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듦대중지성_시즌2] <짐을 끄는 짐승들> 2회 공지
<짐을 끄는 짐승들> 2회차 세미나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사상가는 피터 싱어입니다.
<동물해방>(1975)이라는 책을 써서 '동물에 대한 잔혹행위 금지'의 범세계적 운동의 단초를 제공했다고 평가받는 학자입니다.

피터싱어는 공리주의 원칙을 바탕으로 '모든 생명은 고통받지 않을 자유가 있다'고 전제하면서 "회복의 여지가 없으며 생의 고통에서 헤어날 수 없을 것이 명백한 치명적 장애 영아의 경우 부모 동의에 의한 안락사도 도덕적으로 옳을 수 있다." 고 주장해서 논란의 여지를 남기기도 했습니다.
수나우라 테일러는 어린 시절 자신의 우상이었던 피터 싱어가 장애 운동판에서 거부당하는 것을 보면서 처음에는 당황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주장에서 드러나는 문제점을 인식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번 주 세미나에서는 피터 싱어와의 대담에서 그의 질문에 수나우라의 대답이 의미하는 것에 대한 내용도 실려있습니다. 지난 세미나에서 수나우라의 주장이 거듭 반복되고 있어서 조금 지루했다는 의견도 있었습니다만, 이번 주 세미나 내용을 읽으면서 수나우라가 지적하고 있는 장애에 대한 편견이 얼마나 뿌리박혀 있는지 새삼 느껴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수나우라가 쓰고 또 쓰고 거듭 반복해도 그 거대한 뿌리를 다 드러낼 수 없다고 여기는 절박함이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더불어 동물해방과 장애 해방이 연결될 수밖에 없는 지점을 설득하기 위해 다양한 자료들을 모으고 분석하는 그 열정도 함께 느껴졌습니다. 장애 운동 내부에서도 동물권에 대한 감수성이 미약한 지점까지 엄중히 비판하는 것도 포함해서 입니다.
이번 주 세미나에서는 동물해방을 둘러싼 주장들이 장애에 대한 개념을 어떻게 더 공고히 하는지 수나우라의 비판을 통해 함께 정리해 봅시다.
덧붙이는 영상은 주디스 버틀러와 수나우라 테일러가 산책을 하며 대화하는 장면입니다.
젠더와 장애의 경계에서 나누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시면 이번 주 세미나에서 할 이야기가 좀 더 풍성해질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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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듦대중지성_시즌2] <짐을 끄는 짐승들> 2회 공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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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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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을 끄는 짐승들> 1회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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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듦대중지성_시즌2] 1회 <짐을 끄는 짐승들> (1) 공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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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봄,동기화,자유> 2회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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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듦대중지성_시즌2] 2회 <돌봄, 동기화, 자유> (2) 공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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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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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지성 시즌2> 특강_각자도생을 넘어 시민적 돌봄으로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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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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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봄, 동기화, 자유> 1회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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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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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듦대중지성_시즌2-1회 <돌봄, 동기화, 자유> 1회 공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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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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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나이듦 대중지성 시즌1을 마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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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듦 대중지성 1분기 미니 에세이데이 공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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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듦 대중지성 [죽음을 배우는 시간] 2회차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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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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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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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배우는 시간] 2회차 공지
자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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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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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갈 | 2026.05.10 | 109 |
작가는 싱어와의 질문-응답 시간. 장애를 치료할 수 있는 불과 2달러짜리 알약을 쓰지 않겠다고 단호히 답한다. 왜 그런 선택을 하는지 묻는 싱어에게 수나우라는 말한다.
" 저는 예술가에요. 그래서 창조성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됩니다. 장애는 이 세계와 소통하는 완전히 새로운 방법을 알려줍니다. ...." (236쪽)
수나우라는 장애인 무용수이자 예술가, 시인인 닐 마커스의 " 장애는 '용감한 고투'나 '역경과 마주하는 용기'같은 것이 아니다. 장애는 예술이다. 그것은 삶을 사는 독창적인 방식이다"는 말을 연이어 인용한다. 장애가 단순히 결핍이라는 생각에 저항하는 그의 말이 우리가 효율성, 진보, 자립, 이성을 반드시 중심에 두지는 않는 삶의 방식들에서 가치를 찾도록 촉구한다고 강조한다. (238쪽)
장애가 해방적일 수 도 있고, 신나는 일일 수도 있으며, 우리에게 '정상적이기'를 요구하는 사회의 지속적인 공세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자유의 장소일 수도 있다는 수나우라의 통찰이 놀랍고 또 놀랍다. (239) 이런 통찰이 바탕이 되어서야 장애는 우리가 왜, 어떻게 서로를 돌보는지, 우리가 어떤 사회에 살고 싶은지 생각해볼 수 있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상상할 수 있다는 그에게 동의한다.
티브이 예능프로에서 장애인 예술가인 '니얼굴 은혜씨'의 주인공 서(정)은혜씨의 모습을 본 적이 있다. 발달장애인인 배우자와의 행복한 결혼 생활을 꽁냥꽁냥 해 나가고 있는 가운데 그들을 전적으로 지원해주고 있는 은혜씨의 어머니 장차현실의 고민은 깊다. 그들이 결혼했고 당연히 성생활을 하고 임신도 가능한데 과연 아이를 낳고 키울수 있을까? 아이가 장애가 있다면, 비장애로 태어난다고 해도 그 아이를 키우는 몫은 또 장차현실의 차지가 되지 않을까? 이 부부의 결혼과 성생활, 임신, 출산, 육아... 이런 기본적이고 당연한 욕구와 판단, 책임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 건가? 부모인 장차현실의 고민과 걱정도, 당사자인 은혜-영남의 바램과 꿈도 모두 공감이 되었다.
장애가 해방이고 예술일 수 있다는 수나우라와 나이로는 이미 성인인 젋은 부부의 고민 사이가 너무 멀다. 이 간극을 어찌 바라보고 좁혀낼 수 있을까?
4부 14장 고기의 낭만화 - '우리는 다른 존재의 주체성을 인식하고, 공감을 경험하며, 윤리적 선택을 하도록 진화해온 동물이다. 만약 고기에 대한 욕망이 '인간 본성'의 일부라면, 우리가 사는 방식을 질문하고, 정의에 대해 생각하고, 도덕적 삶의 진전을 반영하기 위해 우리의 습관을 바꾸는 것 또한 '인간 본성'을 구성한다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
저자는 양심적 잡식가나 인도주의적 고기 운동의 한계를 비판하며, 인간이 고기를 먹어야 한다는 것이 전혀 '자연스러운' 게 아님을 강조 합니다. 저는 육식 자체가 문제라기 보다 생존을 넘어선 지나친 탐식이 문제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요. 테일러는 육식에 대해 뿌리 깊게 내린 인식의 전환을 요구합니다. 가축들이 사는 환경을 개선 한다고 해서 도살을 정당화 할 수 없는 것이고, 생산 단가만 높여 인간들의 경제 계급 간 더욱 복잡한 문제만 만들고 있는게 현실 입니다 개 식용이 사회적인 이슈로 대두되었을 때 개는 먹으면 안되고, 소와 돼지는 먹어도 되는 거냐? 라는 식의 반발이 있었지요. 급기야 식용견과 애완견을 분리하자는 주장까지 나왔었는데요, 별 의미 없이 소모적인 논쟁만 거듭되었던 걸 보면 결국 문제의 핵심은 우리가 먹기 위해 죽여도 되는 존재와 아닌 존재로 위계를 구분하는 것이라는 테일러의 혜안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 육식 동물의 내장과 이빨을 가진 판다가 대나무만 먹고 살아 가는 걸 보면 인간도 육식을 포기하는 게 전혀 본성의 문제는 아닐 것이고, 동물에게서 얻는 것이 아닌 대체 단백질도 가능한 사회에서 불가능한 건 아니겠지만.. 가축화 된 동물들의 고기 맛에 길들여진 인간들이 육식을 포기할 수 있을까? (나 부터도..) 에 대해서는 많이 회의적입니다. 그럼에도 육식에 대해 다시 생각하고 고기 반찬 앞에서 주춤거리게 되는 작은 시도들로 세상이 조금 씩 바뀌기를 소망해 볼 수는 있지 않을까요..
15장 고기:자연재해 - 동물 보호문제는 생태, 환경 이슈와 연결될 수 밖에 없습니다. 다른 존재들을 돌보고 보호하는 것이 결국 우리 자신을 구원하는 것입니다만, 당장 눈 앞의 이익에만 집중하고 환경 문제를 외면 하는게 현실입니다. 미국은 데이터 센터 건립을 둘러싸고 지역 환경 단체들이 강한 반대 운동을 하고 있다고는 하는데, '퇴보'를 용납하지 않는 사회 분위기 '환경'문제는 사치로 치부되고 있습니다. 파리 시민들은 40도가 넘는 폭염에 환경 문제로 에어컨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자부심을 버리고 있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높은 비용이 더 문제였겠지만요..) 우리는 AI 와 에어컨을 포기하고 다른 종들과의 공존을 선택할 수 있을 지 자문해 봅니다.
책을 읽기전에는 동물권과 장애인 인권을 전혀 다른 문제로 생각했었습니다.
책의 4부와 5부는 동물권과 장애인 인권, 이 둘이 '비정상과 정상', '생산성과 효율성'을 나누는 거대한 사회적 기준으로 단단히 얽혀 있다고 말합니다.
인간 중심적이고 비장애인 중심적인 세상이 어떻게 동물과 장애인을 동시에 소외시키는지 일상의 사례를 들어 생각해 보았습니다.
4부: '언어와 규정' — 정상의 기준은 누가 정하는가?
우리는 마트 신선식품 코너에 가면 다리가 하나 없거나 모양이 기형적인 닭고기는 팔지 않습니다. 상품 가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한편, 마트 통로에서 뇌병변 장애인이 몸을 떨거나 비장애인과 다르게 걸으면 사람들은 쳐다보거나 피합니다.사회는 동물에게도, 인간에게도 '정상적인 신체와 행동'을 규정하고 강요합니다.
이 기준을 벗어나면 동물은 '처분 대상'이 되고, 장애인은 '치료나 격리의 대상'이 됩니다."저 동물은 쓸모없어", "저 사람은 온전하지 못해"라는 말 뒤에는, 자본주의가 원하는 '매끄럽고 생산성 있는 신체'만을 정상으로 보려는 인간의 오만이 깔려 있습니다.
5부: '의존과 돌봄' — 자립이라는 거대한 착각. 안내견과 시각장애인의 출근길의 예를 들어봅니다
아침 지하철역, 유튜버와 안내견이 함께 걸어갑니다. 사람들은 안내견을 보며 "기특하다", "인간을 위해 희생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지하철 엘리베이터가 고장 나거나 안내견 거부 식당을 마주할 때, 이 둘은 동시에 거대한 장벽에 부딪힙니다.
우리 사회는 스스로 모든 걸 할 수 있는 '독립적인 인간'만을 완벽한 존재로 칭송합니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의존하는 장애인을 동정하거나, 인간에게 봉사하는 동물의 효율성만 따집니다.
하지만 안내견과 시각장애인의 관계는 일방적인 희생이 아닌 '서로를 돌보는 상호의존'입니다. 사실 비장애인 인간도 농부, 청소노동자, 그리고 자연 생태계에 전적으로 의존하며 살아갑니다. '독립된 완벽한 인간'이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착각입니다.우리가 흔히 쓰는 "짐승 같다"는 말은 누군가를 비하할 때 쓰입니다. 동물과 장애인을 '덜 인간적인 존재'로 묶어 차별해 온 역사 때문입니다.
진정한 해방은 장애인을 비장애인처럼 만들어 주거나, 동물을 인간처럼 대접하는 데서 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답다, 정상이다"라고 짜인 좁은 틀 자체를 부수고, 서로 의존하며 살아가는 모든 신체(인간과 동물 모두)의 가치를 인정할 때 비로소 시작된다고 생각합니다.
장애해방과 동물해방은 긴밀히 연결되어 있음을 주장하는 수나우라 테일러는 ‘원숭이처럼 걷는 아이’였던 자신의 유년 경험을 제일 먼저 진술하며 ‘나는 동물이다’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다. 그리고 이어서 ‘동물해방’ 책을 펴낸 피터 싱어, ‘프릭’으로 산다는 것에 대한 레이첼 애덤스의 주장, ‘불구의 시간’이라는 개념을 오랫동안 이론화해온 장애학 연구자와 운동가들, “장애는 용감한 고투나 역경과 마주하는 용기 같은 것이 아니다. 장애는 예술이다. 그것은 삶을 사는 독창적인 방식이다”라고 말한 장애인 무용수이자 예술가이며 시인인 닐 마크스의 주장 등을 통해 다양한 입장들과 각 이론이 가지는 장·단점들을 소개하면서 ‘우리는 모두 동물이다’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고 있다.
이처럼 장애는 단순히 좋거나 나쁜 것으로 치부하기에는 너무나 복잡하다. 하지만 장애를 만들어내는 산업과 구조적 불평등에 대해 판단하는 일은 그보다 훨씬 쉽다고 피력하면서 작가 자신을 포함해 우리 모두가 함께 스스로 해결책을 찾아갈 수 있도록, 실마리를 제공하는 여러 질문들을 던진다. (단편적 사고가 아닌 넓은 시야에서 질문을 확장해 가고 있음)
-동물임을 자처하는 것이 인간에 대한 폄하가 아니라 동물화와 종차별주의의 폭력에 저항하는 방식일 수도 있다면 어떨까? 즉, 동물해방이 우리 자신의 해방과 얽혀있음을 인식하는 방식이라면?
-비인간 동물과 부정적인 방식으로 비교당한 우리가 어떻게 인간의 우월성을 암시하거나 우리 자신의 동물성을 부인하지 않으면서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확고히 할 수 있을까?
-동물을 장애와 결부시켜 고찰하는 것이 여전히 비하적인 함의로만 남을 것인가? 아니면 우리가 그것을 풍부하고 생산적으로, 그리고 통찰력이 돋보이도록 만들 수 있을까?
-동물이라는 단어를 주장할 수 있으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내가 썼듯이 동물이 불구일 수 있다면 불구는 동물일 수 있을까?
-수술을 받지 않았다면 내 몸은 더 자연스러웠을까? 애초에 자연스럽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나의 자연스러운 몸이란 무엇인가? 어디에 있는가? 그런 몸이 있었다면 어느 시점에 가졌던 걸까?
-내 판단의 근거로 작용하는 이 ‘자연’이란 무엇인가? 나는 그것을 어떻게 정의했는가?
-어떻게 우리는 장애를 유발하는 시스템을 비판하면서 동시에 장애인들이 스스로 힘을 북돋는 방식으로 자기 몸을 경험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을까? 최소한 억압과 차별, 비장애 신체의 세계에 의해 규정되지 않는 방식으로 자기 몸을 경험할 수 있도록 할 수 없을까?
-우리는 어떻게 온갖 종류의 신체들, 즉 식물과 동물, 유기물과 비유기물, 비인간과 인간의 몸들을 개조하고 훼손하는 불의를 목격하고 명명하고 저항할 수 있을까? 장애를 불의와 동일시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비장애인들이 휠체어와 배뇨관, 용변보조, 감소된 지적능력, 일반적인 자립성 결핍 등에 대해 말할 때, 그들의 말은 상상에 기초한 것이지 직접 체험한 것이 아니다. 장애인의 삶이 비장애인보다 덜 만족스럽고 덜 즐겁다고 주장하는 것은 문제적인 비약이다. 중요한 점은 우리가 이런 주제들을 충분히 신중하게, 개개인에게 주의를 기울이며 검토해야 한다는 것이다. 몇몇 가정, 고정관념, 편견이 우리의 입장을 떠받치고 있다는 점은 유념해야 한다.
또한 ‘돌봄’ 주제와 관련해 작가의 경험에 입각한 내용은 돌봄을 주고받는 자로서 앞으로 내가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지 매우 도움이 되는 내용이었다: (P. 244) 도움이 불편했던 건 다음과 같은 경우를 겪을 때였다.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어색해 하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 다른 사람에게 부담을 준다는 것을 느꼈을 때, 또한 나 스스로 그런 도움이 결코 자립할 수 없고, 집에서 떠나지 못하고, 파트너도 갖지 못하게 될 나의 처지를 뜻한다고 (잘못) 생각했을 때, 내 경험에서 드러나듯, 자주 문제가 되는 것은 (장애인이) 짐이 되고 도움이 필요한 존재라는 낙인 자체다. 돌봄을 제공할 사람을 선택할 수 있고 당황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확신이 있다면, 그런 내밀한 돌봄은 삶의 질에 훨씬 더 다채로운 영향을 미칠 것이다.
* 주디스 버틀러와 수나우라 테일러의 산책길 영상: 우선 카페나 조용한 장소가 아니라 일반 사람들과 차들이 다니는 도로변에서 함께 산책하며 이야기를 주고받는 모습이 매우 자연스럽고 어색하지 않아 신선했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도 전혀 이상하게 보거나 특별한 관심을 갖지 않는 일상적인 모습이었다. 함께 걷는 주디스 버틀러 역시 테일러에게 관심을 보이며 지나치게 돕고자 하지 않았고, 중간에 옷을 사서 입어 볼 때도 작가가 도움을 요청하는 만큼만 개입하는 점 등이 보기 좋았다. 그리고 수나우라 테일러 역시 옷가게 점원에게 돈을 지불하고 잔돈을 받을 때에도 자신이 동전을 먼저 받으면 못 받기에 지폐부터 먼저 달라고 부끄러워하지 않으면서 당당하게 요청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오전 내 <짐을 끄는 짐승들>을 읽다가 집을 나서려는 참이었다. 현관에서 몸을 구부려 운동화를 신고 가방을 들고 나서는 지금은 당연한 일거수일투족을 타인에게 의존해야 한다면? 유독 남에게 도움을 청하지 못하고, 힘듦을 표현하지 못하는 내게, 후일 그런 순간이 온다면 쉽지 않겠구나 하는 생각이 밀려들었다. 멀쩡하고 적절해 보이는 것, 약함을 드러내지 못하는 것은 내 안에 엄격한 기준을 가지고 스스로를 방어하려는 기제였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러한 행동이 나를 단단히 홀로 서게 하기 보다, 의지심을 더 키우는 방식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는 자꾸 푼수같이 스스로를 드러내고, 손을 내미는 연습을 해보지만 아직 어렵다. 돌봄을 받는 몸을 상상하기는 더 어렵다.
“장애는 이 세계와 소통하는 완전히 새로운 방법을 알려줍니다 (p. 236)”
이 책을 읽어 나갈수록 점점 더 그렇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분 자체가 가능하지 않은 “정상성”이라는 틀에 갇혀서 세상과, 사람과, 커뮤니티와 연결되는 길을 자꾸 가려버리게 되는 자동반사를 수나우라는 끈질기게 두드리고, 깨고, 부수어 나간다.
“장애학 연구자 로버트 맥루어는 도발적인 질문을 던진다. “자신이 겪을 장애를 환영하고 그것을 욕망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수 있는가?” 이러한 정서는 우리가 공간 안에서 움직이고 시간 속에서 존재하는 대안적인 방식들에 깃든 관능성, 예측불가능성 그리고 아름다운 잠재력을 보도록 자극한다. 장애는 해방적일수도 있고, 신나는 일일수도 있으며, 또한 우리에게 “정상적이기”를 요구하는 사회의 지속적인 공세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자유의 장소일 수도 있다 (p. 238~239)”
이 말은 얼마나 새롭고 고무적인지!
살면서 몸과 마음에 일어나는 크고 작은 불능을 경험할 때면 어떨 때는 꺾이고 물러서는 마음이 들었고, 다른 때에는 치료,혹은 극복해 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둘다 정상이라는 불가능한 잣대를 중심에 두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하지 못하는 거였구나, 때로는 폭력적이기도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주디스 버틀러와의 산책에서 말했듯이, 장애의 몸은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질병과 기능의 저하와 의존성을 일깨워준다. 유일하게 자연스러운 사실은 우리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 반면 장애 커뮤니티는 상호의존이 상호 이익에 대한 계산이 아니라는 것을 오래 전부터 인식했다. 장애가 상호의존을 바라보는 관점에 따르면, 우리 모두 취약한 존재다. 즉 우리 모두 삶의 과정에서 의존적일 때와 그렇지 않은 때가 있고 (생각보다 훨씬 많이, 동시에) 돌봄을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하는 그런 존재로 인식된다. 이처럼 장애는 인도적 고기를 둘러싼 논의에 꼭 필요한 분석, 즉 취약한 존재들을 책임진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에 대한 분석을 제공한다. (p.292)”
수나우라는 싱어를 만나 ‘장애가 사회에 미치는 긍정적인 효과가 하나라도 있다고 생각하는가’를 질문했지만
싱어는 수나우라에게 의미있는 대답대신, ‘2달러에 부작용도 전혀없는 치료약을 먹지 않겠다는 말인가요?’라고 되묻는다.
싱어는 고통을 줄이고 행복을 늘리려는 공리주의적 입장에서 장애를 바라보기에
장애는 당연히 좋지 않은 상황이고 그것을 벗어나기 위한 방법이 있다면 취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쪽이다.
하지만 수나우라는 ‘장애가 없는 삶 혹은 상태가 더 나은 삶이라고 볼 수 있는가’를 질문한다.
그녀의 입장에서 장애는 결핍이 아니라 하나의 독창적인 삶의 형태일 뿐이기 때문이다.(장애는 용감한 고투나, 역경과 마주하는 용기 같은 것이 아니다… 장애는 예술이다. 그것은 삶을 사는 독창적인 방식이다, 닐 마커스, 238)
수나우라는 장애가 세상을 바라보는 다른 관점을 제공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사회적 차별이 심하고 돌봄과 지원이 부족한 우리 현실에서는, 그 '다른 관점'이 삶의 가능성으로 이어지기보다 오히려 고립과 고통으로 귀결되는 경우도 많다. 그렇다면 수나우라가 말하는 장애의 긍정성은 과연 어떤 경우에 존재하는 것인가?
새로운 고기운동의 상호의존 이론은 여전히 의존적인 것을 희생시켜 독립적인 것에 가치를 부여하고, 취약한 것을 희생시켜 더 강한 것에 가치를 부여한다. 반면 장애 커뮤니티는 상호의존이 상호 이익에 대한 계산이 아니라는 것을 오래전부터 인식했다. 장애가 상호의존을 바라보는 관점에 따르면 우리는 모두 취약한 존재다…. 케이퍼는 이렇게 쓴다. “자연에 대한 여러 시각은 흔히 이상화되고 탈정치화된 환상 자체다, 장애는 이런 환상의 한계를 가리키는 데 반드시 필요하다.” (292)
책에서 찾아본다면 이 부분이 긍정성에 대한 하나의 답이 되는 것 같다.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에서의 질적인 변화를 의미하는 것으로 말이다.
그것은 힘, 자율/자립, 생산성 대신 우리의 취약성, 상호의존, 돌봄에 더 큰 가치를 부여하는 것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