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모두가 원하지만 아무도 하고 싶지 않은 돌봄
작년에 죽음세미나에서 『티벳 사자의 서』를 읽었다. 이 책에서는 사람이 죽은 다음 다시 환생하기까지 머무는 사후의 중간 상태를 바르도라고 부른다. 사후 49일간 머무르는 이 바르도에서 온갖 시험에 드는데, 이 때 죽은 자는 살았을 때의 경험이 투영된 것들을 겪는다고 했다. 세미나를 끝내면서 나는 환생이냐 해탈이냐를 택하기 이전에, 우선 이생을 잘 살아야 죽어서도 평안하겠다는 생각을 새삼 떠올렸다. 그런데 이번에 『돌봄의 역설』을 읽으면서 돌봄과 죽음의 상관관계에 대해 좀 더 숙고해보게 되었다.
벽에 똥칠할 때까지 살고 싶지 않다, 살만큼 산 다음에는 스위스 같은 데 가서 생을 마감하면 좋겠다 라는 등등 우리는 자신이 마지막이 어땠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종종 밝힌다. 이런 바람에는 현재 노화가 심화되고 병이 발병했을 때 받을 수 있는 돌봄이, 자신이 바라는 형태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전제가 깔려있다. 이 책의 저자도 현재 행해지고 있는 많은 돌봄 노동이 ‘더티워크’처럼 여겨지고 있지 않은가 되묻는다. 여기서 더티워크란 손을 더럽히기 싫은 사회의 절대다수가 누군가에게 미룬 일들을 의미한다. 실제로 돌봄이 먹고 자고 배출하는 것들을 다루고 아픈 부분을 보살피는 행위를 포함한다는 측면에서 더럽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더러움’ 때문에 신성할 수 있는 돌봄을 “그 가치를 폄하하고, 취약한 집단에게 전가하고, 결핍된 환경으로 몰아넣음으로써”(책, 17쪽) 신성함을 잊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현실에서 우리는 주변에 추한 모습을 보이지 않고 깨끗하게 죽음을 맞이하기를 바라게 된다. 실제로 여러 국가에서 제도적으로 조력사망을 허용하고 있고, 우리나라에서도 연명의료결정법 개정을 통한 조력존엄사 입법이 상정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방향으로 삶과 죽음을 통제하는 것에는 문제가 없을까. 저자는 “삶에 정해지지 않고 정할 수 없는 것들이 있음을 망각하려는 여러 시도는 오히려 인간을 무력하게 만든다.”(책, 114쪽)고 보았다. 그러므로 저자는 조력사망이 삶의 끝을 정하는 시도나 수단이 되는 것에는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생애 말기 돌봄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조력사망 등의 법률을 정비하는 것 보다, 우리 모두에게 주어져 있는 돌봄의 책임에 대해 이야기하고 돌봄 구조를 살펴 돌봄을 사회 전체로 확대할 것을 제안한다. 이를 통해 “모두가 원하지만 아무도 하고 싶지 않은 돌봄”의 역설에서 벗어나 모두가 모두를 돌볼 수 있는 사회가 될 수 있다면, 누구에게나 좋은 죽음을 맞이할 가능성도 그만큼 높아질 것이라고 보았다.
2.좋은 돌봄을 위한 여섯 가지 돌봄 윤리
저자는 의료인문학자, 의료윤리학자로 자신을 소개하고 있다. 이 책에서는 돌봄을 어떻게 잘 주고받을 것인가를 질문하면서, ‘잘’을 규명하는 과정을 통해 돌봄 윤리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윤리라고 하면 우선 한 개인의 행위에 대해 그 의도와 결과에 대해 따져보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돌봄에 윤리를 붙이게 되면서 돌봄을 하는 사람과 받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고려대상이 된다. 저자는 좋은 돌봄을 위한 돌봄 윤리를 여섯 가지로 제시했다.
1)돌봄은 서로 교환한다. 2)돌봄은 의지를 갖고 실천하는 것이다. 3)돌봄은 보살핌을 받는 이의 관점에서 이루어진다. 4)돌봄은 피어나게 한다. 5)돌봄은 구조 속에서 순환한다. 6)나는 돌보며 돌봄 받는다.
저자는 돌봄이 서로를 빚어낸다는 의미에서 ‘돌봄의 교환’이라고 명명했다. 돌봄이 너무나 쉽게 한쪽에 대한 착취, 또는 다른 한쪽에 대한 학대가 될 수 있는 위험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삶을 지지하는 돌봄 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면, 서로 서로 의지할 수 있는 가능성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 돌봄이다. 또한 저자는 돌봄은 하나의 능력이라고 본다. 즉 “어떤 정서와 의지의 발현으로 인한 하나의 행위, 특히 다른 생산을 위한 기반을 제공하는 생산적 행위”(책, 87쪽)이다. 그럼에도 나 혼자서는 완성할 수 없는 행위이기 때문에, 돌봄을 받는 이와 돌보는 이 모두의 성취를 고려해야 한다. 돌봄을 받는 당사자의 자율성을 확보해야 하는 문제는 좀 더 복잡하다. 좋은 돌봄은 돌봄을 받는 이가 그것을 돌봄으로 인정할 때 가능하기 때문에, 서로의 맥락에 대한 충분한 토의를 통해 원하는 돌봄을 수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돌봄을 받는 이의 관점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 새롭게 정의한 ‘피어남’은 저자가 찾아낸 용어다. 피어남은 ‘flourishing’을 번역한 말로, 보통 번영이나 번성으로 옮겨지는 단어다. 저자는 식물의 비유를 들어 식물이 발아하고 줄기를 뻗어 꽃을 피워서 열매 맺고 다음 세대로까지 이어지는 과정 자체를 피어났다고 했다. 우리의 삶도 “여러 가능성을 담은 채로 태어나 여러 돌봄들, 양육, 교육, 가족과 친구 관계, 사회에서의 인정 등을 받으며 자신의 가능성을 펼치고 다음 세대를 준비하는 것까지를 삶의 과정”(책, 227쪽)으로 보고, 이 과정을 오롯이 누리는 것이 곧 피어남이다. 이렇게 피어나는 삶을 위해서는 모두에게 돌봄이 필수적이다. 그리고 돌보는 사람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인식하고, 자기 삶에 돌봄을 들여야 한다. 저자는 이 개념을 통해 “개인이 바랐던 함과 삶을 살아내는 것, 그것을 뒷받침하는 관계적 역량, 그 성취로서의 피어남. 나는 이것이 돌봄의 관점에서 따져보아야 할 삶의 목적이자 행복의 개념”(책, 290쪽)이라고 강조했다.
3.좋은 돌봄을 구체적으로 그려내는 돌봄 이야기
저자는 좋은 돌봄의 여섯 가지 조건을 보여줄 수 있는 방법으로 자신의 이야기는 물론 문학과 영화, 사회적 현상과 돌봄 현장의 이야기까지 두루두루 소개한다. 치과대학을 졸업하고 소아치과 전문의로 일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의료행위도 돌봄의 일환으로 다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이가 태어나고 일과 육아를 병행해야 하는 상황을 경험하면서 여성에게 전가된 돌봄, 여전히 돌봄이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현실에 고민이 더욱 깊어졌다고도 했다. <드라이브 마이 카> 영화에서 두 주인공이 연결된 경험을 돌봄의 가능성으로 해석한 부분도 기억에 남는다. 그 외에도 소설이나 다큐멘터리 등을 돌봄을 받아들이고 검토할 수 있는 다양한 케이스로 활용하고 있다.
올해 나이듦 리뷰의 각자 주제를 잡는데 나는 ‘돌봄’을 주제로 결정했다. 작년 11월 기준으로 인터넷 서점 <알라딘>에서 ‘돌봄’이라는 키워드로 검색을 해보면 출간된 국내 도서가 총 518권(문탁샘, 2024년 죽음세미나 에세이에서 인용)이나 된다고 한다. 그만큼 돌봄이라는 주제가 각광을 받는 시대라는 의미일 것이다. 하지만 주제 자체로는 너무 광범위해서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했다. 『돌봄의 역설』은 최신 돌봄의 이론을 소개하는 한편, 돌봄의 개념을 행복, 쾌락 등과 연관하여 철학적인 맥락까지 톺아 주어서 돌봄의 윤리를 따져볼 수 있었다. 돌봄을 다각도로 살펴보기 위한 도구로 이야기를 활용하고 있어서 가독성도 좋았다. 이야기의 힘은 “함께, 좋은 돌봄을, 모든 곳에서” 이루는 ‘함께-돌봄’이라는 저자 주장의 설득력을 높이기도 했다. 내가 처해 있는 자리에서 ‘돌봄’과 관련하여 구체적인 실천방안을 고민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관점을 접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오호… 완전 신간으로 스타트를 끊으셨군요?
그런데 저자가 동원했다는 영화이야기, 문학이야기는 어떤 게 있었는지, 갑자기 궁금해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