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누군가의 돌봄이 있어야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살아간다. 그러다 가까운 사람 중에 건강에 문제가 생기면 잊고 있던 돌봄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럴 때 아픈 가족을 외면하지 못하는 누군가는 돌봄을 자처하게 되고, 어느 순간 독박 돌봄에 처해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좌절하기도 한다. 우리는 분명 돌봄 속에 삶을 유지해 왔는데 어느 순간이 되면 특정한 누군가에게 돌봄이 ‘고통’으로 짐 지워지게 될까. 『나는 듯이 가겠습니다』는 자발적으로 돌봄을 택한 비혼 여성의 돌봄 기록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그 ‘고통’ 대해 다른 언어로 해석해보려 애쓰는 이를 만났다.
1.엄마를 위해 하고 싶어서 돌봄을 선택했다
김진화씨는 21년 째 특수교육에 종사하고 있는 교사이자, 2015년에 뇌출혈로 쓰러져 뇌병변 장애를 입은 엄마를 10년 째 돌보고 있다. 돌봄자가 되기 이전까지 배낭여행으로 45개국을 돌아다니며 자유롭게 살던 진화씨가 뉴질랜드 여행에서 돌아온 직후 엄마가 쓰러졌다. 진화씨가 서른다섯 살이었던 해다.
글쓴이가 스스로 엄마의 돌봄을 선택하게 된 데는 “엄마가 겪는 고난 앞에 누구보다 앞서 손 붙잡아 주고픈 ‘마음’이 있었다.”(책, 166쪽)고 했다. 그 마음을 붙잡고 휴직을 하고 1년 6개월을 병원과 재활병원에서 먹고 자면서 돌봄을 했다. 애초에 계획했던 시간이 점점 늘어나고 엄마가 더 이상 예전 일상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학교로 복직한 그녀는 엄마가 없는 일상의 의미가 새삼 사무쳤다고 한다. 직장 다니는 딸을 보살피고 집안을 꾸려갔던 엄마의 자리, 뇌출혈로 쓰러지기 삼일 전부터 극심한 두통을 호소했는데 무심히 흘러들었던 일, 만약 그때 조치를 취했다면 가벼운 일로 지나갈 수도 있지 않았을까 라는 후회 등이 그녀를 죄책감에 빠지게 했다.
하지만 진화씨는 스스로를 위로하는 힘을 길어 올렸다. 우리 삶은 완벽하게 통제하고 예비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엄마를 구하고 싶었던 마음만을 가져가려고 노력한다. 자신의 선택에 대해 “내 에너지가 아프고 그늘진 자리를 행한다는 방증일 수 있다. 거기에 더욱 더 나다운 내가 되는 길, 내가 이번 생에 태어난 이유가 있을 지고 모르겠다.”(책, 166쪽)는 자각에 이르렀다. 돌봄이 필요한 상황에서 모두가 글쓴이와 같은 길을 선택해야 한다거나 실제로 그럴 수도 없다. 하지만 그녀는 돌봄이라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마주함으로써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더 밀도 있게 자각해보는 기회가 되었다.
2.모두가 제 몫의 삶을 위해 분투한다
그녀는 엄마를 돌보겠다고 자발적으로 선택을 했지만, 주변에서 비혼이니까 당연하다는 반응을 보일 때는 폭력적으로 느껴졌다고 했다. 육아의 고충을 털어놓으며 자신에게는 결혼을 안 해봐서 모른다는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친구들도 있었다. 뇌병변 장애를 가진 엄마를 양육하는 일이 육아를 돌보는 일과 별다르지 않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무심함, 그건 친구에 국한되지 않고 사회적으로도 통용되는 일례다. 육아는 다양한 돌봄 중에서 사회적으로 가장 인정받는 일이지만 부모 돌봄은 잘해야 효도한다는 칭찬이 전부다.
엄마를 간병하면서 기저귀를 채우고, 잊었던 말을 다시 깨우칠 수 있도록 날말을 가르치고, 스스로 걸음을 내디딜 수 있게 끊임없이 반복하는 행동을 도와주는 일은 육아와 다르지 않지만, 미래를 기대하는 육아와 조금 더 나아지는 소멸을 기대하는 부모 돌봄이 같을 수는 없다. 그럼에도 돌봄이라는 세계에서는 ‘살 가치가 있는 삶’을 따지면서 위로와 공감에 인색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보게 된다. 그녀는 재활 병원에서 1년 6개월의 시간을 보내면서 가치 있는 삶은 따로 있다는 편협한 생각에서 벗어나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기도 삽관을 해 눈만 깜빡이는 사람, 비위관으로 유동식을 공급받는 사람, 인지가 저하된 사람, 대소변마저 타인에게 의탁해야 하는 삶도 그렇다. 모든 존재가 자기만의 상황에서 분투하며 제 몫의 삶을 살아 내는 중이라는 진실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책,6쪽)
3.돌봄자가 쌓은 경험을 존중하자
뇌병변 장애를 입고 일상으로 돌아온 엄마는 가족들이 일터에 나가는 시간에는 주간보호센터에서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센터에서 강제퇴소를 당했다. 편마비가 있는 엄마가 송영 차량에서 타고 내리는 일이나 공간과 상황에 따라 안전하게 대응하지 못하는 바람에 엄마의 정강이에 염증이 생겼다. 그녀는 센터 담당자에게 환자의 상황을 충분히 숙지시키고 요령을 알려주었지만, 제대로 듣고 실행하기 보다는 자신들이 더 전문가라는 입장을 내세워 귀담아 듣지 않은 탓이다. 환자의 몸 상태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미숙한 상황이 몸을 상하게 했음에도 자신들의 잘못은 인정하지 않고 강제 퇴소 조치하는 방식에 항의를 했지만, 결국 센터장의 사과로 마무리할 수밖에 없었다.
병원에서도 가족 돌봄을 한 경험이나 축적된 시간이 인정받지 못하기는 마찬가지다. 편마비 환자가 씨티를 찍거나 신경 주사를 맞을 때 어떻게 하면 되는지 잘 알고 있는 자신의 요청 사항은 잘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가 있고, 결국은 엄마가 몸이 뻣뻣해지는 위험에 빠져서 쩔쩔매기도 한다. 오랜 돌봄의 경험으로 언제든 충실한 협력자가 될 준비가 되었지만, 전문가들은 협조를 요청할 의지가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돌봄 전문가와 의료진이 지닌 전문성에 가족 돌봄자의 경험이 더해질 때 비로소 돌봄의 개별성이 충족된다.”(책,210쪽)
엄마를 위하여 자발적으로 간병과 돌봄을 선택한 것을 후회하지 않기 위해 부단히 흔들리면서 나아가기 위해 글쓴이는 자신의 돌봄을 기록했다. 그 과정이 순탄하지 않았음은 글 한 편 한 편에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재활 기간에 엄마와 함께 노력하는 모습은 아무나 흉내 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글쓴이는 기꺼이 그 고통을 감내하며 10년을 보낸 후 돌봄이 열어 준 새로운 세계에 이르렀다. 뇌병변 장애를 가진 엄마의 엄마, 돌봄에 능숙하게 대처하는 전문가, 돌봄을 말하고 쓰는 당사자, 그리고 나아가기 위해 달리는 러너까지. 그 세계는 좁아지기는커녕 다르게 넓어지고 깊어졌다고 한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간병과 돌봄은 좋은 날의 끝이 아니라 밀도 높은 삶의 시작일 수 있다고 말하고 싶다”고.
지난달에 리뷰한 『돌봄의 역설』에서 저자는 “자신이 돌보는 사람이며 돌보는 시간이 자신을 다른 존재로 만들어가는 과정이라는 깨달음이 변화를 낳는다.” 고 했다. 멋있는 말이지만 실감하기는 좀 어려웠다. 그러다 이 책을 발견하고 읽으면서 내내 이 문장이 떠올랐다. 돌봄자로써 경험을 자신의 언어로 계속 해석해보려는 노력들이, 돌봄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변화를 낳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돌봄을 하는 이든 돌봄을 받는 이든 간에 더 많은 이들의 이야기가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