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듦대중지성_시즌3] <이반 일리치의 죽음> 공지
서해
2026-10-11 19:37
72
여러분, 연휴 잘 보내셨는지요?
이번 책은 유난히 짧아서 다들 가뿐하게 읽어내셨으리라 생각됩니다.
물론 주제는 가볍지 않았지만요.
<이반 일리치의 죽음>(1886)은 톨스토이가 58세때 출간되었습니다.
톨스토이는 1870년대 후반부터 심각한 정신적·실존적 위기를 겪었습니다. 전쟁과 평화》와 《안나 카레니나》를 쓴 작가로서 명성과 성공을 누렸지만, 그런 성공이 삶의 의미를 보장해 주지는 않는다고 느꼈다는데요. 결국 자신은 왜 살아야 하는가, 죽음이 모든 것을 끝낸다면 삶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라는 질문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리고 한 법조인의 죽음 소식을 접한 것이 이 소설 집필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하네요.
덧붙여서,
‘죽음’이라는 주제에 대해 생각해 보기 위해 함께 읽어볼 글도 추천드립니다.
요요샘이 죽음을 주제로 쓰신 두개의 리뷰인데요.
바로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과, 장 켈레비치의 <죽음에 대하여>입니다.
이 리뷰를 읽고 오시면 세미나에서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더 많아질 것 같아요.
1)이반일리치의 죽음
2)죽음에 대하여(장 켈레비치)
이반 일리치의 삶과 죽음을 통해 여러분은 어떤 사유를 하셨는지 궁금합니다.
메모는 월요일밤 9시까지 올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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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비교적 짧고 내용전개가 압도적으로 몰입감이 있어서 읽어내기에는 별 어려움이 없었다. 하지만 책을 읽고 난 후 갑자기 묵직한 질문과 반성. 회한(!) 등 알 수 없는 감정들이 휘몰아쳤다.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Elisabeth Kübler-Ross)가 제시한 '죽음의 5단계(The Five Stages of Grief)'를 통해 인간이 죽음을 마주하고 이를 받아들이는 과정에 대해서 들어봤던 것이 생각이 나서 찾아보았다. <부인 - 분노 - 타협 - 우울 - 수용> 이 그것인데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 이르는 과정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게 그려지고 있다고 보여졌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대하는 아내나 가족, 그리고 직장 동료들의 감정이나 태도가 적나라하게 현실적이어서 가슴이 쓰렸다. 이와 관련해서 개인적인 경험이 떠올라서 더욱 그랬다. 8년전 쯤 남동생이 지병으로 힘든 투병생활 끝에 죽었을 때 마주했던 올케와 조카들의 냉랭했던 그리곤 홀가분해하던 태도나 표정들이 상처가 되어 한동안 힘들었던 기억이 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자면 나또한 그런 심정이 전혀 없었다고도 할 수 없었던 모순적인 감정이 죄책감과 미안함, 그리고 동생네 가족에 대한 원망 등이 뒤섞여 한동안 혼란스런 시간들을 보냈다. 그러나 놀랍게도 아들을 먼저 보내야만 했던 우리 친정부모 두분은 아들이 더 이상 고통스럽지 않고 하느님 나라에서 편안한 안식을 얻게 되었다고 편안한 표정으로 장례도 치르고 먼저간 아들을 그리움으로 추모하며 지내셨다. 언제간 법륜스님의 법문 중에 “부모가 돌아가셔서 우는 자식들은 대개 부모를 생각해서 우는 것이 아니라 자기 설움(자기가 불쌍해서)에 운다”고 하셨던 기억도 난다.
이반 일리치가 아내나 의사를 증오의 마음으로 노려보며 극심한 고통을 오롯이 홀로 몸부림치며 겪어내고 있을 때 그들은 이반 일리치의 고통에 관심을 두기 보다는 오로지 자신의 안위와 자신의 입장과 태도, 타인의 시선 등만을 염두에 두고 죽어가는 이를 속이고 거짓연기를 한다. 우리 주변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사례들이다. 연명의료 문제와 관련되어 사회적 문제제기와 공론화 과정도 이런 맥락속에서 나온 것이겠다.
생의 마지막 순간, 다행히도(!) 이반 일리치는 한줄기 '빛'을 보았다. 아내와 아들에게 마지막으로 용서를 구하고 마침내 고통은 끝난다.
“끝난 건 죽음이야. 이제 더 이상 죽음은 존재하지 않아.” (119쪽)
그는 마지막에 탄성처럼 소리친다.
“아, 이렇게 기쁠 수가!”
생의 끝, 죽음을 맞이하기 전에 적어도 자신의 삶을 돌이켜보고 정리할 수 있는 시간들, 그리고 남은 자들과의 용서와 화해정도는 하고 갈 수 있는 시간과 여유가 내게 주어졌으면 좋겠다. 어느 특정 시점에 주어지길 바라기 보다는 상시로, 지금, 바로 이순간과 일상을 살아가면서 이런 태도를 유지하며 살아가는 것이 정답인지도 모르겠다.
이반 일리치 본인을 포함하여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은 모두 죽음을 외면한다. 표트르 이바노비치는 마음을 다잡으며 음울한 기분을 떨쳐내고, 가족들은 병의 원인이 전적으로 이반 일리치에게 있다고 반복한다.
힘차고 밝은 농부, 이반 일리치를 이해하고 죽어가는 사람을 위한 일을 기꺼이 하는 게라심을 제외하고.
그리고 그것은 생전에 이반 일리치가 그토록 지키고 싶어 했고 의지했던 유쾌한 기분과 점잖은 품위가 얼마나 허상이었는지를 보여준다.
그는 결혼생활에서 느끼는 불쾌함 등 조금이라도 그의 안정을 깨는 일이 있다면 업무로 몰두하고 자신이 가진 지위를 이용해 느낄수 있는 전능함으로 숨고는 했다. 하지만 고통과 죽음 앞에서는 그 모든 것이 아무 소용이 없다.
그의 정신적 고통에는 두가지가 있다.
가족과 지인들을 통해 자신이 추구해온 품위가 모두 가식이고 거짓이었음이 너무나 자명하게 보이는게 첫번째 고통이고, 두번째 고통은 ‘아무도 그가 바라는 만큼 그를 불쌍히 여겨주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누구든 자기를 아픈 아이처럼 그저 불쌍히 여겨주길 무엇보다 바라는’ 어린아이 같은 마음은 ‘유쾌하고 점잖은 태도’와는 거리가 멀지만, 자신의 삶과 병과 고통, 그리고 죽음을 직면하고 책임지려 하지 않는다는 부분에서는 일맥상통한다. 거짓과 부정 속에서 구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타인의 동정과 위로 뿐인 것이다.
끝까지 그는 고통과 죽음을 자기에게 일어날 수있는 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대체 왜? 무엇 때문에 이 공포를?’이라고 끊임없이 괴로워하며 질문한다.
신부에게 성찬을 받은 후 나아졌냐는 질문에 거짓으로 ‘그렇다고 대답하는 순간 그는 자신이 파멸했고 돌이킬수 없는 완전한 끝이 찾아왔음을’ 알게 된다. 짧은 어린 시절을 제외하고는 거짓과 모순 속에서 허상의 삶을 살아온 자신의 모습을 자각하게 되는 순간이다.
당시에 기쁨으로 여겨지던 모든 것이 이젠 그의 눈 앞에서 싹 녹아 버리며 뭔가 하찮은 것으로 바뀌었다. 심지어 역겨운 것으로 바뀌는 경우도 잦았다.
삶이 이토록 터무니없고 역겨울수 있을까? 정확히 그토록 역겹고 터무니 없다면 대체 왜 죽어야 하며, 또 왜 죽어가면서 고통받아야 하는가? 이건 뭔가 잘못되었다. ‘혹시 내가 잘못 살아온 건 아닐까?’ 갑자기 머릿속에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하지만 나는 모든 것을 제대로 했는데 뭐가 어떻게 잘못되었단 말인가?’ (pp. 151~152)
처음 이야기를 읽을 때에는 심근경색 시술 이후에 달라진 남편의 모습을 보는 듯 했고, 두번째 읽으면서는 죽음이 아니라 삶을 부정하는 이반 일리치의 모습이 와닿았다.
지금 내가 갑자기 병을 얻어 죽게 된다면, 같은 생각이 일어나지 않을까.
죽음을 부정하는 일은 결국 삶을 부정하는 일로 이어진다.
지금의 삶이 어떻던, 비록 유쾌하지 않고, 깔끔하지 않은 일들로 가득차 있다고 해도, 나의 삶이고 나의 시간이고 내가 만든 것이라고 받아들이는 마음.
그 마음은 어떻게 자연스러운 일이 될수 있을까?
부족함과 유한함, 삶의 어두움도 선뜻 바라볼수 있다면 남을 위해 수고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안도감으로 죽음의 공포도 담담히 받아들일수 있게 될까?
“우리는 모두 죽게 될텐데요. 수고하지 않을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다름 아니라 그의 말에는 죽어가는 사람을 위한 일이니 별로 수고롭거나 버겁지 않고, 또 자신이 이런 처지일때 누군가가 같은 수고를 베풀어주길 바란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 (p.123)
*충직한 하인 게라심이 나오는데 죽음을 앞두고 저런 사람이 옆에 있다면 참 위안이 될 듯하다. 그러나 누구나 저런 사람을 옆에 두고 싶지, 자신이 저런 사람이 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또 하나 생각되는 건 가족이 저렇게 하기는 더 어렵다고 생각이 든다. 가족은 늘 어떤 기대를 하고 있기 때문에 그로 인해 무언가 못마땅한 구석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는 사람이 저런 역할을 하기가 더 쉬운 것 같다.
*103쪽, 결혼...... 너무나 절망적이고 환멸뿐이었다. 아내의 입 냄새, 애욕과 위선!......
→ 이 글은 죽음을 앞둔 사람의 두려움과 인간의 허위의식을 다룬 소설이지만 결혼을 이렇게 표현한 것을 보니 일부 공감이 되고, 적나라한 표현에 피식 웃음이 나온다.
톨스토이는 아내 소피아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한다. 특히 이 소설은 톨스토이가 정신적으로 변화(자신이 해석한 실천적인 기독교 사상)를 겪고 난 후에 쓴 소설로서 아내는 그의 사상에 동조하지 않았고 그래서 더욱 더 아내를 속물 취급하였을 것이다. 그런 마음을 이 소설에서 저렇게 표현하지 않았을까 상상해본다.
결혼생활을 계속 좋게 이어나간다는 것은 누구나 쉽지 않은 일이다. 정신적 변화가 없어도 힘든데 둘 중에 한명이 정신적으로 큰 변화를 겪게 된다면 그 격차는 더 벌어지게 되어있다.
톨스토이는 50세 이후 사유재산과 저작권을 포기하려 했고 소박한 농민적 삶을 실천하고자 하였다고 하니, 부인은 얼마나 기가 막혔을까 짐작이 간다. 자식은 많은데 어떻게 그것을 용납할 수 있을까? 그리고 소피아는 톨스토이가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리나> 같은 대작을 썼을 때 악필이었던 그를 대신해 직접 필사해 주었다고 하니 그의 공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는데 말이다.
결국 톨스토이가 죽을 때는 그의 동조자들과 집을 떠나 방랑길에 올랐다가 폐렴이 걸려서 죽었다는데 그 때 그를 만나러 온 소피아를 만나지도 않았다고 하니 그녀에게 얼마나 정이 떨어졌으면 그랬을까 안타까우면서도 이렇게 대 문호로서, 정신적으로 고양된 사상가도 결혼생활을 엉망으로 이어 갔던걸 생각하면 조금 위안이 되기도 한다.
하여간 딴 길로 샜는데 결혼이라는 것, 결혼생활이라는 것이 참 만만치 않다는 것을 얘기하고 싶은 것!
그런데 이만큼 살다 보니 이제는 뭐든지 좀 이해가 된다는 점!
즉, 부부란 옆에서 저 밑바닥까지 다 보게 되어 있기 때문에 그를 절대로 존경하거나 존중하기 어려운데 이해는 좀 된다는 점!
입 냄새 안나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애욕(애욕에는 뜻이 두가지가 있는데 하나, 이성에 대한 성애의 욕심, 둘, 어떤 대상에 대한 애착과 사물에 대한 욕심, 여기서는 아무래도 후자가 아닌가 싶다)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위선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하여 여기서의 아내는 평범한 사람이지 이상한 사람은 아니라는 점! 그런 것이 걸리는 남편이 문제가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평소 죽음에 조금 더 가까이 있는 나이, 죽음을 조금 더 생각하는 사유성향 때문에,
이 소설을 처음 읽었던 젊은 시절보다 감정이입이 조금 더 쉬울 줄 알았다.
웬걸,
소설 속 시대와 지금의 의료환경의 차이때문에 이마저 쉽지 않다.
그 당시와 달리 지금은 병의 정체는 특별한 경우 외에는 거의 알게 된다.
그 당시와 달리 지금은 통증이 특별한 경우 외에는 거의 통제가 된다.
소설은 역시 남의 이야기 통해 나의 되새김질이 되어야 이해할 수 있다.
마리
이반 일리치는 애써 상류층을 일궈가는 삶을 살았다. 오래 살아서 자식(영특한 아들과 좋은집안 출신 예비판사 사위후보)세대까지 이어간다면 진짜 상류층 계보를 만들어냈지 싶다. 소위 소년급제라 불렸던 시절, 20대 초반(대학1~2학년)에 사법고시를 패스하고 집안 좋은(권력이나, 자산)집의 사위가 되어 권력을 뻥 튀기 한 대표적인 검사 두 명(ㅎㄷㅎ과 ㅇㅂㅇ!), 나라를 진흙탕으로 만드는데 기여하고 여전히 위세 등등한 사람들.
자신 스스로도 그렇고 주변에서도 인정하는 제일 가까운 사람이라는 뽀뜨로 이바노비치가 보여주는 '적나라한' 친구 죽음을 바라보는 시각, 사실은 '친구'가 그들만의 리그 속에 엮인 관계임을 보여준다. 애도하지 않는 사회에 희망이 있을까? 현대의 형식적인 장례 문화도 결혼 문화 만큼이나 속물적인 것을 이전이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내 경우 가까운 친구의 죽음은 10년 전과 올 해, 그렇게 두 번 겪었다. 두 명 모두 늦게 발견된 암으로 길지 않은 투병기간이 있었고 '암'을 앓고 사망할 때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두 친구 뿐 아니라 집안 어른들 죽음에서도 늘 나는 3인칭에 머물렀던 것 같다. 뽀뜨르 이바노비치 처럼, 나는 아니야, 나는 안 죽어 하면서. 그런데 나는 죽은 당사자보다 남겨진 사람들에 관심이 많았다. 늘 3인칭이어서 가슴 먹먹하게 함께 울어주지 못했지만, 남겨진 가족들에 대해 마음이 쓰였다. 얼마 전 아침 방송에서 마침 '죽음' 관련 토론이 있었는데, 내 죽음이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는 것, 남겨진 사람들과의 관계도 생각해야 한다는, 언제라도 가능할 때 인사를 남길 수 있는 죽음이 되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했다. 삶과 죽음은 늘 이어져 있음을 기억하고 잘 살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잘 살아'내는 것은 적어도 '자기기만'(p112)에 빠져있는지 돌아보는 삶이라면 조금은 봐줄 수 있을 것 같다. 인생을 '가볍고 적당하게'(p32)대하지 않기, '용서'(p118)를 빌 준비(용기)를 하기, '거짓말'하지 않기 등을 세어본다.
책이 얇아서, 잘 읽혀서 '잘 읽은'줄 알았는데 메모를 작성하려니, 이 얇은 책에 묵직한 죽음(삶)이 담겨있어 잠깐 당황했다. 고전의 힘, 다시 읽어야겠다.
동료의 죽음이 사람들 저마다의 가슴속에 불러일으킨 것은 자리 이동이나 직위 변경에 관한 생각만은 아니었다. 비록 친한 동료가 죽었지만 막상 사망 소식을 접하자 사람들은 으레 그렇듯이 자기가 아니라 그가 죽은 데 대해 안도하는 듯했다.
오로지 그가 곧 자리를 비워주고 자신의 존재로 인해 야기된 산 자들의 고통을 덜어줄 것인가 그리고 그 자신도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것인가에 쏠려 있다.
이반일리치의 결혼, 하나는 그런 여성을 얻음으로써 자기 자신에게 좋은 일을 한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높은 사람들이 옳다고 여기는 일을 한다는 것이었다.
옆구리의 통증. 죽음의 과정 시작, 자신만이 알고 있는 주위의 그 누구도 이해하지 못하는, 이해하려 들지도 않는 과정. 세상은 다름없이 흘러간다는 생각이 이반일이치의 마음을 가장 아프게 했다.
“맹장 문제도 신장 문제도 아냐. 삶 그리고 ......죽음이야. 그래. 삶이 있었는데 지금은 떠나가고 있는 거야. 떠나는 중이라고. 근데 나는 그걸 붙들 수 없어. 그래. 뭣 땜에 자신을 속여? 나만 빼고 모두 내가 죽어가고 있다는 걸 알고 있잖아. 그래 문제는 몇 주일 후냐, 며칠 후냐 아니면 지금 당장이냐. 한때 빛이 있던 자리를 지금은 어둠이 차지하고 있어. 나 또한 이곳에 있었지만 지금은 저곳으로 가야 해! 어디라고?” 등골이 서늘해지고 숨이 막혀 왔다. 심장 뛰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내가 없어지면 뭐가 될까? 아무것도 안 될 거야. 그럼 어디에 가 있게 될까? 정녕 죽어야 한다는 말인가? 아니야, 그럴 수는 없어.”
“죽음이라, 그래, 이제 죽는 거야. 근데 저들 중 아무도 몰라. 알려고 들지도 않지......저들은 관심도 없어. 자기들도 죽을텐데 말이야. 어리석은 것들, 나는 좀 빨리, 저들은 좀 늦게 갈 뿐이야. 죽는 건 같아. 근데도 좋아들 하고 있어. 짐승 같은 것들” 사람들이 언제나 이처럼 끔찍한 무서움을 겪는 운명을 타고난다는 건 말도 안되었다.
그는 죽음과 단둘이 되었다. 죽음이 눈앞에 있었지만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할 수 있는 건 오로지 죽음을 응시하며 두려움에 떠는 것이었다. 끊임없이 다가오는 무섭고 얄미운 죽음만이 유일한 진실이었고 나머지는 죄다 거짓이었다.
‘밤이나 낮이나 도무지 잠이 안와. 차라리 좀 빠르면 좋으련만. 뭐가 빨라? 죽음, 어둠이 말이야. 아냐, 안돼. 그래도 뭐가 됐든 죽음보단 나아!’
누군가 자신을 통증과 더불어 폭이 좁고 깊이를 알 수 없는 검은 자루에 처넣지만 자기는 도저히 들어가지 않는 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작업은 엄청난 고통을 안겨주며 지속되었다. 그는 한편으로는 두려워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차라리 그 나락에 떨어지고 싶었다. 저항했고 한편으로는 협조했다.
저항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뚫어지게 바라보느라 눈이 피로해졌다. 그렇다고해서 시야에 들어오는 것을 달리 안 볼수도 없어 소파의 등받이를 응시하며 기다렸다.
그는 머릿속에서 편했던 자신의 삶 중 최고의 순간들을 더듬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떠오르는 예전의 최고의 순간들은 그 당시와는 전혀 다른 것 같았다. 어린 시절의 추억만 빼고는 다 그랬다. 과거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삶은 보다 삶다웠다. ..상류층에 진입하자 그런 좋은 순간들은 점점 줄어들었다. 거슬러 올라가면 생의 출발점에 밝은 점이 하나 있었는데 그게 점차 빛을 잃어 어두워졌는데 그 속도가 빨라졌던 것이다.
‘혹시 내가 살아온 삶이 바르지 않았던 게 아닐까?’
죽음이 있던 자리에 빛이 있었다.
“바로 이거야!” 그는 갑자기 큰 소리로 말했다.
“이렇게 좋을 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