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은 피할 수 없다. 언젠가 죽을 수밖에 없는 삶의 유한성을 알면서도 사람들은 가능한 죽음을 늦추고 싶어 한다. 우리는 죽음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다. 심장이 멈추고 체온이 식는다는 것은 알지만 죽음을 맞이하는 그 순간, 그리고 그 이후에 우리가 무엇을 경험할지 전혀 알지 못한다. 인간은 그 알 수 없는 죽음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을 완화하기 위해 종교를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기독교와 이슬람교는 죽음 이후에 가게 될 천국을 약속하고 사망의 흑암을 이기는 부활과 영생을 약속한다. 불교와 힌두교에는 윤회와 해탈이 있다. 윤회는 이생의 죽음이 끝이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거듭 새로운 생을 받는 것이자, 반복해서 늙고 병들고 죽는 고통이 되돌아오는 것이기도 하다. 행복이 보장된 천상의 삶1)도 윤회적 세계관에서는 고통스런 윤회의 일부일 뿐이다. 불교와 힌두교의 구원이 천국이 아니라 윤회적 생존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해탈인 이유이다.
기독교와 이슬람교에서 죽음은 몸의 죽음이지 영혼의 죽음은 아니다. 영혼은 몸의 죽음 이후의 삶을 살며 천국에도 가고 지옥에도 간다. 마찬가지로 힌두교에도 윤회하는 내내 자신만의 고유한 본질을 갖는 아트만이 있다. 기독교와 힌두교는 살아서나 죽어서나 변함없는 ‘나’를 보증하는 영혼과 아트만의 존재를 전제한다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다. 이처럼 변치 않는 고정된 실체인 자아가 죽음 이후에도 존재한다는 주장을 불교는 상주론(常住論)이라고 한다. 상주론의 반대편에는 단멸론(斷滅論)이 있다. 단멸론은 죽음을 삶의 중단이자 소멸로, 존재에서 비존재로의 돌이킬 수 없는 비가역적 사건이라고 본다. 죽으면 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모두 단멸론자다.
붓다는 베다(Veda)2)교가 지배하던 고대 인도 사상계의 주류적 주장과는 전혀 다른 입장을 설파한 독창적인 사상가였다. 당시 인도에는 ‘윤회하는 것은 바로 아트만’이라고 주장하는 주류적 베다 전통의 『우파니샤드』 3)사상가들과 비베다적 입장에서 단멸론을 주장한 신생 비주류 사문 전통4)이 대립하고 있었다. 비베다적 사문전통에 속하는 불교는 상주론과 단멸론을 모두 비판했다. 붓다의 입장에서 상주론이 잘못된 이유는 윤회를 끌고 가는 항상하는 자아가 없기 때문이며, 단멸론이 잘못된 이유는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붓다가 불러일으킨 고대 인도에서의 윤회에 대한 논쟁을 통해 불교의 윤회론이 무엇을 주장했는지, 또 오늘날 붓다의 윤회론이 어떻게 수용될 수 있는지 살펴보려 한다. 그 과정을 통해 ‘윤회는 있다’는 제목의 의미가 명료해질 것이다.
윤회하는 주체가 있는가?
붓다의 제자 중에 싸띠라는 비구5)가 있었다. 싸띠는 붓다가 “윤회하는 것은 의식viññāṇa”이라고 가르친다고 생각했다. 동료 비구들이 그렇지 않다고 해도 싸띠는 자신의 생각이 맞다고 고집했다. 붓다는 싸띠에게 그가 생각하는 ‘윤회하는 의식’이 대체 무엇인지 물었다. 싸띠는 의식이란 “말하고 느끼고 여기저기에서 선행과 악행의 결과를 체험하는 것”이라고 답했다. 싸띠가 말한 의식은 붓다가 대결했던 상주론자들의 아트만과 다르지 않았다.
붓다는 말했다. “이 어리석은 자여! 의식이란 몸과 마음이 대상에 접촉한다는 조건이 있을 때만 생겨나는 것이라고, 내가 그렇게 자주 말하지 않았던가!” 붓다는 인간 존재란 몸, 느낌, 생각, 의지, 의식, 이 다섯의 집합체, 오온6)이라고 설했다. 그런데 몸, 느낌, 생각, 의지, 의식 어느 것이나 모두 대상과 접촉한다는 조건이 있을 때 발생하고 소멸한다. 이렇게 조건에 따라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은 무상하다. 무상한 것이 자아일 수는 없는 법. 계속해서 변하는 무상한 의식은 ‘말하고 느끼면서 선업과 악업의 과보를 받는’ 윤회의 주체가 아니다. 윤회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더라도, ‘누가 윤회하는가?’ 라고 물어서는 안 된다. 윤회의 주체인 ‘나’가 없기 때문이다. 대신 ‘무엇을 조건으로 윤회가 계속 되는가?’라고 물어야 한다.
윤회는 있지만 윤회하는 주체는 없다
『밀린다왕문경』(기원전1세기~기원후1세기경)은 붓다 이후에 불교에서 정형화된 윤회에 대한 설명 방식을 잘 보여준다. 밀린다왕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동방 원정 이후 서북 인도에 세워졌던 박트리아왕국의 통치자, 그리스계 왕 메난드로스 1세다. 헬레니즘 문화의 대변자인 밀린다왕이 묻고 불교 비구 나가세나가 답하는 장면은 흥미롭다. 물론 이 대화는 문학적 허구일 가능성이 높다.
밀린다왕은 나가세나 비구에게 “태어난 자, 나가세나는 동일한 사람으로 남아 있는가, 아니면 다른 사람이 되는가?”라고 묻는다. 윤회하여 태어난 존재가 이전과 같은 사람인가, 아닌가 하는 질문이다. 나가세나는 “같은 사람도 아니고 다른 사람도 아니다”라고 답한다. 나가세나는 그것을 소에서 짜낸 우유가 엉겨 요구르트가 되고, 버터가 되고, 더 정제된 버터기름으로 변해가는 과정에 비유했다. 우유의 변화를 통해 형태는 바뀌지만 연속성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비유이다. 우유와 요구르트는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초저녁에 타오르기 시작한 등불과 한밤중의 등불은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다. 자아없는 윤회는 이러한 비유로써 해명되었다.
밀린다왕은 “다시 태어나는 것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 나가세나는 그것은 이전의 자아와 동일한 자아가 아니라 몸, 느낌, 생각, 의지, 의식의 집합체(오온)라고 답한다. 새로 태어난 존재는 이전의 존재와 같은 것이 아니지만, 이전의 존재와 전혀 다른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업과 과보의 연속성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나가세나는 추위를 피하기 위해 피운 모닥불이 번져서 들판을 태우는 불로 변한 경우를 예로 들었다. 모닥불과 들불이 다르기 때문에 불을 피운 사람에게 죄를 물을 수 없다는 것이 말이 안 되는 것처럼 이전의 몸으로 악업을 지었다면 이후의 몸도 그 악업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고 답했다.
『밀린다왕문경』은 비유로 윤회의 실재성을 납득시키려 했고, 이 경전에서 밀린다왕은 납득한 듯이 보인다. 물론 비유적 논증만 있는 것은 아니다. 붓다는 자신의 전생과 다른 존재들의 내생을 보는 숙명통과 천안통을 얻었다. 만일 붓다의 말이 진실하다고 생각한다면, 이것은 붓다의 경험에 기초한 논증이 된다. 이 뒤로도 여러 불교사상가들에 의한 합리적 논증이 시도되었다.7)
단멸론에 대한 붓다의 응답
지금까지 상주론이 제기하는 윤회의 주체 문제를 검토했다면 단멸론자에 대한 응답도 살펴보자. 붓다 당시 단멸론자들은 마치 오늘날의 단멸론자들과 마찬가지로 윤회를 부정하고 선업과 악업의 과보를 부정했다. 아래는 유물론자로 명성을 떨쳤던 아지따 께사깜발리8)의 주장이다.
선하거나 악한 행위의 결실이나 과보는 없다. 이 세상도 저 세상도 없다. … 이 세상에 완전하게 실천하고, 이 세상과 저 세상을 천명하며, 자신의 초자연적 지혜로 깨달은 금욕주의자나 바라문은 없다. 인간은 네 가지 요소로 이루어졌고 죽으면 요소들은 본래의 것으로 돌아간다. … 몸이 부서질 때, 어리석은 자와 지혜로운 자 모두 파괴되고 무너져 사후에 존재하지 않는다. (『디가니까야』 「사문과경」)
붓다의 비판을 보자. “만약 저 세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악행을 저지르는 사람들은 몸이 파괴된 뒤에 고통을 겪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저 세상이 있다면 이 사람은 양쪽에서 불운에 떨어진다, 지금 여기에서 현자들에게 비난 받고, 죽은 뒤에는 괴로운 곳에 태어날 것이다. 선행을 행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만일 저 세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는 지금 여기서 칭찬받을 것이고, 저 세상이 있다면 좋은 곳에 태어날 것이니 양쪽에서 행운을 받을 것이다.” 9)붓다는 저 세상이 있다고 생각하는 쪽이 없다고 생각하는 편보다 더 이익이 많다고 설득한다. 윤회가 있다고 믿는 것이 더 윤리적인 삶을 살게 한다는 공리주의적인 설득이다.
붓다는 무아와 윤회의 관계를 잘 이해한 사람은 더 이상 “우리는 과거에 어떤 존재였을까, 현재의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미래에 어떤 존재일까”와 같은 어리석은 질문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몸, 느낌, 생각, 의지, 의식의 각각도 다른 것과의 관계에 의지하여 생겨나는 것이고 이 다섯이 모여 만들어지는 집합체 역시 조건에 따라 시시각각 변화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자아라고 생각하는 것은 이 다섯이 만드는 매듭과 같다. 이처럼 자아가 고정된 것이 아니라 무상한 흐름이라는 것을 안다면 연속되는 과거의 나, 현재의 나, 미래의 나라는 관념은 망상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것을 어제의 나, 오늘의 나, 내일의 나라 해도 마찬가지다.
윤회에 대한 현대의 네 가지 입장
지금까지 고대 인도의 상주론과 단멸론을 비판하는 전통적인 불교의 입장을 살펴보았다. 무아인데 윤회한다는 주장은 현대인들을 설득할 수 있을까? 불교의 무상, 무아, 공의 가르침은 바렐라와 에반 톰슨10) 같은 인지과학자들도 적극적으로 수용한다. 진화 심리학자 로버트 라이트11), 뇌 과학자 샘 해리스12) 외에도 다수의 과학자들이 있다. 그러나 이들 서양 저자들의 책에 윤회에 대한 이야기가 전혀 언급되지 않은 경우도 많다. 과거에는 무엇이 윤회하는가가 쟁점이었다면, 오늘날은 윤회한다는 가정 그 자체가 오히려 의문에 붙여지는 것으로 양상이 변했음을 알 수 있다.
달라이라마는 만일 불교교리 중에 비과학적인 것이 있다면 폐기될 수 있다는 급진적 주장을 편다. 그러나 윤회는 과학으로 증명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에 관한 한 “증거의 부재가 부재의 증거가 될 수 없다는 점에서 윤회론은 반박될 수 없다”고도 말한다13). 현대 물리학이나 우주론과 불교의 접점을 찾거나 고차원의 명상경험, 임사체험, 전생보고 등의 사례조사로 윤회의 실재성을 증명하려는 시도도 계속되고 있다.
로저 잭슨은 불교의 업-윤회 우주론에 대해 포괄적으로 검토한 책 『윤회』에서 현대 불교도들의 입장을 문자주의자, 신전통주의자, 근대주의자, 세속주의자의 네 가지로 구분한다. 첫째, 문자주의자는 전통적 방식으로 훈련된 남방 상좌부 승려와 티벳 승려를 포함하여 업과 윤회 우주론을 의심 없이 문자 그대로 수용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윤회는 있다는 전통적 믿음을 고수한다. 이들의 주장의 근거는 불교 경전과 자신의 명상체험인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경전의 자구가 사실이라고 믿지 않는 사람을 설득하기는 어렵다.
둘째, 신전통주의자는 윤회의 진실성을 믿지만 양자물리학, 뇌과학, 진화론 등의 현대적 용어로 전통적 우주론과 형이상학을 재구성하려 한다. 셋째, 근대주의자는 윤회의 실재성을 확신하지 못한다. 이들은 업과 윤회를 주로 심리학적이고 상징적이고 실존적이고 윤리적인 관점에서 재구성하려는 경향이 있다14). 넷째, 세속주의자는 윤회를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들은 현대철학이나 심리학과 불교를 연결할 때 윤회를 대체로 무시하는 편이다. 불교의 가르침과 상관없이 불교의 명상을 실용적으로 활용하는 많은 현대인들이 취하는 입장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들 사이의 경계가 그렇게 뚜렷한 것도 아니다. 가령 달라이라마의 경우도 문자주의를 신전통주의나 근대주의적 방식으로 해석하기도 하고, 때로는 세속주의에 가까운 주장을 하기도 하는 복합적 모습을 보인다. 대다수 사람들도 윤회에 대한 네 가지 접근방식 중 하나 또는 몇 가지 조합을 취한다. 로저 잭슨은 자신은 근대주의자로서 비록 윤회와 업이 실재라는 믿음은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윤회와 업이 사실인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한다고 말한다. 마치 윤회가 사실인 것처럼 –그는 이것을 as if 불가지론이라고 한다- 행동할 때 현재의 즐거움과 괴로움에 덜 집착하고 삶과 죽음의 문제에 대해 더 담대하게 직면하고, 자신과 남을 행복하게 하는 삶에 헌신할 수 있게 된다고 한다. 나 역시 윤회의 실재성에 대해 회의하면서도 윤회를 빼고 붓다의 가르침을 실천하기란 불가능하다고 생각해 왔다.
윤회는 있다
그래서 나는 ‘윤회하는 주체는 없지만 윤회는 있다’라고 말한다. 윤회가 실재하는 것으로 증명되어야만 우리가 윤회의 우주론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비유하자면 빅뱅의 우주론을 받아들이는 것이 그 이론이 전혀 오류가 없다는 것을 철저히 검증한 후가 아닌 것과 같다. 우리에게 죽음이란 무엇일까? 죽음이 존재에서 비존재로의 불가역적 변화라는 단멸론의 주장도 문제가 많다. 완전한 비존재라는 것은 생각할 수 있을 뿐 사유할 수는 없다. 비존재는 단지 우리의 머리 속에서 존재의 부정으로서만 유효하다. 다른 한편 우리가 몸으로 한 행위, 입으로 한 말, 마음으로 생각한 것들은 어딘가에 흔적을 남기고 우주의 일부로 우주와 함께 진화하며 지속한다.
마지막으로 윤회에 대한 다섯 번째의 입장이 있다. 그것은 ‘윤회가 있다, 없다’에 걸려드는 것이 아니라 당대의 주류와 비주류 모두의 밖에 서서 대안적 관점을 제시했던 붓다의 급진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그것을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불교를 과학, 심리학, 현대철학과 일치시키려 하지 마시오. 그것을 정당화하려 하지 마시오. 오히려 근대성과 그 현실 안주에 대한 신랄한 비판으로 이해하시오.”15) 이러한 탐구와 실천을 통해 현대의 지배적인 단멸론적 죽음관과 전혀 다른 관점에 서서 평온하게 죽음을 맞이하고, 늙고 병들어 죽음에 가까워져 가는 가족과 이웃을 돌보고, 종을 넘어 소멸해가는 모든 존재의 고통에 동참하고, 우리 시대에 만연한 죽음을 애도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질문은 계속된다.
*이미지 출처 : 불교신문사
1) 불교는 6도 윤회 혹은 5도 윤회를 이야기한다. 지옥, 아귀, 축생, 인간, (아수라), 천상이 그것이다. 선업을 쌓은 사람은 천상계에 태어난다. 그러나 천상계에서의 그동안의 선업의 성숙이 끝나고 수명이 다하면 다시 지옥이나 축생으로 갈 수 있다. 천상계는 너무 행복해서 수행하기 어렵다. 그래서 즐거움과 괴로움이 있는 인간계에 태어나는 것이 수행에는 최적이다.
2)고대인도에 산출된 힌두교의 경전을 베다라고 한다. <리그베다>, <사마베다>, <야주르베다>, <아타르바베다>가 있다. 4베다 이후에 산출된 <브라흐마나>, <아란야카>, <우파니샤드>도 역시 베다라고 부른다.
3)기원전 8~6세기의 초기 우파니샤드에 이르러 베다교에 업과 윤회의 사상이 정교화되기 시작했다.
4)불교에서는 불교를 제외한 사문의 그룹들을 여섯으로 분류하고 6사 외도라고 한다. 영혼과 윤회를 인정하는 자이나교도 여기에 포함되지만 유물론적 입장이 다수다.
5)맛지마니까야, <갈애멸진경>
6)불교 술어로는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이라고 한다.
7)4세기의 세친의 <아비달마구사론>은 12연기를 삼세양중인과의 윤회의 도식으로 논증한다. 2세기의 용수는 <중론>에서 윤회도 없고 열반도 없다는 것을 논증했지만 윤회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7세기의 법칭은 <양평석>에서 윤회에 대한 엄밀한 논리적 방법으로 윤회를 논증한다.
8)6사 외도의 한 사람이다.
9)맛지마니까야, <논파할 수 없는 가르침에 대한 경>
10)바렐라와 에바톰슨의 공저 <몸의 인지과학>은 신체화된 인지를 말한다.
11)로버트 라이트, <불교는 왜 진실인가>
12)샘 해리스, <나는 착각일 뿐이다>
13)로저 잭슨 <윤회>
14)스티븐 배철러, <불교이후> 참고. 로저 잭슨은 스티븐 배철러를 대표적인 근대주의자로 언급한다.
15)로저 잭슨이 로페즈의 주장을 인용한 부분이다. 이런 입장을 로저 잭슨은 ‘근원적 문화비평으로서 문자주의’라고 명명했다. 나는 그것을 급진적 붓다를 회복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