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망3 후기] 未忘 迷妄 彌望
박완서 작가의 작품 중 가장 긴 소설이라는 『미망』 세미나를 마쳤다. 제3권은 일제강점기 말기부터 해방 이후까지의 극심한 혼란기에 몰아닥친 풍파와 격변 속에서 삶을 이어가는 등장인물들을 그린다.
이 책을 시작했을 때 미망이 무슨 의미일지 궁금했다. 한자에 따라 미망의 뜻은 달라진다. (아래:네이버 어학사전)
- 未忘 잊으려 해도 잊을 수가 없음.
- 迷妄 세상의 형편이나 실정을 잘 몰라서 혼란스러운 것. 또는 그런 상태
- 彌望 멀리 넓게 바라봄. 또는 멀고 넓은 조망(眺望)
책을 읽어나가며 웬지 '잊을 수 없음, 잊지 못함, 잊어서는 안 될 것(未忘)'에 대해 작가가 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3권까지 다 읽어도 그 未忘이 무엇인지 정리가 잘 안 됐다. 그래도 다행히 세미나를 하면서 未忘의 의미도 가늠해볼 수 있었을 뿐 아니라, 미망은 迷妄이기도 彌望이기도 하겠구나 어렴풋이 짐작하게 되었다.
지난 세미나의 첫 번째 논의는 인삼이 『미망』에서 무엇을 상징하는가였다.
인삼은 전처만에서 태임으로, 다시 태남과 경국으로 이어지면서 한 집안의 생업이자 삶의 방식, 그리고 다음 세대로 무엇인가를 물려주는 매개가 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그것을 둘러싼 사람들의 삶까지 같은 모습으로 반복되는 것은 아니다. 전처만에게 인삼은 자신의 힘으로 삶을 일구는 상업적 자립의 기반이었다면, 태임에게는 할아버지 전처만의 유산을 이어받고 자신의 노동과 삶의 의미로 구체화하는 매개가 된다. 태남에게 인삼(삼농)은 독립운동 경험 이후에 삶을 다시 세우고 시간을 견디는 과정이다. 그의 아들 경국에게 이르면 인삼은 부모세대와는 다른 시대와 공간에서 전통을 이으며 삶의 기반을 만들어갈 가능성이 된다. 경국이 묘삼을 훔쳐가는 장면은 단순한 농사의 계승이 아니라, 한 시대의 삶의 방식이 새로운 조건 속에서 변형되어 이어지는 모습으로 해석됐다.
인삼은 심고 나서 6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정성을 들이며 기다려야 하는 작물이라는 점에도 주목했다. 격변과 혼란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삶은 그렇게 단번에 결실을 보여주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을 정성껏 살아내면서,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을 견디고 기다리는 것. 당장의 결과에 머물지 않고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을 내다보는 인삼의 시간은, 彌望(멀리 넓게 바라봄)의 의미를 떠올리게 한다.
태임-종상 부부의 자식 세대를 통해 나눈 세대 차이에 대한 이야기도 뜨거웠다. 갑신정변, 갑오개혁 등 조선을 개혁하(려)는 격랑 속에서 살아온 태임과 종상, 반면 일제강점기에서 자란 그들의 자식(여란, 경우) 세대가 많이 다른 건 어쩌면 당연하다. 태임과 종상의 시대는 상업·윤리·나라의 일이 분리되지 않았지만 일제에 의해 도입된 근대적 제도 안에서 성장한 여란과 경우 세대는 경제와 정치를 분리해 사고했다. 그 변화가 대의명분보다 개인주의·실리주의로 가치의 축이 이동하는 것으로 보였다.
여란을 통해 박완서 작가의 현대배경 소설 속에 나타난 주인공(여성)들의 속물성을 보았다는 지적도 흥미로웠다. 조만간 박완서 소설들을 통해 본 속물성에 대한 계보학적 탐구가 나오지 않을까 기대하게 했다.^^ 반면, 여란을 ‘속물’이 아니라 ‘현실주의자’로 보고 싶다는 의견도 나왔다. 간도에서 자신이 꿈꿔온 이상에 대한 좌절을 맛보고 현실에 순응하는 방향으로 자리 잡았다는 것. 다만, 여란이 속물적 주부로 수렴되고, 혜정이 간도에 남아 자기 소임을 찾는 대비 속에서 박완서 작가의 애정이 어느 쪽으로 기우는지도 드러난다는 점도 짚어졌다.
경우는 일제 수탈이 극에 달할 때 자기 아래(샛골)로 모여드는 사람들을 책임지기 위해 고무공장을 군수물자를 조달하는 공장으로 바꾼다. 그런 공장에서 일하면 징병에 끌려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곧 해방이 되고, 성난 사람(이웃)들에 의해 공장과 서해랑은 부서진다. 군수물자 생산 공장으로 탈바꿈시킨 경우에게 친일의 딱지를 붙이는 게 마땅한지에 대한 답은 선뜻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그러한 경우의 행동은 迷妄(세상의 형편이나 실정을 잘 몰라서 혼란스러운 것. 또는 그런 상태)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비단 경우뿐일까. 여란을 비롯한 많은 인물들을 그렇게 볼 수 있지 않을까. 이 시절의 인물에 대한 평가는 쉽지 않았다. 일제가 가져온 근대적 제도와 변화가 사람들의 삶을 어떻게 바꾸어 놓았는지를 함께 보아야 했기 때문이다.
『미망』을 읽으며 친일과 반일의 잣대를 가지고 단선적으로 인식해왔던 당시의 삶을 조금 더 입체적이고 생생하게 바라보게 되었다. 승재와 같은 인물을 빼면 그 누구에게도 “너는 왜 친일적으로 살아왔느냐”는 단죄를 자신있게 내릴 수가 없었다. 또한, 그들이 했을 고민과 선택 역시 개인이 처한 시대 속에서 한계를 지닐 수 밖에 없다는 점에서, 지금을 살아가는 나(와 동시대인들)의 고민과 선택과도 연결해 볼 수 있었다. 그래서 더더욱 쉽게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 오래 머물게 했다. 그런 면에서 이 소설은 내게도 오래도록 잊지 못할, 잊어서도 안 될 미망(未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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