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작가의 치매 노인 관찰기
“거울 속 당신의 모습이 아버지와 닮았다고 느껴진다면 이제 당신도 나이가 들어간다는 뜻이겠지요. 거울 속 제 모습이 아버지를 꼭 닮아 갑니다. 또 아버지에게서 내가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할아버지의 모습이 어렴풋이 보입니다.”(작가의 말)
스페인의 그래픽노블 작가인 파코 로카는 평소 사회문제를 다루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다 친구의 아버지가 알츠하이머로 기억을 잃어가는 과정을 듣고, 자존심 강한 자신의 어머니가 부끄러움을 참고 지팡이를 구입하는 것을 보며 노인들의 이야기를 써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당시 38세의 작가에게 알츠하이머는 어떻게 보였을까.
“더 이상은 못 참겠어. 내가 미쳐버릴 것 같아.”
저녁 식사를 앞에 두고, 아들을 대출받으러 온 고객으로 착각하는 아버지에게 아들은 소리친다. 아버지의 기행을 견디다 못한 아들 부부는 아버지 에밀리오를 요양원으로 보낸다. 하지만 에밀리오는 자신이 왜 요양원에 가야하는 지 아직 깨닫지 못한다.
낯선 요양원에서 마치 전학 온 학생처럼 쭈뼛거리는 에밀리오. 그에게 다가온 룸메이트 미겔은 요양원의 거동이 가능한 환자 모두를 잘 알고 그들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고 있는 터줏대감이다. 그는 에밀리오에게 능숙하게 요양원의 사람들을 소개한다. 자식들이 자신을 못 찾고 있으니 전화를 걸어 알려줘야겠다고 생각하지만 전화를 걸러 가는 사이 자신의 할 일을 잊어버리는 노인, 오리엔트특급 열차를 타고 여행 중이라는 착각 속에 빠져있는 노인, 자신의 메달을 자랑스러워하는 전 육상선수, 귀는 멀었지만 촉각은 살아 있어 성추행을 일삼는 노인, 기억을 잃어 자신조차 알아보지 못하는 남편을 돌보기 위해 함께 요양원에 들어와 있는 부인, 자신의 말 대신 반향어 밖에 할 줄 모르게 되어버린 전직 아나운서 등등. 각자 다른 현재를 살고 있지만, 각자의 정체성만은 여전히 뚜렷한 사람들이다.
알츠하이머에 걸린 사람들은 과거를 반복하고, 특정한 시공간에만 머물기도 하고, 난데없는 망상에 빠져있기도 하다. 이러한 모습들을 보면서 우리도 어떤 면에서는 그렇게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나도 모르게 같은 말을 반복하고, 흘러간 과거에 집착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지워진 기억위에 쌓이는 존재의 긍정성
요양원 시설은 거동이 가능하고 어느 정도 인지능력이 있는 환자들이 모여있는 1층과 누군가의 도움이 없이는 생활이 어려운 2층 공간으로 나뉘어져 있다. 따라서 1층 환자들에게 2층은 공포의 대상이자 기피의 대상이다.
자신은 그저 건망증이 있을 뿐이라고 생각하며 일상을 보내던 에밀리오는 어느날 심각한 치매환자와 자기의 약이 같은 성분이라는 것을 알고 충격에 빠진다. 그리고 자신 역시 언젠가 2층으로 올라갈 수밖에 없음을 자각한다. 기억을 잃어가는 그를 지켜주는 것은 바로 룸메이트 미겔이다. 가족이 없으며 요양원에서 정신이 가장 멀쩡한 그는 다른 노인들의 용돈을 슬금슬금 갈취하는 삐끼처럼 보이지만 실은 요양원에 있는 노인들을 보살피고 있는 존재이다.
요양원에서의 무료한 일상을 벗어날 수 있는 계획을 짤 수 있는 사람도 미겔 뿐이다. 그가 평소 입소 노인들에게 뜯어낸 돈을 모아 벌인 일탈은 꽤나 스케일이 크다. 요양원의 절친 둘과 함께 스포츠카를 타고 야밤의 질주를 도모한 것이다. 함께한 친구들이 이 장면을 기억에 저장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새로운 추억을 쌓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 미겔. 미겔의 이 무심하고도 과감한 행동은 장켈레비치가 <죽음>에서 말한 “살았다는 것의 영원성”을 떠올리게 된다. “잊히고 지워지고 세월의 무게에 뭉개져 미지의 것이 된 이 어렴풋한 실존에는 파괴될 수 없고, 절멸되지 않는 무언가가 남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무엇도, 이 세상의 그 무엇도 절대로 이 무언가를 없앨 수는 없습니다.”(장켈레비치,<죽음>,679쪽)
주인공 에밀리오의 시점에서, 시간이 지날수록 룸메이트 미겔의 얼굴이 점점 단순해 진다. 그리고 서서히 뭉개진다. 마침내 백지가 된다. 만화만의 매력이다.
이 작품은 왓챠에서 애니메이션 <노인들>로도 볼 수 있다.
“옷차림은 아주 중요해요. 에밀리오. 노인의 옷차림을 보면 제정신인지 아닌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그렇구려. 호세파 부인처럼 말이오.”
“전에 말했죠? 여기에선 할 일이 없습니다. 아침 아홉시 식사, 한 시 점심, 일곱 시 저녁 식사. 약 복용량이랑 음식 말고는 중요한 게 없어요.
여긴 거꾸로 된 세상이라고요. 매 끼니 사이에 있는 시간은 빈둥거리며 보냅니다. 낮잠을 자거나. 텔레비전을 보면서 멍하니 있는 거죠. 다음 끼니 때를 기다리면서 말입니다.”
“지붕을 좀 덮자고요. 목이 좀 따끔거려요. 상태가 좋지 않은 것 같아요. 감기가 들 징조예요.”
“차 지붕을 덮자고요? 뚜껑 열리는 차를 간신히 구했는데, 뚜껑을 덮잔 말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