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과 죽어감>,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지음, 청미
매스 미디어에도 흔히 언급되는 심리학 이론으로 이별의 5단계나 슬픔의 5단계 이론이 있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졌거나, 감당할 수 없는 심리적 충격을 받았을 때 나타나는 우리 마음의 방어기제가 부정, 분노, 협상, 우울의 단계를 거쳐 평화로운 수용으로 마무리된다고 하는 이론이다. 이것을 만든 사람은 스테디셀러 <인생수업>의 작가이자 정신과 의사인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1926~2004)다. 그런데 처음 이 5단계가 나온 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상실이나 애도의 이론으로서가 아니었다. 그것은 시한부의 삶을 선고받은 환자들 200여명과의 인터뷰를 기초로 한 질적 연구 과정에서 나온 분석틀이었다. 그 5단계가 처음으로 실린 책이 1969년 미국에서 출판되어 죽음학의 고전이 된 <죽음과 죽어감>이다.
사실 이 책의 특별함은 5단계에 있지 않다. 이 책이 고전이 된 이유는 치료의 공간인 병원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그 대화에 대해 깊이 성찰한 기록이라는 데 있다. 이 책 이전에는 병원에서 죽어가는 과정에 있는 환자들을 볼 때, 질병과 치료라는 의료적 관점이 아니라 죽어가는 사람들 개개인의 이야기, 그들의 생각과 감정에 주목하는 경우란 거의 없었다. 이 책이 나온 1960년대 말의 의료계는 권위적이었다. 진단에서 치료까지 환자와 환자의 가족이 의료진에게 모든 결정을 일임하는 것을 당연시했다. 환자의 통증을 줄임으로써 그가 존엄과 품위를 유지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는 생각 역시 일반적인 것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의료의 역할은 사람을 살리고 생명을 연장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죽음은 의료의 ‘실패’로 간주되었다. ‘죽음’은 병원에서는 물론이고 사회적으로도 금기시되는 단어였다.
죽어가는 사람들과의 대화를 가감 없이 그대로 실은 퀴블러 로스의 <죽음과 죽어감>은 출판과 동시에 미국만이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에서 죽음과 죽어감에 대한 논의를 촉발시키고 의사와 간호사를 포함한 의료계가 죽음과 환자의 고통을 바라보는 관점과 태도를 바꾸는데 엄청난 기여를 했다. 죽음을 앞둔 사람들이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원하는지 그들의 주관적이면서도 개인적인 이야기는 이들을 의료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유일무이한 한 사람으로서 바라보도록 도왔다. 이 책은 미국과 유럽에서 호스피스 운동을 촉발시켰고, 고통을 겪는 임종기 환자에 대한 완화의료를 의료의 영역으로 생각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죽음에 대한 논의를 금기시하는 20세기의 서구 사회의 모습을 성찰하게 하는 전환점의 하나가 되었다.

죽어가는 환자들에게 배우는 죽음에 대한 세미나
<죽음과 죽어감>은 2년 반 동안 시카고 대학교 프리처커 의과 대학에서 퀴블러 로스가 대학원생들과 함께 진행한 세미나의 결과다. 1965년 가을, 시카고 대학 신학대학원생 네 명이 퀴블러 로스를 찾아왔다. 그들은 ‘인간 삶의 위기’에 대한 논문을 준비하며, ‘죽음’을 주제로 정했다. 그런데 죽음에 대한 연구를 어떻게 진행해야 할지 막막했기에 시카고 의과대학의 정신과 교수이자 시카고 대학 부속병원인 빌링스 병원의 의사였던 퀴블러 로스에게 도움을 청하러 온 것이었다. 퀴블러 로스는 이미 의사로서 시한부 환자들의 정신과 진료와 상담의 경험을 쌓아 나가고 있었다. 퀴블러 로스는 학생들과 함께 죽어가는 시한부 환자들을 스승 삼아 대화를 나누고 그에 기초하여 세미나를 여는 계획을 세웠다.
세미나는 시작부터 난관에 봉착했다. 병원 의사들에게 시한부 환자들과 인터뷰하고 싶다고 했으나 단 한 명의 의사의 허락도 받지 못했다. 시한부 환자들을 만나 죽음에 대한 대화를 나누겠다고? 의사들 열명 중 아홉명은 불편함, 짜증, 노골적이거나 은밀한 적개심을 보였다. 그러다 드디어 대화를 원하는 시한부 환자 한 명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퀴블러 로스는 학생들 모두가 참여할 수 있는 다음날로 인터뷰 날짜를 잡았다. 그러나 다음날 찾아갔을 때 그 환자는 전날과 달리 말할 기력을 잃었고 한 시간 뒤 세상을 떠났다. 죽음을 앞둔 이에게 내일은 영원히 오지 않는 날일 수도 있다는 배움과 함께 이들의 세미나가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인터뷰를 위해 담당 의사를 설득하는데 열 시간 이상 걸렸지만 세미나에 참석하는 의사가 생겨나고 환자들의 솔직한 의견으로부터 얼마나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지 알게 된 학생, 간호사, 사회복지사, 의사가 많아지면서 환자를 찾아다니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 되었다. 퀴블러 로스의 세미나의 프로세스는 다음과 같다. 먼저 세미나에 참석해 줄 환자가 있다는 연락을 받으면 환자를 만나 세미나에 대해 소개한다. 요점은 병원이 시한부 환자에게 배우기를 원한다는 메시지였다. 환자가 동의하고 의사가 인터뷰를 허락하면 인터뷰를 했다. 인터뷰는 주로 퀴블러 로스가 진행했고, 병원 목사가 함께 하기도 했다. 환자에게는 인터뷰실의 바깥이 보이지 않지만 밖에서는 세미나 참가자들이 인터뷰를 보고 들었다. 인터뷰를 마치면 환자는 돌아가고 참가자들 모두가 그날의 인터뷰에 대해 토론을 이어갔다.
세미나를 시작한 지 2년이 지나자 이 세미나는 의과대학원생들과 신학대학원생들 사이에서 반드시 수강해야 할 과목으로 자리잡았고, 세미나 참가자는 50명으로 늘어났다. 이 수업 자체가 병원 의료진과 학생이 격의 없이 환자들의 욕구와 간호에 대해 논의하는 자리가 되었다. 퀴블러 로스는 세미나가 참가자 모두에게 일종의 그룹치료의 성격을 띠었다고 말한다. 그것은 세미나가 단지 환자에 대한 책임만이 아니라 환자의 이야기를 듣고 난 뒤의 그들 자신의 반응, 두려움, 환상 등을 솔직하게 표현하고 수용하는 장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환자들은 대부분 세미나를 반겼는데, 그에 대해 퀴블러 로스는 인터뷰를 진행하는 자신과 목사가 환자의 부정과 분노, 두려움과 걱정에 대해 부정의 태도를 취하지 않고 환자들을 지지했다는 점을 강조한다.

죽어감의 과정 5단계
<죽음과 죽어감>에서 퀴블러 로스는 다섯 단계의 대응 기제를 기준으로 각 단계에 맞는 가장 전형적인 환자들의 심리상태를 분석하고 인터뷰를 분류해서 케이스 스터디의 자료로 소개한다. 1단계는 부정이다. 자신이 치료될 수 없는 병에 걸렸고 죽음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환자들 대부분은 “아니야, 내가 그럴 리 없어. 사실이 아닐거야”라는 부정의 반응을 보인다. 부정은 수시로 나타날 수도 있다. 그러나 부정이 반드시 빠르게 없애야 하는 나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부정은 일종의 완충장치 역할을 하기도 하고, 마음을 추스를 수 있는 시간을 주기 때문이다.
2단계는 분노다. 첫 번째 부정의 단계가 더는 유지될 수 없을 때 분노와 광기, 시기와 원한의 감정으로 채워진다. “왜 하필 나야?”라는 분노는 사방으로 분출되고 투사된다. 문제가 더 어려워지는 것은 이런 상황에서 환자의 입장이 되어보고 그들의 분노가 어디에서 연유한 것인지 궁금해 하는 사람이 거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존중받고 이해받은 환자, 관심과 시간을 할애받은 환자는 머지않아 목소리를 낮추고 성난 요구들을 멈춘다. 돌보는 사람은 오직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때만, 그래서 방어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을 때만 분노에 잘 대처할 수 있다.
3단계는 협상이다. 협상은 피할 수 없는 죽음을 조금이라도 더 미루고자 하는 대응기제다. 대부분의 협상은 하나님을 상대로 이루어지고 함축적으로 언급된다. 조금만 더 살 수 있다면 하나님께 내 삶을 바치겠다거나 신체를 기증하겠다는 식으로 나타난다.
4단계는 우울이다. 이제 더이상 병을 부정할 수 없을 때, 수술이나 입원을 요구받을 때, 명확한 신체적 증상이 나타날 때, 환자는 자신의 상황을 웃어넘길 수 없다. 분노는 상실감과 우울감으로 대체된다. 외모가 변하여 자신감을 잃기도 하고 재정적 부담도 문제다. 커리어가 중단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커지고 실제로 직장을 잃기도 하고 아이나 부모를 돌보지 못하는 일도 생긴다. 이런 우울은 원인을 짚어낼 수 있는 반응성 우울이다. 이 경우는 죄책감이나 수치심을 덜어주는 것이 도움이 된다. 또 다른 우울은 준비성 우울이다. 준비성 우울은 과거의 상실 때문이 아니라 다가올 상실 때문에 나타난다. 이 우울의 단계는 시한부 환자가 세상과의 작별을 위해 스스로를 준비시키는 시간이기도 하다. 이럴 때 그 사람에게 밝게 생각하라고 요구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곧 다가올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말라는 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마지막 5단계는 수용이다. 먼 길을 떠나기 전에 마지막 휴식을 취하는 시간이다. 이 시기에는 환자보다도 가족들에게 더 많은 도움과 이해와 격려가 필요하다. 마지막까지 싸우려는 전투적인 환자들은 끝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기 때문에 수용의 단계에 도달하기 힘들다. 퀴블러 로스는 수용의 단계에 좀 더 쉽게 도달하는 사람들은 삶의 의미를 찾고 자신의 삶을 뿌듯하게 돌아보는 연로한 사람이거나, 죽음에 대해 준비가 잘 된 사람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그러나 많은 환자들이 두려움도 절망도 없는 수용의 단계에서 죽음을 맞이했다고도 한다.
<죽음과 죽어감>은 5단계의 심리적 대응기제를 중심으로 그에 적합한 환자들과의 인터뷰를 소개한다. 책이 이런 형식으로 구조화되어 있기 때문에 이 책을 읽으면 5단계가 필연적 단계인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5단계가 칼로 두부 자르듯이 명확하게 구분된다고 할 수는 없다. 퀴블러 로스도 “각단계가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공존하기도 하고 때로는 겹치기도 한다(420)”고 덧붙이기도 했다. 죽어가는 과정에 있는 사람이 겪는 심리적 대응기제로 제시된 5단계는 이후 상실과 애도의 5단계로 확장 적용되었다. 그러나 어떤 경우든 감당할 수 없는 충격 앞에 선 사람이 보이는 심리상태를 이해하는 틀로는 유용하지만, 이것을 고정된 법칙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사람의 마음이란 그가 살아온 경험과 그가 놓인 상황과 사회적 환경에 따라 얼마든지 다양하게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죽어가는 사람의 가족
시한부 환자들이 5단계를 거치는 동안 가족도 마찬가지로 5단계의 과정을 거친다. <죽음과 죽어감>은 가족에 대한 챕터를 따로 두고 있을 정도로 가족이 환자의 심리상태에 미치는 영향과 가족이 겪는 고통과 죽음 후에 남은 자의 애도 과정에도 깊은 주의를 기울인다.
가족들도 처음에는 시한부 통보를 믿지 않으려 한다. 그들 역시 사실자체를 부정하거나 오진이라는 말을 듣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한다. 환자가 그렇듯이 가족 역시 환자의 태도와 소통능력에 크게 의존하며 변화를 겪는다. 가족들이 만일 환자에게 사실을 알리지 않는다면 환자와 가족사이에 가상의 벽이 놓여지고, 그들 모두 죽음을 준비하기 어려워진다. 환자가 분노의 단계를 겪는 것처럼 가족도 분노의 감정상태를 겪는다. 환자를 좀 더 일찍 병원에 데려가지 않은 것에 죄책감을 느끼고, 혹은 처음에 제대로 진료하지 않은 의사와 시한부를 통보한 의사에게 화를 표출한다.
특히 미국병원의 경우 1960년대 말에도 이미 가족은 정해진 시간에 면회하는 것 외에는 환자를 간호하거나 돌볼 수 없는 분업체계가 확립되었기 때문에 가족들이 환자와 함께 있을 수 없다는 것에 분노를 느끼는 경우도 많았다. 분노와 억울함, 죄책감이 지나가면 환자가 준비성 우울을 겪는 것처럼 가족도 예비적 슬픔의 단계를 거친다. 퀴블러 로스는 부정, 분노, 우울의 단계에 가족들이 자신들의 마음을 더 많이 표현할수록 상황이 덜 힘들어지므로, 가족을 돕는 것의 중요성을 거듭해서 언급한다. 환자와 가족이 죽음과 죽어감에 대해 마음을 열고 더 많은 대화를 하고 솔직하게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 환자에게도 더 편안함을 준다는 것도 강조한다. 그럴 때 가족도 환자의 죽음을 수용하는 단계를 더 잘 맞이할 수 있게 된다.
퀴블러 로스는 환자가 죽음을 수용하는 단계야말로 가족에게 더 많은 관심과 도움이 필요한 때라고 말한다. 환자가 평화롭게 자기의 내면 속에 침잠할 때 가족이 그것을 이해하기란 어렵기 때문이다. 많은 가족들이 환자들의 자연스런 침잠과 분리 과정에 과민반응을 보임으로써 환자의 수용을 어렵게 만드는 경우도 있다. 이 단계는 환자에게는 최소한의 도움이, 가족에게는 최대한의 도움이 필요한 시기라는 것이다.
이 책이 나올 때와 달리 그 사이에 가족과 관련한 제도도 달라졌고 우리의 감각도 많이 변했다. 혈연으로 이어진 가족이 아니더라도 죽어가는 사람에게는 그에게 정서적 지지를 보내고 그의 죽어감을 돌보는 누군가가 있다. 그 점에서 죽어가는 사람만이 아니라 그를 사랑하는 이들의 고통과 애도의 문제를 놓치지 않고 있다는 것은 이 책이 가진 중요한 미덕이 아닐 수 없다.
금기에서 대화로
이 책이 나올 때만 해도 70세를 넘기는 사람은 드물었다. 그 사이에 의학지식은 계속해서 더 늘어났고, 사회는 점점 더 의료화되었으며, 그만큼 사람들의 수명도 늘었다. 우리 사회도 이미 65세 인구가 전체의 20%를 넘어선 초고령화 사회를 넘어섰다. 한편에서는 초고령화 사회로의 변화에 발맞추어 살던 곳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보편적 통합돌봄 체계를 갖추는 돌봄 사회로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터져 나오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더 젊게, 더 오래 살고자 하는 욕망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이 욕망을 좇는 한에서 죽음과 죽어감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 곳으로 숨기거나 멀리 치워버리고 싶은 주제가 된다. 이런 경향성은 퀴블러 로스에 따르면 피할 수 없는 죽음에 대한 수용을 어렵게 하고 죽어가는 사람과 그를 돌보는 사람 모두를 더 힘들게 만들 수 있다.
죽어가는 사람 200여명을 인터뷰 한 후 퀴블러 로스는 “죽음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에 수반되는 절망감, 무력감, 소외감으로 인한 죽어감에 대한 두려움이 문제(426)”라고 말했다. 그렇기 때문에 더 많이 죽음과 죽어감에 대해 생각하고 대화하고 준비하는 것이 필요하다. <죽음과 죽어감>이 나온지 50년 가까이 되었다. 그동안 이 책은 40여개국 이상에서 번역되고 읽혔다. 그러나 지금도 우리 사회는 죽어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데 인색하다. 이 책에 실려있는 죽어가는 사람들과의 진솔한 인터뷰들이 더 많이 읽혔으면 하는 이유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