가족주의와 돌봄 윤리에 충실한, 즉 ‘인자한 할머니’이다. 그러나 이러한 긍정적 재현 전략 못지않게 부정적 방식의 재현 또한 강력하게 존재해 왔다. 그것이 바로 지나치게 욕망하고, 과도하게 통제하며, 가족과 공동체의 이상적 규범을 위협하는 ‘악독한 노파(hag witch)’ 형상이다.
페미니스트 문화비평가 바바라 크리드(Barbara Creed)는 공포영화에 등장하는 부정적 여성 형상을 ‘여성 괴물(the monstrous-feminine)’이라는 개념으로 포착한다5). 크리드는 이 괴물적 형상을 크게 두 범주로 분류하는데, 첫 번째 범주에는 ‘원초적 어머니(the archaic mother)’, ‘기괴한 자궁(the monstrous womb)’, ‘마녀(the witch)’, ‘뱀파이어(the vampire)’, ‘귀신들린 여자(the possessed woman)’가 포함된다. 이 유형들은 주로 재생산과 관련된 여성의 신체를 중심으로 구성되며, 특히 출산하지 않거나, 출산을 통제하거나, 생명을 파괴하는 여성의 몸을 공포의 대상으로 타자화한다. 두 번째 범주에는 ‘치명적인 여성 거세자(the deadly femme castratrice)’, ‘거세하는 어머니(the castrating mother)’, ‘바기나 덴타타(vagina dentata, 이빨 달린 질)’가 속한다6). 이들은 여성의 섹슈얼리티가 가부장적 질서를 위협하는 순간 호출되며, 여성의 욕망을 파괴적이고 위험한 것으로 표상한다.
결국 이러한 여성 괴물들은 단순한 악역이 아니라 여성의 몸과 욕망이 사회적으로 허용된 경계를 넘어설 때, 이를 혐오의 언어와 공포의 정동으로 관리하려는 문화적 장치들이다. 그중에서도 ‘노파(crone)’ 혹은 ‘노파 마녀(hag witch)’는 크리드의 논의를 확장한 후속 연구들에서 주목하는 노년 여성 괴물의 대표적 표상이다.
“근대 초기 유럽의 마녀재판 이래로, 악독한 노파 마녀(hag witch)는 노화하는 여성 신체의 괴물적 현신(現身)으로 존재해 왔다. 비생산적이며 반(反)가족적인 그녀는 ‘여성(Woman)’이라는 범주가 가진 비체적 과잉(abject excesses)을 극적으로 구체화하는데, 이는 이성애 중심의 가부장적 질서를 위협하기 때문에 반드시 통제되어야 한다.”7)
이처럼 늙고 주름진 몸, 출산하지 않는 신체, 통제되지 않는 욕망을 지닌 존재로서의 ‘hag witch’는 서구 전통 동화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헨젤과 그레텔> 속 과자집 노파는 가족 공동체 밖의 숲에서 홀로 거주하며, 자신의 욕망을 위해 아이를 취하는 식인 괴물로 묘사된다. 탐욕스러운 그 노파는 아이를 잡아먹으려다 역으로 영리한 아이들에 의해 오븐 안으로 처박혀 불태워진다. 8) <백설공주>의 왕비 역시 젊음과 아름다움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한 존재로, 독 사과로 공주를 살해하려다 실패한 뒤 빨갛게 달궈진 쇠 신발을 신고 펄쩍펄쩍 뛰다 스스로 지쳐 최후를 맞이한다. 이처럼 동화 속 ‘hag witch’는 욕망하는 노년 여성에게 가해지는 처벌을 통해 가부장적 규범의 경계를 각인시킨다.
이러한 ‘hag witch’의 형상은 한국 가족 드라마에서도 ‘악독한 시어머니’나 ‘비정한 재벌 회장’의 모습으로 자주 재현된다. 시어머니는 종종 가부장제의 피해자였던 과거를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질서를 전복하기보다 며느리를 통제하고 억압하는 수행자로 괴물화된다(드라마 <SKY 캐슬> 속 한서진(염정아)의 시모 윤여사(정애리)). 한편, 모성과 가족주의를 거부하는 재벌 여성 회장 역시 그들의 사회·역사적 맥락은 소거된 채, 모성과 가족주의 규범 너머의 비정한 존재로 괴물화된다.(드라마 <남자친구> 속 태경그룹 회장 김화진(차화연))
그러나 실비아 페데리치(Silvia Federici)는 저서 <캘리번과 마녀>를 통해 이러한 혐오 논리의 역사적 차원을 추적함으로써 ‘hag witch’에 대한 재전유의 가능성을 연다. 페데리치에 따르면 근대 초 유럽의 대규모 마녀사냥은 중세의 잔재가 아니라, 자본주의 시초 축적 단계에서 여성의 몸과 재생산 노동, 나아가 여성의 지식과 창조성을 가부장제 국가의 통제 아래 두기 위해 수행된 폭력적인 ‘정치적 프로젝트’였다.9)
이 과정에서 마녀로 낙인찍힌 이들은 주로 산파, 약초 전문가, 치료사 등 “여성의 재생산과 관련된 지식과 통제력을 보유했던 ‘현명한 여인들’”(270)이었다. 동시에 “결혼과 출산의 구속 밖에서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행사한 여성들”(273), 나아가 “말대답을 하거나, 논쟁을 하고, 욕을 하거나, 고문을 받으면서도 울부짖지 않는 반항적인 여성들”(273)이었다. 즉 마녀는 특정 행위와 관련된 호명이라기보다, 새로운 사회 질서에 순응하지 않는 여성들을 총칭하는 정치적 명명에 가까웠다.
이 과정에서 자행된 여성에 대한 폭력도 극심한 것이어서 고문의 표준 매뉴얼에 따르면 마녀들을 “발가벗긴 뒤 모든 털을 제거”하고, “악마의 표식을 찾기 위해 긴 바늘로 쑤시기”와 “처녀성을 검사하기 위한 강간”을 한 후, “사지를 찢고 쇠의자에 앉힌 뒤 의자 밑에 불을 지피”거나 “뼈를 으스러”뜨렸다고 한다. 때로는 엄마가 산 채로 화형당하는 화형대 앞에서 딸이 채찍질 당하기도 했다.(275) 따라서 이런 폭력은 단순한 처벌이 아니라 “인클로저가 농민들로부터 공유지를 박탈한것처럼” “여성들로부터 신체를 박탈”하여(272) 여성의 몸을 순치시키는 강력한 규율장치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앞에서도 말했듯이 괴물성의 핵심은 기괴함 그 자체가 아니라, 경계를 침범하고 질서를 교란하는 힘에 있다. 따라서 사회적 규범의 위반으로 낙인찍힌 ‘마녀’는 역설적으로 페미니스트들에게 강력한 영감의 원천이 되어왔다. 페미니스트들은 19세기부터 마녀를 억압에 대한 저항의 상징으로 재전유해왔으며, 특히 ‘페미니즘의 제2물결(Second Wave)’이 절정에 달했던 시기의 급진적 페미니스트들은 행동주의 단체인 WITCH (Women’s International Terrorist Conspiracy from Hell, 1968)를 결성하여 미국 전역에서 마녀집회를 이어갔다. 이들이 선언문을 통해 재구성한 마녀의 형상은 다음과 같다.
“마녀들은 언제나 자신으로 존재하기를 감히 시도한 여성들이었다: 멋지고, 용감하며, 공격적이고, 지적이며, 비순응적이고, 탐험적이며, 호기심 많고, 독립적이며, 성적으로 해방되었으며, 혁명적인.”10)
이어지는 3, 4장에서는 인자한 할매와 악독한 마녀라는 전형적인 재현 밖에서 노년의 다른 형상을 제시하고 있는 사례들을 살펴본다.
3. 경계를 위반하는 노년 여성들
‘여성 괴물’은 폐기해야 할 부정적 이미지가 아니라, 억압된 여성의 잠재성이 뒤틀린 형태로 남아 있는 자리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기존의 노년 여성 담론이 허용하지 않았던 다른 삶과 욕망, 다른 노년의 형상이 드러난다.
구병모의 <파과>(2018)11)는 한국 소설에서는 그동안 없었던 ‘60대 여성 킬러’가 등장하는 독특한 작품이다. 주인공 ‘조각(爪角)’은 겉모습은 평범하나 지난 40년간 그들 업계의 언어로 ‘방역’이라 부르는 청부살인을 “날카롭고 빈틈없으며 조금의 끈적거림이나 미적거림도 없이 ”(50) 수행해 온 프로페셔널이자 업계의 대모이다. 하지만 나이가 들고 몸이 굼뜨게 되면서 오히려 부상을 입는 등 “방역의 개인사에서 치명적인 오점”(78)을 남기고 후배들에게 퇴물 취급당한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부상을 치료해 준 강 선생과 엮이면서 “지켜야 할 것은 만들지 않는다”는 평생의 모토도 흔들린다. 하지만 이러한 균열은 자신에게 복수하려고 찾아온 젊은 킬러 ‘투우’를 자극하고 그가 강 선생 딸을 납치하게 만드는 계기가 된다. 결국 그녀는 결투 끝에 투우를 처단하고 강 선생 딸을 구출하지만, 자신이 잠시 동경했던 평범한 일상의 온기 안으로 끝내 복귀하지 않는다. 대신 그녀는 네일 아트숍을 찾아가 손톱을 손질하면서 자신의 낡아가는 육체를 쓸쓸하게 환대하며 상실을 묵묵히 살아낸다.
“그녀는 앞날에 대해 어떤 기대도 소망도 없었으며 그저 살아 있기 때문에, 오늘도 눈을 떴기 때문에 연장을 잡았다. 그것으로 자신이 존재하는 이유를 확인하지 않았고, 자신의 행동에 논거를 깔거나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더 오래 살려고 노력하지 않았고 일찍 죽기 위해 몸을 아무렇게나 던지지도 않았다.” (255)
<파과>가 건조한 문체, 밀도 있는 전개를 통해 괴물성의 자리에 있으나 괴물화되지 않고, 규범을 완성하기 위해 처벌되지도 않는 노년 여성의 새로운 존재방식을 표현했다면, 예능 <저스트 메이크업>(2025, 쿠팡플레이)은 그 가능성을 다른 방식으로 드러낸다.
사실 오랫동안 화장은 여성성을 규율하는 사회적 코르셋, 즉 젠더 권력이 몸에 각인되는 장치로 비판되어 왔다. 그러나 주디스 버틀러의 수행성 이론12) 이후 1990년대부터 화장은 규범에의 복종이 아니라, 젠더 규범을 과장하고 비틀고 실패하게 만드는 정체성 실험이자 정치적 퍼포먼스로 재의미화된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적 통치성 하에서 화장은 다시금 해방적 수행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관리하고 최적화해야 하는 주체’를 생산하는 자기계발의 기술로 포섭된다.
〈저스트 메이크업〉은 “K-뷰티를 대표하는 메이크업 아티스트들” 60명이 출연해 매회 주어진 미션을 수행하는 서바이벌 형식을 취함으로써, 표준적인 아름다움을 재현하거나 자기관리의 기술을 전파하기보다는 화장의 수행성을 전면에 드러내는 방식으로 프로그램의 특이성을 만들어냈다. 예컨대 ‘붉은 말 미션’13)에서는 모델의 얼굴을 캔버스 삼아 “붉은 피그먼트와 버건디 계열의 유화 텍스처로 말의 근육, 힘줄, 혈관의 방향성까지 세밀하게 재현했다.14)” ‘퓨처리즘 미션’에서는 인간과 로봇의 경계를 해체하는 메이크업을 통해 정체성 너머의 존재 방식을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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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권은 파이널 미션 ‘DREAMS(드림스)’였다. 김영옥(88), 반효정(83), 정혜선(83)이라는 세 명의 여배우를 주인공 삼아 그들이 여전히 ‘연기하는 존재’이고 ‘꿈꾸는 주체’임을 노년의 신체 위에 다시 써내는 미션이었다15). 김영옥은 “평생 한 번도 해보지 못했다”고 말한 우아한 노년의 얼굴로 변주되었고, 반효정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건너는 ‘영혼의 안내자, 저승사자’로 재탄생했다. 한때 액션 배우로 활약했던 정혜선은 과거 출연작인 〈홍콩에서 온 마담 장〉의 기억을 호출하며, 나이 든 여성의 몸에서 지워져 온 힘, 속도, 공격성을 다시 불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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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처럼 노년 여성의 새로운 서사를 실험하는 작업은, 일찍이 야나기 미와(Miwa Yanagi, 1967~ )에 의해 구현된 바 있다. 그녀는 현대 일본 사회에서 여성에게 부과된 정형화된 여성성을 정교하게 연출된 사진을 통해 탐구해 온 작가이다. 그녀는 자신과 또래의 젊은 일본 여성들이 “획일화된 사회에서 그저 하나의 역할극을 하고 있다16)”고 느꼈고, 그것을 초기 대표작인 〈엘리베이터 걸〉 연작(1993~1999)을 통해 표현했다. 그 작품은 똑같은 제복을 입고, 똑같은 화장을 하고, 기계적인 미소와 동작을 반복하는 ‘엘리베이터 걸’을 마치 복제된 마네킹처럼 보여줌으로써, 소비사회 속에서 규격화되고 상품화된 여성 노동자의 익명성과 비인격성을 냉정하게 드러낸다.

야나기 미와, Elevator Girls
이후 야나기는 <나의 할머니들(My Grandmothers)>(2000~2004) 프로젝트를 통해, “엘리베이터 걸의 폐쇄공포증적 세계에 대한 계획적인 반전”을 시도한다17). 이 작품들은 작가가 〈엘리베이터 걸〉의 모델을 포함해 젊은 여성들과 인터뷰를 하여, 이들이 상상하는 ‘50년 후의 자기 모습’을 사진으로 구현한, 25개의 연작 시리즈이다. 흥미로운 지점은 그 작품에서 구현된 미래-할머니들은 한결같이 가족과 혈연 관계 밖에서 자신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크게 세 개의 범주로 구분되는 작품군 중 우선 아포칼립스적 장르의 <MIE>와 <MIKA>는 대재앙 이후 마지막 장소에서 홀로 남아 폐허를 응시하고 증언한다18). 자기 안으로 완전히 침잠하는 장르도 존재한다. 숲에서 홀로 고토(일본 전통 현악기)를 연주하는 백발의 <TSUGUMI>, 책으로 가득 찬 서재에서 오로지 자신의 형형한 눈빛만으로 존재하는 <KWANYI>가 그러하다.

왼쪽부터 ‘MIE’, ‘TSUGUMI’, ‘KWANYI’ – 야나기 미와
하지만 압도적인 장르는 자신의 욕망을 거침없이 드러내는 이미지들이다. 이들은 젊은 남자와 오토바이를 타고 질주하고(YUKA), 무덤 위를 런웨이 삼아 패션쇼를 하고(ERIKO), 동성 애인과 함께 비생식적 쾌락을 즐긴다.(REGINE & YOKO) 이 과정에서 야나기 미와의 할머니 몸은 쇠락의 지표가 아니라 새로운 서사와 감각을 변주하는 수행성의 장이 된다.
“나는 이 작은 세상을 뒤로하고 떠나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나는 아주 멀리, 아주 먼 곳으로 가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정신을 가다듬고 – 친척들에게는 말 한마디 없이—LA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 결과, 글쎄, 나는 이곳—이곳의 ‘지금 여기’로 돌아오게 된 셈이다. 아무튼, 여행지에서 홀로 빈둥거리는 그 지독한 단조로움 속에 있을 때, 나는 지금의 남자친구를 만났다… 그러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는 ‘검은 황금’을 찾아 전국을 누비는 믿기지 않는 로맨스에 휩쓸리게 되었다. 그리고 짐작하겠지만, 내가 그의 반복되는 청혼을 거절하고 있음에도 그 꼬마 악마는 도무지 포기를 모른다!
일본에 두고 온 자식들과 손주들 말인가? 글쎄, 나는 이제 그들을 더 이상 보지 않는다. 내 손주들은 아마 나를 알아보지도 못할 테고, 사실 나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그리 오래전은 아닌 때에, 손주 중 한 명과 전화하며 내가 다른 우주로 휙 가버렸다고 말해주었다.” (<YUKA> 텍스트 중)

왼쪽부터 ‘YUKA’, ‘REGINE & YOKO’, ‘ERIKO’ – 야나기 미와
4. 우주 노파와 돌봄의 급진화
조애나 러스는 “20세기 미국 문학에서 여자는 탐욕의 화신/잡년이 아니면 처녀/희생자 둘 중의 하나로 거의 한정되는 것처럼 보인다”고 말한다. 이런 상태에서 여성 작가들은 “내 소설의 주인공(들)이 무엇을 하게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시작했고, “낡은 신화를 이용하는 한, 여자는 쓸 수 없다. 그러나 새로운 신화라면 어떨까?”라고 고민하면서 남성들의 놀이터였던 SF장르를 전유하기 시작했다. 바로 ‘페미니즘 SF’시대가 열린 것이다.19)
해러웨이는 저 유명한 <사이보그 선언문>(1985)20)에서 자신의 ‘사이보그’ 형상이 조애나 러스, 제임스 팁트리, 옥타비아 버틀러 등 페미니즘 SF 작가들에게서 받은 통찰에 기인한다고 밝힌다. 그는 Speculative Feminism(사변적 페미니즘), Speculative Fabulation(사변적 우화), String Figures(실뜨기) 등으로 변주되는 SF가 단순한 장르가 아니라, 존재 범주 자체를 다시 엮는 세계 짓기의 실천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사변적 서사들은 “문턱의 변환”을 통해 “남성이나 여성, 인간, 인공물, 인종 구성원, 개체적 실체, 몸의 지위를 매우 문제적인 것으로 만든다.”(79)
해러웨이가 반복적으로 인용하는 스트랜선의 문장 -“다른 관념들을 사유하기 위해 어떤 관념들을 가지고 사유하느냐가 중요하다(It matters what ideas we use to think other ideas with)”-는 바로 이 지점을 압축한다. 세계를 다시 엮는 실뜨기로서의 SF에서, 어떤 형상을 가지고 사유하는가는 곧 어떤 세계를 가능하게 하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르귄이 제시한 ‘우주 노파’21)는, 생산성과 효율성의 기준에서 쓸모없다고 취급되던 존재를 새로운 공생과 돌봄 사회의 동력으로 재사유하게 만드는 가장 급진적인 관념(idea)이다.
엘리자베스 문(Elizabeth Moon)은 르귄을 이어받으며, SF <잔류 인구>(1996)22)를 통해 ‘오필리아’라는 이름의 멋진 ‘우주 노파’를 탄생시킨다. 스토리는 이렇게 시작한다. 미래의 지구인들은 우주의 다양한 행성들을 침략하고 식민화하는 데, 심스 뱅코프 컴퍼니는 행성 3245.1에 개척민을 이주시켜 열대 목재를 벌채하여 수출하는 일을 한다. 그러나 콜로니 도시의 입지가 잘못 선정되어 기대했던 수익을 내지 못하자 콜로니의 모든 사람들을 소개(疏開)하여 다른 행성으로 이주시키려 한다.
주인공 오필리아는 40년 전에 이 행성으로 와서 남편과 함께 행성을 개척한 주역이지만 이제 남편과 딸을 잃고 아들, 며느리와 살고 있는 칠십 넘은 여성이다. 그런데 그는 소개 소식을 듣자마자 “난 떠나지 않을 거야.”(38)라고 결심한다. 하지만 늙은 여인이 아무(것)도 없는 행성에 홀로 남기로 한 결정은 그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한다. 훗날 만난 다른 지구인들도 그에게 “이동 중에 돌아가실까 봐 그런 거에요?”라고 묻거나, “남편분과 자제분들이 여기서 돌아가셔서 그러신 거에요?”(353)라고 물을 뿐, 그녀가 홀로 남은 이유가 반대로 가족으로부터 탈영토화하려는 소망 때문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모두 떠난 뒤, 오필리아는 처음으로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사는 시간을 갖는다. 벗은 몸으로 거리를 걷고, 이웃의 빈 집과 마을의 공용 냉장고를 돌보고, 남겨진 소, 양들을 살피고, 정원을 가꾸고, 발전기, 펌프 등 필요한 기계들의 작동법을 익히고, 그동안 접근이 금지된 로그파일에 접속해서 지나간 기록을 읽고 새로운 일기를 쓴다. 우주판 “나는 자연인이다”가 된 그녀는 “뼛속부터 우러나오는 깊은 행복감을 음미”(64)하며 조용한 자유를 만끽할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새 개척민들이 그 행성의 다른 지역에 또다시 콜로니를 설치하려다가 그곳에 살고 있는 자생종의 둥지를 불태우고 새끼를 몰살한다. 그 종족은 개척민을 모두 죽여 복수하고, 고향을 떠나 오필리아가 혼자 사는 마을까지 오게 된다.
하지만 큰 키에 흙색 몸, 얼룩덜룩한 회색 줄무늬를 지니고 새처럼 돌출된 얼굴을 한 외계인들은(135), 오필리아가 알고 있던 어떤 곤충류·어류·포유류·조류·파충류와도 닮지 않은 존재들이었다(198). 더 나아가 그들은 ‘둥지’를 가장 신성한 가치로 여기며, 유목하는 사냥 무리와 육아를 위한 정착 무리가 공존하는 사회를 이루고 있었다. ‘낯선 자들에게 노래하는 가수’, ‘전쟁 지휘자’, ‘길잡이’, ‘딱-카우-키이어’와 같은 역할들이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오른손과 왼손으로 북을 쳐 여론을 확인하며, 불복종 대신 반대자들은 같은 리듬을 공유하는 이들과 함께 떠나는 방식으로 갈등을 조정하는 이 사회구성체를, 오필리아는 여태껏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다.(365) 이렇게 생물학적으로도 사회역사적으로도 비대칭적이고 이질적인 존재들은 어떻게 관계를 맺을 수 있을까?
먼저 손을 내민 쪽은 오필리아다. 낯선 괴생물체가 두렵고 반갑지 않았지만 폭풍이 오는 밖에 세워둘 수는 없어 문을 열고 그들을 들인다. 그리고 좌충우돌, 오락가락, 원치 않은 동거가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그들이 연주하는, “선율을 이루는 홀리는 듯한, 숨이 새는 듯한 소리, 그가 아는 어떤 악기소리와도 다른 소리, 그리고 그의 귓속을 간지럽히는 또 다른 소리”(164)를 듣고 그만 울컥,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164)
이러한 비언어적 감응을 통해 오필리아와 외계 자생종은 점차 촉수적 관계를 형성한다. 해러웨이가 말하는 ‘촉수성(tentacularity)’은 미리 정해진 정체성이나 목적에 따라 맺어지는 관계가 아니라, 더듬고 시도하며 얽히는 과정 속에서 생겨나는 관계 양식을 가리킨다. 촉수 있는 존재들은 부착과 분리, 매듭과 절단을 반복하며 함께 살아갈 경로를 임시적으로 엮어 나가고, 그 결과는 언제나 열려 있다.
“촉수 있는 것들이 부착하고 분리한다. 절단하고 매듭을 만든다. 차이를 만든다. 그것들은 경로와 결과를 엮어내지만 결정론은 아니다… sf는 이야기하기이고, 사실을 말하기이다. 지나간 것이든 지금 여기 있는 것이든 아직 오지 않은 것이든, 가능한 세계들과 가능한 시간들, 물질-기호론적 세계들의 패턴 만들기이다.” (해러웨이, <트러블과 함께하기>,p 59)
통약불가능한 타자들 사이에 얽힘이 발생하자 이들은 서로에게 ‘소중한 타자’, ‘반려종’23)이 되고, 결국 오필리아는 외계 종족의 아이를 그들과 함께 받아내며 그들의 ‘둥지수호자(nest guardian)’가 된다. 하지만 아이를 맡아서 키워내는 돌봄의 역할은 더 이상 가족적인 것으로 영토화되지 않는다. 오필리아 자체가 이제는 더 이상 그 누구의 “어머니도, 할머니도 되고 싶지 않았”고, 대신 “색칠하고 조각하고, 늙고 갈라진 목소리로 낯선 괴동물들과 더 낯선 그들의 음악에 맞춰 노래하는 오필리아가 되고 싶었”기(349)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집단출산/집단양육의 문화를 가진 그 종족 사회에서 어머니는 ‘둥지수호자’가 될 수 없다. “더는 둥지를 틀지 않는, 물정을 아는 고령자들만 ‘둥지수호자’가 된다.”(369) 즉 오필리아가 그곳에서 만든 것은 유사 자녀가 아니라 ‘기이한 친족’24)이었다.
이후 지구에서 자생종을 연구하기 위해 탐사단이 파견되고 기술 전수를 막기 위해 오필리아를 지구로 데려가려 하지만, 오필리아는 종족의 외교관이 되어 탐사단을 설득, 자신과 종족을 보호하고 지구인과 종족 사이의 평화 협상을 맺게 한다. 이후 지구에서 차별받던 여성 노인들도 대거 이주하여 오필리아와 함께 이 다종공동체 행성의 둥지수호자가 된다. 오필리아는 “한 때 계획대로 혼자 죽지는 못했지만, 웃음 지으며 죽었다.”(414)
5. 재현 이후의 윤리 ― 영화 〈시〉와 응답 가능성
앞선 장들에서 탐색한 바와 같이, 노년 여성의 재현은 ‘인자한 할매’와 ‘악독한 마녀’라는 규범적 이분법을 넘어 사변적 SF 서사까지 확장되며 급진적 가능성을 열어왔다. 그러나 이러한 재현의 급진화는 타자의 취약성에 직면할 때, 단순한 형상 변주를 넘어 윤리적 응답의 문제를 제기한다.
이창동의 영화 〈시〉(2010)는 이 질문을 가장 아프고도 정직하게 밀어붙이는 텍스트다. 영화의 주인공 미자는 경기도의 한 소도시에서 기초생활수급비와 간병 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하며 중학생 손자를 홀로 키우는 노년 여성이다. 그렇지만 “그녀는 꽃장식 모자부터 화사한 의상까지 치장하는 것을 좋아하고 호기심도 많은 엉뚱한 캐릭터다.” 그녀는 평생의 소원인 시를 쓰기 위해 문화센터 시 창작 강의를 수강하지만, 좀처럼 시상을 잡지 못해 괴로워한다. 동시에 그녀는 알츠하이머의 초기 증상을 겪으며 혼란스러워한다.
어느 날 그녀는 손자가 동급생 소녀를 집단 성폭행하여 죽음으로 몰아넣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된다. 가해자 부모들은 돈으로 사건을 은폐하려 합의금을 각출하기로 하고, 미자에게도 거액의 돈이 할당된다. 당장 돈을 마련할 길이 없던 그녀는 자신이 간병하던 강 노인의 집을 찾아가고, 그가 돈을 주는 대가로 요구한 성적 관계를 받아들인다.
합의금을 마련하고 건네지만 미자는 가부장적 혈연주의가 요구하는 ‘은폐’ 대신 손자를 직접 수사 기관에 넘기는 ‘결단’을 내린다. 그리고 본인도 피해 소녀의 넋을 기리는 시 ‘아녜스의 노래’를 남긴 뒤 사라진다. 영화는 미자가 자살한 강가에서 소녀의 목소리와 미자의 목소리가 겹쳐 시를 낭독하는 장면으로 끝이 난다.
이 서사에서 중요한 것은 미자가 조손가족, 가난, 알츠하이머에 동시에 노출된 취약한 인물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주디스 버틀러에 따르면 취약성(vulnerability)은 사회적 약자를 가리키는 특징이 아니라,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상처 입을 수밖에 없는 모든 존재의 근본적인 노출 상태를 가리킨다. 따라서 “‘취약성’은 어떤 주관적 상태로 간주되기보다는 우리가 함께 살아가고 있는 상호의존적 삶의 속성으로 간주되어야 한다.”25)
자아의 정체성을 연속적으로 붕괴시키는 미자의 알츠하이머는, 역설적으로 우리의 삶이 서로에게 묶여 있으며, 그것은 또한 더 큰 구조와 제도에 묶여있다는 것을, 우리의 취약성은 그런 차원에서 노출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이 자리에서 미자의 취약성은 타자의 취약성과 고통을 응시하는 곳으로 나아가고, 타자의 고통에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질문으로 전환된다. 결국 그녀는 손자의 죄를 삭제하지도, 피해자의 고통을 대리하지도 않은 채 대신 한때는 아름다운 것만을 적어보려던 시라는 형식을 통해, 이제는 말할 수 없게 된 타자의 목소리를 받아 적는다.
영화 <시>에서의 노년 여성 재현은 이해를 제공하는 장치가 아니라, 외면할 수 없는 잔여를 남기는 형식으로 작동함으로써 재현의 정치학을 다른 방향으로 밀어붙인다. 미자가 남긴 것이 정의의 회복도, 화해의 완결도 아니라면, 그녀가 사라진 후에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폭력의 흔적이 도처에 남아있다면, 우리는 영화에 어떻게 응답해야 하는 것일까?
따라서 노년 여성의 재현 정치학이 나아가야 할 최종적인 지점은 규범을 위반하는 또 다른 심미적 규범을 세우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주름진 피부와 잃어가는 언어라는 생물학적 쇠락을 우리 공동체의 공통된 조건이자 상호 의존성의 근거로 수용하는 일이다. 미자가 보여준 응답은 노년의 신체가 더 이상 사적인 영역에 머물지 않고, 타자의 생존과 존엄을 위해 자신을 재구성하는 정치적 실천의 장이 될 수 있음을 증명한다.
1)<꽃보다 누나> 1회의 자막들
2)<꽃보다 누나>는 <꽃보다 할배>와 달리 한 시즌만 제작되었고, 2013년 11월부터 2014년 1월까지 총 8부작으로 방영되었는데, “꽃같은 여배우들, 물오른 누나들로 돌아왔다. ‘느낌 아니까’ 매력만점 누나들의 핑크빛 생기넘치는 여행”같은 오프닝 멘트가 매회차마다 반복되었다.
3)사실 ‘누나’는 단순한 호칭이 아니다. ‘누나’, ‘누이’, ‘누님’은 근대 이후 한국의 동요, 동시, 시 등에서 반복적으로 출현하는 언표인데, 예를 들어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라는 김소월의 동시(<엄마야 누나야>, 1922), “퐁당퐁당 돌을 던지자/ 누나 몰래 돌을 던지자 /냇물아 퍼져라 널리 널리 퍼져라 /건너편에 앉아서 나물을 씻는/우리누나 손등을 간질여 주어라” 라는 홍난파의 동요 (<퐁당퐁당>, 1927), “네가 지금 간다면, 어디를 간단 말이냐?../너, 내 사랑하는 오직 하나뿐인 누이동생 순이,”라는 임화의 시 (<네 거리의 순이>, 1929)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라는 서정주의 시 (<국화 옆에서>, 1955) 등이 대표적이다. 그런데 이런 동시, 동요, 시에서 ‘누나’는 재생산노동의 담지자 + 되찾아야 하는 조국/모성의 대리인 + 연인으로서의 섹슈얼리티의 대상 등을 복합적으로 부여받으면서 식민지 남성의 타자로 현현된다. 따라서 ‘누나’ 기표는 그 자체로 충분히 분석되어야 하는데, 여기서는 더 이상의 논의는 하지 않는다.
4)김은하, “늙은 여자의 시간과 주체화: 노희경의 <디어 마이 프렌즈>” (2016, <여/성이론> 통권 제35호)
5)바바라 크리드, <여성괴물> (손희정 역, 도서출판 여이연, 2008)
6)크리드는 ‘원초적 어머니(the archaic mother)’와 관련하여 영화 <에일리언>을, ‘기괴한 자궁(the monstrous womb)’과 관련하여 <브루드>를, ‘마녀(the witch)’와 관련하여 <캐리>를 , ‘뱀파이어(the vampire)’와 관련하여 <악마의 키스>를, ‘귀신들린 여자(the possessed woman)’와 관련하여 <엑소시스트>를 분석한다. 또한 ‘치명적인 여성 거세자(the deadly femme castratrice)’와 관련해서는 <네 무덤에 침을 뱉어라>와 <자매들>을, ‘거세하는 어머니(the castrating mother)’와 관련해서는 <사이코>를 분석한다.
7)Amelia Crowther, “Hag Witches and Women’s Liberation: Negotiations of Feminist Excess in the U.S. Horror Film, 1968-1972” (2002, <Film & History (Vol. 32, No. 1> )
8)노파가 아이들을 잡아먹기 위해 납치하고 어머니가 이 아이들을 구한다는 모티프의 동화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매우 많은데, 어린이 영어동화 읽기의 단골 텍스트 중 하나인 <Heckedy Peg> (오드리 우드, 1992)도 그 중 하나다. 스토리는 다음과 같다. 월화수목금토일의 각기 다른 이름을 가진 남매들이 엄마와 함께 시골집에서 살아가는데, 엄마가 시장에 간 사이 외다리 노파 Heckedy Peg가 집에 숨어들어 남매들을 음식으로 변하게 만들고 자루에 담아 숲으로 데려가서 남매들을 음식으로 바꾸는데, 현명한 엄마가 남매들을 다시 찾고, 마녀는 죽는다. <우리 시대의 마녀> (임옥희 등, 여이연, 2023)에서 김미연은 이 이야기를 페데리치의 문맥에서 “동화 속에서 아이를 잡아먹는 마녀의 모습은 가난한 농민 여성에 대한 남성 지배계급의 공포가 투사된, 왜곡된 이미지”라고 말하면서 “일곱 명의 아이는 ‘국부’를 상징하고, 이들을 잡아먹으려는 마녀는 ‘국부’의 위협이 되는 ‘나이 든’ 여성이 된다”고 말한다.
9)실비아 페데리치, <캘리번과 마녀> (황성원, 김민철 역, 갈무리, 2011)
10)Amelia Crowther, 앞의 글
11)저자에 따르면 파과의 한자는 破果, 破瓜로도 쓸 수 있다고 한다. 따라서 ,,,,, 또한 이 소설은 민규동 감독에 의해 동명의 이름으로 영화화되어 (인터내셜널 제목은 “The Old Woman with the Knife”) 2025년 4월에 개봉되었다. 조각에는 이해영, 투우는 김성철, 강선생은 연우진이 맡았다.
12)버틀러는 젠더를 본질이 아니라 반복적 수행의 효과로 이해하며, 드랙 퍼포먼스는 그 반복을 패러디함으로써 젠더 규범의 자연성과 필연성을 흔드는 정치적 실천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13)‘붉은 말 미션’, ‘퓨처리즘 미션’ 등은 <저스트 메이크업> 2라운드 1대1 데스매치 미션의 키워드 들이다. 여기서 붉은 말은 2026년 병오년의 ‘붉은 말’이다.
14)https://news.coupang.com/archives/58113/
15)이 세명의 가장 최근 출연작과 역할은 다음과 같다. 김영옥-<태풍상사>(2025)의 ‘염분이’(“하나뿐인 손자 범이를 보물단지처럼” 아끼는 치매노인) / 반효정- <화려한 날들>(2025)의 ‘조옥례’ (아들의 집에 얹혀 살면서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는 자책”에 시달리는 노인) / 정혜선 -<피도 눈물도 없이>(2024)의 ‘김영애’ (“YJ그룹의 최대주주이자 여전히 경영권을 가진 실셰, ”피도 눈물도 없는 살벌악독의 결정체“)
16)https://artscape.jp/artscape/eng/focus/0904_01.html
17)https://www.artnet.com/magazineus/reviews/davis/davis7-19-07.asp
18)“내 생애의 초기 수십 년 동안 만났던 모든 사람들—나의 부모님, 형제와 자매, 남편, 그리고 친구들-그들 모두는 세상의 다른 대부분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최후를 맞이했다. 이 거대한 재앙이 휩쓸고 간 뒤의 세년들 동안, 세상은 완전히 변해버렸다…이제, 모든 인간은 삶의 사명을 하나씩 품고 있다. 나에게 주어진 책무는, 이 거대한 첨탑 위에서 미지의 세계를 응시하며 우리 앞에 닥칠 난관을 예견하는 것이다…이것은 죽음을 애도하는 일도 아니며,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축복하는 일도 아니다. 사실, 그것은 우리가 추구할 수 있는 성질의 것조차 아니다. 다만, 이것은 우리에게 남은 얼마 되지 않는 음식을 나누는 일에 관한 것이며, 만약 우리가 주어진 역할을 수행할 수 없게 된다면, 종족으로서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일에 관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살아남는다. 이곳은 완벽한 조화와 평등이 깃든 장소다.” (<MIE> 텍스트, http://www.yanagimiwa.net/My/e/project/01.html)
19)조애나 러스, <SF는 어떻게 여자들의 놀이터가 되었나> (1995) / 나현영 옮김, 포도밭츨판사, 2020
20)도나 해러웨이, ‘사이보그 선언문’, <해러웨이 선언문>(2016) / 황희선 옮김, 책세상, 2019
21)“알타이르 네 번째 행성에 사는 우호적인 주민들이 우주선을 타고 찾아와서, 정중한 선장이 이렇게 말한다고 치자. ‘우리에게 승객을 한 명 태울 자리가 있습니다. 알타이르까지 돌아가는 긴 여행 동안 느긋하게 대화를 나누며 모범이 될 만한 사람에게서 당신네 종족의 본질을 배울 수 있도록, 지구인을 한 사람 내주시겠습니까?’… 나라면 지역 슈퍼마켓이나 마을 장터에 가서, 싸구려 장신구 코너 아니면 빈량야자 칸에 있는 60세 넘은 여성을 하나 고르겠다….이 여성은 평생 중요하지 않은 사소한 일들, 이를테면 요리, 청소, 육아를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자잘한 장식품이나 재밋거리를 팔면서 열심히 일했다…. 그리고 어쨌든 이 여성은 아둔하지 않다. 이 여성은 분별, 재치, 인내심, 경험에 의한 통찰을 충분히 지니고 있으며, 알타이르인들은 이를 지혜로 여길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으리라….하지만 우리보다 현명하다면, 알타이르인들은 우리가 단순히 추측과 희망만으로 인도적이라고 주장하는 내면의 본성을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어느 쪽이든 간에 그들은 호기심 강하고 친절하니, 우리가 줄 수 있는 최선을 내주자” (르 귄, ‘우주 노파’(1976), <세상끝에서 춤추다>(1989) / 이수현 옮김, 황금가지, 2021
22)엘리자베스 문, <잔류 인구>(1996) (강선재 옮김, 푸른 숲, 2021)
23)“창발된 실천… 서로 다르게 물려받은 역사, 그리고 불가능에 가깝지만, 절대적으로 필요한 공동의 미래 모두를 책임질 수 있는, 부조화스러운 행위 주체들과 삶의 방식을 적당히 꿰맞추는 작업, 취약하지만 기초적인 작업 말이다. 소중한 타자성은 내게 이런 뜻이다” (해러웨이, <반려종 선언>) “<반려종> 선언은 무수한 실제 사건들이 이룬 포획의 합생에 의해 가능해진, 친족관계에 대한 주장이 다. 반려종은 우연적 기초 위에 놓여있다” (해러웨이, <반려종 선언>)
24)해러웨이는 이것을 “Make Kins, not Babies”라는 슬로건으로 정식화한다.
25)주디스 버틀러, <비폭력의 힘>(2020), p6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