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후기) 기억에 의지해서 소설을 쓸 수 있을까?
난초공원 선생님이 발터 벤야민의 ‘섬광’이라는 개념을 들춰주신 것이 신선했다. 과거와 지금이 섬광처럼 부딪혀 만들어낸 이미지는 과거의 그것이 아닌 새롭게 형성된 무엇이라고 공부했던 것이 얼핏 생각난다. 벤야민에 따르면 지나간 것들과 지금이 섬광처럼 만나 하나의 성좌(Konstellation)-별자리, 별들의 새로운 연결-를 형성한다고 한다. 챗 지피는 이를 과거와 현재가 어느 한 순간 충돌하면서 새로운 이미지가 번쩍 나타나는 것에 가깝다고 설명해주었다.
박완서 작가는 “순전히 기억력에 의지해서” 이 책을 썼다고 했다. 하지만 작가가 고백했듯이 기억은 불확실하며 하나의 사건에 대한 기억을 공유하는 이들조차 각각의 상상력으로 각색된 기억을 갖는다. 만약 벤야민의 말처럼 각자가 지금 처한 사건을 만났을 때 기억의 파편이 섬광처럼 현재에 나타나 과거의 그것도 현재의 그것도 아닌 새로운 이미지를 형성한다면, 한 사람에게 하나의 기억이 반복되어 떠오른다 하더라도 매번 새로운 것이 만들어진단 말인가? 문득 박완서 작가가 자신의 경험을 반복해서 여러 작품에 썼더라도 매번 그 이미지는 작가 현재의 현재 상황에 따라 조금씩 달랐을거란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작가에게 글쓰기는 매번 기억의 이미지를 새롭게 하는 작업이 아니였을까?
유난히 감각적인 단어와 표현들이 많았던 이 책은 읽는 이의 오감까지 열어제치는 것 같다. 아카시아 꽃 한송이를 먹었을 때의 “비릿하고 들척지근한 맛”, “입 안에 군침이 돌게 만드는 신맛”나는 싱아, 할아버지의 두루마리 자락의 서늘함, 우아한 목이 긴 초병, 낭자하게 피를 흘리는 것 같은 빨간 저녁 노을, 홍시빛깔의 잔광이 남아 있는 능선을 배경으로 텃밭머리에서 너울대는 수수이삭...그래서 였을까? 나도 모르게 문탁샘이 톡에 올린 『박완서의 낱말들』을 주문했다.
시부모님의 경험을 기록하고 싶었다는 송이샘 말도 기억에 남는다. 우리 할머니도 비슷한 경험을 가지고 계셔서 나도 늘 돌아가신 할머니의 이야기를 그림책으로 써보고 싶었다. 제목도 정해두었다. ‘귀덕이“. 박완서 작가보다 두 살 많은 1929년생이신 할머니에게 귀하고 덕스럽게 살라는 이름은 과분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남도의 한 섬마을에서 태어난 우리 할머니는 작가의 시골 동무들처럼 소위 처녀공출을 피해 어린 나이에 시집을 가셨고, 6.25때 남편을 잃고 아이 셋을 키우셨다. 글을 읽으면서 나는 박완서 작가에게 질투를 느꼈다. 어쩜 그건 할머니의 질투였을지도 모른다. 겨우 두 살 차이인데, 할머니는 딸자식은 학교 근처에도 보내지 않았던 가풍에 따라 글을 배우지 못하셨다. 하지만 글을 배운 박완서 작가나 글을 배우지 못한 우리 할머니나 전쟁통에서 가족을 지키고 살았던 고통은 비슷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여튼 벌칙(형벌)은 아니지만 발제문을 늦게 올린 댓가로 후기를 빨리 올리라는 연숙샘 말이 족쇄처럼 발을 끌어당기는 것 같아 늘어지고 싶은 토요일에 몸을 일으켜 컴퓨터 앞에 앉는다.
세미나마다 튜터샘들은 에세이 마감 시간을 준수하라며 “잘 쓰려는 자의식이 글을 못쓰게 한다”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말씀하셨다. 지금 나는 발제문과 후기쓰는 데도 매번 시간을 어기고, 넘기고 있으니 이건 진짜 버릇일까 자의식일까? 그러면서도 또 세미나를 꾸역꾸역 신청하는 것은 뭘까? 사실 속으로는 직장에서 녹초가 되어 돌아오면 이것 저것 다 하기 싫어서 그런다고 핑계대고 있지만 솔직히 내가 퇴직을 한다고 해서 성실한 학인일 될 것 같지는 않다. 아직 혼구녕이 덜 난건가?
1학년 아이들하고 공부를 하다보면, 내가 지금 뭐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때가 있다. 5분도 집중을 못하고, 모르는 말이 나오면 멍하게 앉아있는 아이들도 많고.. 그런데 또 이런 아이들이 학원 숙제가 많아서 힘들다고 한다. 그럴 때마다 울거먹는 레파토리가 있다. 선생님도 실은 숙제를 제 때 못해서 쩔쩔매고 함께 공부하는 선생님들에게 늘 혼난다고 말해준다.
박완서 소설 읽기가 끝나간다. 소설 읽기는 재미있는데, 소설 세미나는 쉽지 않다. 연숙샘이 “고등학생들은 이 재미있는 『그 많던 싱아가...』를 교과서 문제로 푸니 얼마나 괴롭겠냐, 이 소설의 재미난 맛을 못봐서 안타깝다”라는 말을 하셨는데, 우리도 크게 다르지는 않다. 소설은 정작 재미있게 읽었지만, 세미나를 할라치면 어떻게 재미나게 읽은 이 소설을 분석해야하나 막막하다. 벤야민의 말을 내 식대로 이야기 하자면, 소설에서 하나의 문장이나 장면을 읽을 때 각자의 과거의 기억이 지금과 섬광처럼 만나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내서 그런 것이 아닌가 싶다. 게다가 소설이란 온갖가지 정서를 불러일으키는 글이 아닌가. 그러니 우리의 소설 세미나는 사공이 많아 산으로 가기 십상이 아닐까 T.T. 해서 방향타를 쥐고 나아가야할 튜터샘이 더욱 필요하겠지만....
그래도 박완서를 떠올릴 때마다 이 세미나가 떠오르겠지? 그 때 이미지는 매번 다른 이미지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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ㅋㅋㅋㅋ...........
샘...소설읽기 '세미나' 가 아니었다면
샘의 이 멋진 후기를 어떻게 읽을 수 있었겠어요?
샘들의 후기가 점점 개인적이면서도, 동시에 점점 맥락적이어서 샘들 후기 읽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전, 몇년 전 sf 세미나 만들었을 때, 그런 나를 칭찬해주고 싶었는데
요즘은 "박완서 안 했더라면 어쩔 뻔 했어?" 라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샘들한테 '지×'을 떨면 떨수록, 저도 더 분발하게 됩니다. 그러니 너무 저를 미워하지 마시와요. ㅋㅋㅋ
발트 벤야민의 섬광이라는 개념. 전 세미나때 (부끄럽게도^^)처음 들었네요. 읽어본 적이 없어서 ㅎ.' 기억은 현재 처해있는 상황에 따라 매번 새롭게 떠오르고 새롭게 의미부여되는구나' 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철학적으로 정리가 되어있군요. 찾아보니 매우 중요한 철학적 개념이네요. 제미나이의 해석 가운데 "섬광은 평상시가 아닌 위기의 순간에 찾아온다. 현재가 위기에 처했을 때, 과거의 억압받았던 기억이 섬광처럼 번뜩이며 다가와 현재를 일깨우고 구원(메시아적 순간)할 가능성을 제공한다."란 말이 있는데 정확하다면 전, 여기에 꽂혔습니다.
왜 우리는 기억해야할까? 왜 박완서 작가는 그 더러운 시간, 벌레의 시간을 계속해서 쓰고 또 썼을까? '피압박자들의 과거는 잊혀지기 쉬운데, 섬광처럼 번뜩이는 기억을 통해 그 잊힌 과거를 구원할 수 있다' '그 많던 싱아를 누가 다 먹었을까?'를 읽고 큰 것을 얻었습니다. '기억한다는 것의 의미. 무엇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에 대해 회피하지 말고 고민을 이어가겠다는 것, 벤야민의 책을 한번 읽어봐야겠어요. 무슨 책을 읽어야하나요?
산책샘과 난초샘 모두 저랑 함께 공부를 하셨었는데요... 저희가 벤야민을 직접 읽지는 않았고요,
주디스 버틀러 (<지상에서 함께 산다는 것>)를 읽었을 때 벤야민이 나왔어요.
소위 시오니즘과 이스라엘 국가폭력에 대한 근본적이면서 이론적인 비판을 하는 책이에요.
역사적으로 박해받았다는 것이 지금 이스라엘의 정치적, 군사적, 외교적 행태를 정당화할 수 있는가?
유대민족의 '시오니즘'에 그런게 있는가... 그런 질문 속에
역사를 읽는 다양한 이론가들(사이드, 레비나스, 벤야민, 아렌트...ㅋㅋ...ㅠㅠ)의 이야기가 나와요.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86523839
그 책의 4장 제목이 "섬광-메시아의 정치"에요.
'구원' 뭐 이런 단어는 바로 메시아와 연결되어 있는데요...
제가 지금 제주여서 책이 없어서... 위의 알라딘의 4장 요약을 가져올게요.
"<3장 발터 벤야민과 폭력 비판>과 <4장 섬광―벤야민의 메시아 정치>에서는 20세기 전반 독일의 가장 중요한 문학비평가이자 사상가로 꼽히는 발터 벤야민(1892~1940)의 전기前期 논고 <폭력 비판>(1921)과 그의 생애 마지막 논고인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1940)를 중점적으로 다룬다. 벤야민은 국가란 법적 폭력으로서 출현하고 유지되며, 승자들이 목적론적으로 구성한 역사(승자의 진보로 구성된 역사)는 피억압자들의 역사를 삭제해왔기에, 법적 폭력을 통해 진보하는 역사와 단절할 것, 지금 여기에서 피억압자들(단수가 아니라 복수다)의 역사를 구성할 것, 곧 진정한 비상사태의 도래를, 따라서 파시즘에 대항한 투쟁을 요청한다. 이에 버틀러는 구원이란 “귀환이 없는 추방, 목적론적인 역사의 파열, 수렴하면서 방해하는 일군의 시간성들로의 개방으로 재고되어야 한다”(233쪽)고 우리를 설득한다. 말하자면 구원은 특정한 정체성에 따라 국가를 세우고 이질적인 것을 몰아내 단수의 시간을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유랑하면서 복수의 시간을 살아내는 것이다."(알라딘 책 소개)
그러니까 버틀러가 벤야민의 역사철학테제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1940)을 경유해 말하고 싶은 구원, 즉 메시아적 사유는
유대민족의 천년왕국에 대한 국가적 구원의 꿈과 연결되는 것이라기 보다는,
추방의 기억을 통해 지금 억압과 단절할 때, 섬광처럼 메시아적 구원의 가능성이 열린다는 것이에요.
박완서의 전쟁 다시 쓰기를 이런 이론적 자원을 통해 해석할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통찰을 얻을 수 있을까요?
누가 도전해보실래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