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필립 로스가 1991년에 쓴 자전적 에세이다. 남자가 바라보는 남자의 노년이면서, 아들이 바라보는 아버지의 노년과 죽음의 이야기다. 큰 줄기는 아버지 허먼 로스의 뇌종양 판정을 계기로 완고했던 아버지의 노쇠를 경험하며 그를 관찰하고, 이해하고, 존엄한 죽음에 대해 실존적으로 고민하게 되는 내용이다. 우리나라에는 2017년에 출간되었지만 실제로는 『에브리멘』(2009년 국내 출간) 보다도 먼저 나온 책이어서 이 책을 먼저 읽고 『에브리멘』을 읽으면 필립 로스의 개인적인 경험이 많이 녹아들어 있음을 알게 된다.
그의 아버지 허먼 로스는 1901년 유대인 이민자의 2세로 태어나 미국 뉴저지의 메트로폴리탄생명에서 외판원으로 시작해 오십 명이 넘는 직원을 관리하다 예순셋에 은퇴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못했음에도 성실함과 책임감으로 직장에서 인정받았고 평생 가족을 돌보는 일에 소홀하지 않았다. 81세에 아내와 사별하고 일 년 뒤 새로운 연인과의 새로운 출발을 계획할 만큼 건강했던 아버지는 갑작스런 안면 마비 증세를 호소한다. 이어 청력과 시력에도 문제를 겪으며 자신에게 뇌종양이 생겼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은퇴라는 거대한 충격에서 어느 정도 적응이 되었고, 아내와 사별 후 이제 막 일상을 회복하려던 시점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는 평생 그 어느 때보다도 나약하고 의존적인 존재로 아들의 보호를 받게 된다. 필립 로스는 아버지를 통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까.
1. 은퇴에 대한 적응 능력
남자에게 노년으로 가는 첫 번째 코스는 은퇴이다. 그것은 본인은 물론 주변인들에게도 큰 영향을 준다. 로스의 어머니, 베시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바깥일을 할 때는 신화적 능력을 가진 사람처럼 보였던 남편이 은퇴하자 재앙으로 다가왔다. 허먼은 심심함을 달래기 위해 철물점을 하는 친구 밑에서 일해보고, 자원봉사도 해봤지만 지속하기 어려웠다. 결국, 할 일없는 남편이 고압적인 위세를 떨칠 대상은 자신의 아내밖에 없었다. 허먼은 아내에게 절대로 필요하지 않은 ‘집안일의 새로운 보스’가 되어 아내를 괴롭게 만들었다. 게다가 다른 사람들과의 모임에서도 아내의 말을 가로막고 구박했기 때문에 베시는 혼자서 이혼까지 고민할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시는 사람들 앞에서 남편에게 창피를 주는 일은 피했다. 남편이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할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주변의 베이비부머들에게도 흔한 일이다. 새로운 관계를 만드는 데 어려움을 겪으며 경제적 자유는 물론 요리나 가사와 같은 기초생활능력도 떨어진다. 수십 년 동안의 사회생활에도 불구하고 이 정도의 사회성과 이 정도의 적응력이라고? 보부아르의 해석에 따르면 남자들에게 은퇴 후 ‘새로운 신분’의 의미는 여자들과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보부아르는 남자의 은퇴를 “활동하는 개인의 범주에서 갑자기 비활동적인 개인의 범주로 떨어져 늙은이로 분류되는 것”이며 “그것은 과거와의 단절이다. 그는 퇴직으로 인한 휴식이나 여가 같은 어떤 이점과, 궁핍과 자격 박탈이라는 심각한 단점을 초래하는 그의 새로운 신분에 적응해야 한다.(시몬 드 보부아르, 『노년』, 홍상희, 박혜영 옮김, 책세상, 366쪽)”고 했다. 그리고 할아버지들이 새로운 신분을 대하는 태도와 적응하는 방식은 이 책으로 보건데 동서양이 다르지 않은 것 같다.
2. 할아버지의 자기 돌봄 능력
뇌종양이 발견되기 전, 허먼은 여든 살에도 불구하고 칠십 대 같은 젊은 외모로 같은 아파트에 사는 부유한 미망인들에게 관심의 대상이 되었었다. 그는 말쑥하게 차려입는 것에 자부심을 갖고 멋진 양복을 즐겨 입었지만 다른 사람 눈에 띄지 않는 것은 무엇이든 대충 입었다. 아들 필립이 아버지의 집에서 마주치게 되는 화나는 장면은 욕실의 여기저기에 걸려있는 아버지의 비루한 속옷들이다. 또한 그는 아버지의 집을 방문할 때마다 볼일을 본 뒤, 세면대를 문질러 닦고, 비누 받침을 씻고, 양치용 컵을 물로 닦는다. 이 대목을 읽을 때, 혼자 사셨던 시아버지집에 가면 내가 했던 일과 똑같아서 웃음이 나왔다. 돌아가신 나의 시아버지는 독거 할아버지 중에서 사교성이 있고, 살림 능력도 좋은 편에 속했지만 집에 방문해 보면 늘 청소할 것과 치울 것과 빨아야 할 것들이 눈에 띄었다.
김영옥의 인터뷰집 『늙어감을 사랑하게 된 사람들』에서 ‘고령친화 맞춤형 주거관리 서비스 사업단’의 김진구 편에는 그가 경험한 독거 할아버지들의 사례가 소개되어 있다. 특히 열악한 경제 환경에서 나이든 한국 남성의 극단적이고 적나라한 모습이 등장한다. 그가 만난 혼자 사는 할아버지들은 대체로 무기력하고 고독했다. 또한 그들의 집안 풍경은 ‘자기 돌봄’ 능력이 전무한 사람의 생활 공간이 얼마나 황폐해질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고 했다. 더 놀라운 것은 “할 말은 많지만 다 할 수 없을”지경으로 집이 엉망진창인데 정작 본인들의 외모는 때론 닥스셔츠에 바지를 차려입을 정도로 ‘그럴듯하게, 멀끔하게’ 꾸민다는 점이라고 했다.
물론 나이가 들어서도 외모와 체면을 관리하는 능력이 유지된다는 점은 다행이지만, 자신을 돌보기 위한 기초생활능력을 기르지 못한 것은 역시나 일과 개인의 삶에서 균형을 이루지 못했던 이전 세대들의 슬픈 운명이다. 하지만 요즘 결혼하는 남성들은 좀 다른 것 같다. 집안일, 육아, 취미생활 어느 하나라도 소홀해서는 신랑의 자격을 얻기가 어려운 추세다. 그렇다면 결혼 경험이 있는 MZ남성의 미래는 조금 더 희망적이라고 볼 수 있을까?
3. 전투의 끝을 위한 준비
“제가 하라는 대로 하세요.” 나는 그렇게 말했다.
그것은, 그 네 단어는 먹혔다. 나는 쉰다섯이고, 아버지는 여든일곱이 다 되었고, 때는 1988년이다. “제가 하라는 대로 하세요.” 나는 그렇게 말하고 – 아버지는 그렇게 한다. 한 시대의 끝이고, 다른 시대의 새벽이다.
필립 로스가 아버지의 고집을 꺾어 산책을 시키는 장면이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다정할 수 있는가. 필립 로스 부자 역시 다정한 관계는 못 되었다. 필립은 독단적이고 훈계를 좋아하는, 쓸모없는 조언과 의미 없는 구속에 자신을 몰아넣었던 아버지를 평생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랬던 아버지가 아들의 명령에 백기를 든다. 아버지의 권위와 위엄이 아들에 의해 조용히 내려앉았을 때, 아버지의 몸 역시 존엄의 범위를 벗어난다. 아버지에게 배설과 관련한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아들은 똥 범벅이 된 아버지의 욕실에서 아버지를 구해내고 아무도 모르게 뒷수습을 한다. 그리고 생각한다. 그것이 아버지의 유산이라고. 그것을 치우는 것이 다른 뭔가를 상징해서가 아니라 상징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살아낸 현실 그 자체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허먼은 여러 번의 진료와 상담 끝에 자신의 머릿속을 압박해 오는 뇌종양을 제거하는 대신 백내장을 제거한다. 불확실한 미래에 기대기보다 확실한 내일을 선택한 것이다. 그리고 수개월 후 맞이한 응급상황에서 자신이 사인한 사망선택유언에 의해, 그것을 지켜준 아들에 의해, 오랜 전투에서 기품 있게 퇴장할 수 있었다.
허먼이 알려준 삶의 마지막 지혜는 내려놓음이 아닐까 싶다. 자신의 고집을 내려놓고, 자의식을 내려놓고, 아들과 화해함으로써 그것이 바로 돌봄받을 수 있는 능력임을 보여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