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만과 몽상2 후기] 영자의 오만과 몽상

도레미
2026-06-21 13:29
61

요즘 여성들의 이상형 중에 ‘자없남’이라는 게 있다. ‘자아 없는 남자’의 줄임말인데, 대체로 남의 의견을 수용하고 자기만의 세계를 고집하지 않으며 주변과 화합하는 성향을 뜻하는 유행어라고 한다. 박완서 작가의 소설에 등장하는 남자들이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어떤 기분일까? 그 기분까지 내가 알 바는 아니지만, 이런 시대에 박완서 소설을 읽는다는 것도 감정적으로 수월한 일은 아니다. 차라리 내가 젠지(z세대, 90년대 이후 출생한 세대)라면 생활사, 미시사를 다룬 역사책을 읽듯 거리두기가 가능했을지도 모르겠는데, 소설 속 시대를 거쳐 이제 늙지도 젊지도 않은 나이에 당도한 나로서는 그 거리를 유지하기가 쉽지 않다. 결국 『오만과 몽상』을 읽으며 평정심 유지를 위한 아슬아슬한 균형점을 찾는데 완전히 실패했다.

 

‘영자의 오만과 몽상은 무엇이었지?’ 소설의 말미에 접어들면서 문득 떠오른 그 생각이 시작이었다. 건성건성 넘겼던 책장을 되짚어 '영자의 오만과 몽상'이라고 할만한 구절들을 찾아헤맸다. 도무지 찾아지지가 않아 성혜에게까지 관심(?)을 넓혔다. 중산층으로 예상되는 집안에서 자라 대학을 나오고 직장을 다니는 여성이니 최소한 성혜는 그러한게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게 어떻게 드러났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어쩌면 나는 남녀평등주의자가 아니라 몽상가일 뿐인지도 모르겠어요. 배에는 그래도 꿈을 실을 수 있지만 맨발로 피 흘리며 확인할 수 있는 건 있는 그대로의 실재뿐이니까요.”(2권, 55쪽) 성혜는 현이와의 대화 중 ‘몽상가’라는 단어를 직접 언급한다. “여자도 사람이라는 것만 알아주길 바란다”는 성혜의 말과 “재봉틀 기름이 안 되고 싶다”는 영자의 말이 끔찍하게 닮았다고 현이는 생각한다. 그렇구나, 이것이 젊기에 누릴 수 있었던 영자의 오만과 몽상이었구나. 1부부터 ‘재봉틀 기름‘이 여러차례 나왔지만 설마 그런 것이 ‘오만과 몽상’에 속한다고 꿈엔들 상상이나 했겠나…

 

당시 여성들은, 특히 바닥계층 중에서도 바닥에 위치한 영자와 같은 여성들은 오만하고 몽상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담담하게 메모하고 싶었지만, 점점 화가 치밀었다. 빌어먹을 거리두기가 안 됐다. 소설이 쓰여진 1980년대에 나는 10대를 보냈다. 나의 아빠는 “여자가 돼 가지고…”라는 표현을 종종 하셨다. 요즘도 드물게 하신다. 그건 대체로 엄마와 말다툼하는 과정에서 튀어나왔지만, 이따금 내게도 하셨던 말이다. 당시에 그말을 듣게 되면 욱하고 올라오는 게 있었다. 그토록 시대착오적인 문구를 써먹는 아빠에게 짜증(화)났는데, 당신에겐 해가 아침에 뜨고 저녁에 지는 일처럼 한치도 틀림이 없는 말이었다. 90년대도 고리타분함을 완전히 벗은 때는 아니었다. 남(사)친들에게서 남자들이 품고 있는 여자에 대한 환상(?)과 기대를 듣곤 했다. 구체적으로 기억은 안 나지만, 여성을 구원자와 희생자 사이 그 어디메쯤 있어야 하는 존재로 생각하는 얘기들도 들었다.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인지… 황당하면서도 경우에 따라서는 내가 바로 그자에게 그런 여성이었으면 바라기도 했었다. 여과없이 지껄여진 그 찌질한 말들에 갈팡질팡하던 내가 떠오른 이후 ‘빡침’은 다스려지지 않았다.

 

세미나에서 영자를 젠더보다 인간의 덕(윤리생명력의 대표로 읽었으며, 그런 것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는 메시지로 해석했다는 의견이 기억에 남는다. 그렇게 볼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그 연장에서 본다면 《영자의 전성시대》나 《별들의 고향》 류의 영화들이 여성의 삶을 남성의 각성을 위한 촉매나 배경으로 소비한 반면, 박완서 작가는 적어도 영자를 인간 윤리의 담지자로 그려냈으니, 차이는 분명하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영자가 죽어야 했다는 사실, 두 남자 주인공이 그 죽음을 겪고서야 비로소 이전과는 다른 방향의 삶을 도모하게 되는 결말은 여전히 찜찜하다.

댓글 2
  • 2026-06-23 19:03

    지난 주 주간지 시사인에서 SF작가 김보영의 인터뷰를 읽었다. 김보영 작가는 퇴고하기 전에 박완서 소설을 읽는다고 한다. 박완서 작가가 한국에서 가장 문장을 잘 쓰는 사람 같고, 박완서 소설을 보면 이데아를 접하는 느낌이 들어 도움이 된다며, '일상의 사소한 일을 이렇게 긴장감 넘치게 쓰시다니, 굉장하다'고 덧붙였다. "이데아"라... 단순하게 읽는다면, 이 소설은 족보의 운명에 연연했던 철부지 두 청년이 산업 발달과 경제 성장 과정에서 겼는 성장 에피소드를 엮은 이야기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속에서 신화적인 대속과 에토스, 구조적인 계급과 경제적 혹은 성적 불평등, 허망한 성공신화, 조상의 굴레, 중산층의 허위 의식, 의료보험이나 행복촌과 같은 제도적 이슈에 대해 고민하며 이들에게 좋은 삶과 세상이 어떤 것이어야 했는지 생각해 볼 수 있었으니... 과연 이데아를 접하는 느낌이라 할 수도 있겠다.

    핏줄보다 부와 명예의 승계에 연연하는 부성, 역사적 죄값을 대속하는 의무감으로 자식마저 떼어놓은 모성, 사회 구조적인 문제를 인지하지 못하고 실체없는 족보에 사로잡힌 남상과 현, 그렇게 미련한 남성에 대한 무한한 헌신으로 생의 의미를 찾고자 하는 영자 모두, 현실에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비현실적이고 극단적인 인물들이었다. 그러나 이토록 극단적이지 않고 현실적이고 중립적인 인물들이 등장해서 우리 모두가 화내지 않고 충분히 이해할 수 이야기였다면... 그래서 그들의 균열을 통한 우리 사고의 균열이 없었다면... 이 독서는 무의미했겠다는 생각이 든다. 세미나에서 여러 번 언급했지만, 박완서 소설 속의 막장적(?) 인물들이 그래도 사람처럼 보이는 이유는, 그들이 윤리적인 고민으로 멈칫하고 고민하는 순간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간 읽은 박완서 소설 속 인물들은 한 번쯤 '이래도 되나?' 고민한다. 대개 말도 안되는 합리화로 결론을 내려 불행으로 치닫는 편이지만, 그래도 박완서가 창조한 인물들은 그런 짧은 고민마저 하지 않는 싸이코패스가 아니었다. 현과 남상이 영자의 죽음 앞에서 눈물을 쏟고 참회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완서 소설이 완독 후의 불유쾌함을 남기는 이유는 뭘까... 해피엔딩은 진부하고 비현실적이라는 진부한 이유 외에도, 그 불유쾌함이야말로 진실이기 때문이 아닐까. 유발하라리는 <넥서스>라는 책에서 어마어마한 정보와 데이터 속에서도 진리보다 허구의 이야기가 힘을 갖는 이유는, 진리를 밝히는 일이 너무 어렵고 고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박완서는 읽는 사람보다 더 고통스러운 과정을 통해서 '진실을 밝히는 허구'를 만들어내는, 그 어려운 일을 해낸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읽을 때마다 괴로워하면서, 점점 더 그의 소설에 빠져드는 것이 아닐까.

  • 2026-06-22 08:55

    세미나에서 나누었던 "성인식"이 떠오릅니다. (아마 카이에 소바주 시리즈에서 읽었던 것 같은데, 정확한지를 모르겠고요.) 남자들은 성인의 나이가 되면 멀리까지 일정한 코스를 완주해야만 성인이 될 수 있는데 여자들은 그런 성인식 의식이 필요 없었다는 점이요. 여자는 생명을 잉태할 수 있는 능력이 있고 살아가는 삶의 과정에서 저절로 성인이 된다는..."꼭 그걸 맛을 봐야" 아는 남자들만 성인식이 필요한 거라는. ㅎ 그런 점에서 더 많이 깨달은 사람이 더 많이 감내해야 하는 것인가? 이 점은 지금 사회에서도 적용되는 것 같아요. 왜 깽판 치고 막 행동하는 사람들, 무임승차하려는 사람들을 더 많이 깨달은, 더 많이 알고 있는, 더 많이 느끼는 사람들이 인내해야 할까? 이런 고민을 저는 꽤 오랫동안 해 왔어요. 하지만 별 수 없는 것도 같아요. 그들은 모르니까. 죽기 전까지 깨닫지 못하고, 알지 못하고, 느끼지 못할 수 있으니까. 당연히 죽기전에 살아서 깨닫고 알고 느끼는 사람들이 행동-희생할 수밖에 없다고요.
    그래서 화가 나고 열불이 나면서 소설을 읽지만, 실제로 영자같은 수많은 언니들의 희생이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니....감내하면서 읽고 있습니다. 저는 박완서 소설 읽기가 이젠 거의 수행의 단계에 진입한 것 같습니다. 외면하고 싶은 우리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주니까요. 그냥 소설 속 이야기라고 하기엔 현실 속 영자들은 더욱 더 처참하게 비참하게 죽어갔다는 걸 알기에 그냥 묵묵하게 읽겠습니다.

    바쁜 와중에 기차에서라도 후기를 쓰시는 지영샘 수고하셨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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