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듦대중지성_시즌3] <각자도사 사회>(2) 공지
자갈
2026-09-19 18:29
21
1부에서 질병과 노화로 취약한 개인들을 '각자도사'로 내모는 제도적, 의료적 허점을 짚어, 현재 죽음과 관련된 논란들이 법적, 윤리적 담론이 아니라 사회적, 정치적으로 논의되어야 함을 주장한 저자는 2부에서는 죽음과 관련되어 있는 사회 곳곳의 영역과 담론에서 불평등과 배제를 날카롭게 지적 합니다.
저는 저자의 지적에 그 동안 무심코 지나쳤던 죽음의 불평등에 대해 깨우치는 계기가 되었는데요,
여러분은 어떻게들 읽으셨는지 궁금합니다.
모두가 존엄한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어떤 상상이 필요할 지 폭넓게 얘기 나누어보고 싶습니다.
월요일 9시까지 댓글로 메모 올리는 거 잊지 마시고,
화요일 8시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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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듦대중지성_시즌3] <각자도사 사회>(2) 공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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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웰다잉
제대로 죽어야 한다는 다그침 - 언론에 처음 등장한 웰다잉은 이른바 성공학이나 처세술 따위의 자기계발 담론과 궤를 같이 하는 말이었다. (211)
웰다잉 담론은 좋은 죽음을 맞이하기 '능동적인 죽음 준비 과정'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쉽게 말해 조금이라도 젊고 건강할 때 미리미리 죽음을 준비해야 된다는 것이다. (213)
웰다잉이 저출산, 고령화에 붙은 경우다. ... ... 주목할 점은 그러한 담론 속에서 죽음이 '생애 설계'의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웰다잉이란 틀에서 사람들은 마치 재무설계를 하듯이 죽음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고, 계획을 수립하고, 필요한 자원을 계산하고, 가족과 상의하고, 전문가의 도움을 받으면서 불확실한 미래(죽음)을 준비한다. 죽음은 삶의 중요한 목표가 되고, 사람들은 목표 달성을 위해 일상(몸, 태도, 시간, 자산, 인간관계 등)을 관리한다. (214-215)
웰다잉의 주체는 건강하고, 독립적이고, 자율적이고, 윤리적인 존재로 상상된다. 자기결정권을 무리없이 행사하고, 올바른 생활 습관을 유지하고, 원만한 대인관계도 유지하는 이른바 '좋은 삶을 사는 사람'으로 그려진다. 그 구도에서 나쁜 죽음은 나쁜 삶의 결과로 보인다. ... .... 즉 좋은 죽음을 위해 노력하지 않는 개인을 질타하고, 질병과 돌봄을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기 쉬워진다. (215-216)
이 책을 읽기 전 웰다잉 주제에 관심을 갖고 다양한 공부와 실습(?)도 해보았던 터라 저자의 문제제기와 인사이트에 많이 놀랐고 새로운 인식전환의 계기가 되었다. 잘 죽으려면(목표) 잘 살아야 한다(수행과제)며 열심히 자기계발에 힘써왔으며 생애설계의 마지막 장으로서 손색이 없도록 하기 위해 애써왔던 것이다. 운동도 자산관리도. 노후대비도, 건강관리와 연명의료의향서 등을 차곡차곡 준비하며 '잘 죽어야 한다고' 여전히 다그치고 있었던 것이다. 평생을 참 열심히 살고 스스로에게 엄격하게 성실히 살라고 '다그치며' 살아왔는데 죽는 거 까지 잘 죽어야 한다고 다그치고 있는 꼴이라니...
좋은 죽음은 좋은 사회에 대한 고민과 분리될 수 없다는 저자의 말처럼, 연명의료의 문제든, 정의로운 돌봄이든 개인이 아무리 애를 쓰고 성실히 노력한들 시민의 문제로, 정치의 문제로 함께 해결하고 새로운 언어와 상상력을 발명하지 않으면 결국 '각자도사'의 길로 내달을 수 밖에 없음을 다시 한번 깨닫고 현타(!)가 오는 중이다. 고백하자면, 심지어 나는 올해 상반기에 스몰엔딩 관련 <채비플래너> 과정을 이수하고 내친김에 내년에는 “웰다잉지도사”를 공부해볼까 생각중이었다.
2. 제사와 명절 차례를 갑자기 그만 두게 된 이야기
1년전 8월 혼자 계시던 시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 해 추석명절부터 시작해서 명절에 시가 식구들이 모이지 않게 되었다. 시어머니 돌아가시고 난 첫번째 시아버지 제사도 따로 모여 지내지 않고 남편은 자신의 형제들끼리 간단히 기일 전 주말에 모여 납골당에 간단히 인사하고 인근 식당에서 함께 밥을 먹고 왔다. 돌아가시기 전에도 90이 넘는 노구로 힘겹게 제사와 차례 음식 준비로 몸살을 앓던 시모와 며느리들의 울화와 불만 가득한 불편하고 차가운 공기를 명절내내 견디며 억지로 형식적으로 겨우겨우 껍데기만 명절이었던 그 시간과 습속들이 시어머니의 부재로 놀랍게도 어떤 사전 의논이나 협의도 없이 일거에 중단이 되어버렸다. 나와 손위동서는 명절이면 각자의 친정으로 친정가족들과 함께 지내게 되었다. 남자 중심이 명절문화가 얼마나 허망하고 실체가 없었던 것인가? 이제 내가 부모세대가 되어 내 자녀들과의 명절문화는 또 어떻게 새롭게 상상하고 만들어 나갈까? 그게 이젠 더 중요하다. 일단 이번 추석에 나는 큰아이가 좋아하는 만두(송편 아님)를 함께 만들며 수다를 떨고 둘째가 좋아하는 삼겹살을 준비해야지. 그리고 성묘를 지낸 후 사촌언니와 함께 고창 선운사로 상사화를 보러갔다 올 것이다. 잘 쉬다 와야지.
p.159
이처럼 갈 데가 없었던 노인들은 길에서 쓰러진 이후 줄곧 '생명보호'를 받는다. 국가는 평소에는 이들 삶의 조건에 무심하지만, 생명이 위험할 때는 결국 관여한다. 문제는 무연고 노인의 몸을 둘러싼 선언적 가치와 일상적 실천의 괴리다. 요양원에서 무연고 노인들의 '생물학적 생명'은 법적으로 철저한 보호를 받지만, 이들의 '서사적 삶' 은 시설의 관리체계 속에서 탈각된다.
즉 입소자들 생의 끝자락과 죽음은 인간적 존엄성이 증발하고 법적 틀거지만 남아 있는 형국이다.
1. 불평등한 삶과 불평등한 죽음
노인복지관 사회복지사로 근무하다 보니 나의 일상에서는 쉽게 보지 못했던 불평등한 삶과 죽음을 가까이에서 마주하는 일이 많아졌다. 위 문장을 읽으며 사례관리를 담당했던 한 어르신이 떠올랐다.
장례를 치러줄 가족이 있으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대부분 주민센터를 통해 20년 전 단절된 배우자와 자녀들에게 연락해도 “오래전부터 단절된 남이니, 사망 후에는 알아서 처리해 달라”는 답변이 전부였다.
무연고자의 삶은 불평등한 조건으로 가득하다. 도움받을 곳이 없다며 공공기관이나 이웃, 봉사자에게 자신의 불쌍한 처지를 호소해야 하고, 복지 서비스를 이용하기 위해서는 매번 자신의 가난함을 증명하듯 수급자 증명서 등의 서류를 제출해야 한다.
불평등한 죽음은 불평등한 삶의 연장선에 있다. 장례도 마찬가지다. 무연고자가 사망하면 대부분 사회복지사, 생활지원사, 주변 이웃 등에 의해 발견되고, 사망신고 후 국가가 마련한 무연고자 장례 절차를 거쳐 시신은 처리된다.
형식상으로는 장례이지만, 주변의 지인들이 초대되거나 한 사람의 마지막 삶을 기억하고 애도하는 시간은 턱없이 부족하다.
무연고자의 삶과 죽음에는 그가 살아온 서사적 삶을 기리는 시간이 충분히 주어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법적 보호자가 없더라도 당사자의 친구, 친하게 지내던 고시원 사장님, 매일 안부를 묻고 농담을 주고받았던 사회복지사처럼 그 사람을 기억하고 애도할 수 있는 주변 사람들이 모여 그의 삶과 죽음을 충분히 애도할 수 있다면 어떨까?
3. 좋은 죽음, 좋은 돌봄이 이루어지는 사회는 어떤 곳일까?
이 질문을 듣고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가 떠올랐다.
영화에서는 목수 다니엘이 심장질환으로 일을 하지 못하게 되면서 정부의 질병수당을 받기 위해 복잡한 행정 절차를 겪는 이야기가 나온다. 20세기에 만들어진 복지제도는 인간의 최소한의 존엄을 보장하기 위한 도구였지만, 막상 소외된 사람들에게는 복잡한 행정 절차와 까다로운 심사를 통해 자신의 가난함과 어려움을 끊임없이 증명하게 만드는 제도로 전락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 장면에서 다니엘의 장례식에 이런 말이 나온다.
“나는 개가 아니라 인간입니다. 이에 나는 내 권리를 요구합니다. 인간적 존중을 요구합니다. 나는 시민입니다.”
나는 이 문장이 좋은 돌봄의 힌트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존엄은 존중에서 시작되고, 존중은 각자의 고유성을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한 개인의 삶을 단편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살아온 삶의 맥락과 관계, 경험을 총체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필요하다.
일상에서 충분히 대화를 나누고 관계를 형성할 수 있도록, 일방적으로 돌봄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돌봄을 주고받는 기쁨을 나눌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더 이상 돌봄을 받는 사람이 미안함과 죄책감을 느끼기보다는, 함께하는 기쁨을 나눌 수 있도록 사회적 돌봄망이 구축되어야 한다.
한 사람의 삶이 의미 있고 만족스러웠다면, 법적 보호자가 아니더라도 그 사람의 삶을 기억하고 추모하며 함께했던 시간을 애도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어떨까.
그런 관계와 기억이 쌓여 있다면, 우리는 좋은 죽음에 조금 더 가까워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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