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날의 시작> 후기 - '그 여자'에 대해

이쿠바
2026-05-10 00:47
48

<살아있는 날의 시작>은 유독 소설을 읽을 때는 불편했고, 세미나가 끝나고는 자의식이 많이 올라왔었다. 헛다리 짚고 쓸데없이 내 이야기를 많이 했나? 싶어 부끄럽기도 했다.;; 또한, 대체로 세미나가 끝나면 다른 샘들의 말씀에 동의가 되는 부분이 많았는데... 이번 세미나는 유독 '나 혼자 딴생각하고 있나?'싶었다. 물론, 나 역시...

 

“70년대 초에 태어나 ‘그 여자’가 놓인 시대에 사회. 남녀의 일상적 차별, 직장생활로 아이 양육에 소홀히 하고 있다는 죄책감 사회 시스템 자체가 여성에서 열등감과 죄책감을 내재화하는 거대한 가스라이팅의 구조라는 후에 따라온 인식.(도레미샘)”,“가부장제 이데올로기가 구체적으로 가정이라는 일상적이면서도 사적인 공간에서 어떤 방식으로 재현되며, 여성 억압의 기제로서 구조화되고, 재생산되는지를 압축하여 보여주기로 작정한 소설인 것 같았다.(먼불빛샘)”

 

위 말씀들에 모두 동의하고 분노를 느꼈다. 그런데 나에게 청희는 딱 희생자로만 정의하기 어렵게 복잡한 캐릭터로 느껴졌었다.  나는 그 여자, 청희가 (가부장제 권력에 가스라이팅 당한)불쌍한 여자라기보단... 논쟁적인 여자로 읽혔다. 

소설의 초반부부터 청희에게 연민보단 존경심을 먼저 느꼈다. 빌런스런 남편(인철)까지 케어하며 시어머니(송여사)를 모진 수고와 고생으로 돌봄하면서도, 시어머니(송여사)에 대한 인간적인 애정을 놓지 않고 있다는 면에서.. 놀라웠다. 그래선지 웬만한 종교지도자보다 더 종교인 같이 영적인 사람으로까지 보였다. 마치 호피스피 병동에서 돌봄 노동을 하는 수녀님들을 보는 듯... 그래서 인철이 옥희를 통해 자기 “청춘을 복습”하며 이기적이고 덜 숙성된 인간성으로 비쳐지는 데 반해, 청희의 이런 돌봄 노동은 숭고하게 서술돼 있는 면이 있다고 보았다. (나는 이 지점에서 박완서 작가님이 여성의 돌봄 노동에 대해 혹 종교적인 의미를 두시거나 하는 게 아닌지 궁금증이 생겼었다.)

 

그래서인지 옥희(인철과의 사건, 난 옥희 자신은 '강간을 당했다는 걸' 아직 해석하지 못하고 있지만... 청희는 강간으로 그 사건을 보고 있다고 읽었다)에 대한 청희의 태도가 극단적으로 다르다고 느껴졌던 거 같다.  왜 그 여자의 영적일 만큼 숭고한 돌봄이, 가족 안에서만 작동했던 걸까.  나는 '그 사건을 겪고' 옥희도 돌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청희 역시 피해자일 수 있는 입장에서 어려운 일일테지만...

여기서 뭘 더 써보려 해도, 다시 말문이 막히는데... 나 역시 그 여자, 청희에게 너무 많은 걸 요구하고 있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쯤에서 혹 내가 청희를 꼬아서 보거나, 지나치게 영적으로 보고 있었나... 라는 의문도 든다. 고백하자면... 나는 '그 여자'에게 분노와 숭고함이나 안타까움 등을 느끼긴 했지만... 뜨거운 연대의 감정은 느끼지 못했다. 왜 그렇게 '그 여자'를 똑바로 못 볼까... 혹 내 안에 정상.중산층 가정이 되지 못 한다는 긴 무기력감이 있어, 필터링이라도 하고 있는 걸까. 아... 모르겠다. 어렵다! 

 

-

잘 정돈이 안 됐지만... 더 생각이 나아가지가 않아, 여기서 짧게 마칠게요. ;;  

그리고 이번 세미나가 끝나고 질문이 있었는데... 놓쳤어요. 

텍스트주의자라는 건 어떤 태도로, 어떻게 텍스트를 읽는 걸까요? 텍스트주의자가 되면... 괜찮은 오독을 할 수 있는 거겠죠? 

 

 

댓글 1
  • 2026-05-10 16:49

    저는 청희가 자신이 온 힘을 기울여 지켜왔던 ‘아내’의 자리를 ‘버릴 수’ 있었던 힘을 그녀가 자기 주도성을 발휘하여 미용실이나 미용학원을 경영했던 경험이나 대학을 나온 지식인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탁샘이 주디스 버틀러의 ‘수행성’개념을 말씀하셨어요. 청희의 ‘모반’을 ‘행위자‘가 아닌 ’행위‘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뭐 이런 말씀이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저는 ‘주디스 버틀러’는 이름만 알뿐이고, ‘수행성’이란 말을 처음 들었기 때문인지 계속 ‘주디스 버틀러’, ‘수행성’이 머리에서 맴돌았습니다. 해서 찾아보니

    주디스 버틀러의 수행성은 ‘젠더가 생물학적 본성이나 내면의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지속적인 행동과 언어적 실천을 통해 사후적으로 만들어지는 결과물’이라는 이론이었습니다.

    그리고

    ‘행위자가 아닌 행위가 주체를 만든다’ 는 말은 ‘여성’ 혹은 ‘남성’이라는 본질이 먼저 존재하고 그 본질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방식으로 걷고, 입고 말하는 반복적인 행위들이 쌓여서 비로소 여성성이나 남성성이란 환상이 생성된다는 것, 따라서 젠더는 우리가 무엇인가(being)가 아니라 무엇을 하는가(doing)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사회가 정해놓은 젠더 규범 안에 놓이는데, 이 규범을 끊임없이 반복함으로써 사회적으로 ‘정상’이라 간주되는 성 정체성을 획득하게 되는데

    그렇다면 전복의 가능성은 어디서 나오는가 하면
    젠도가 반복을 통해 유지된다는 점은 역설적으로 변화의 가능성을 시사하는데, 완벽한 반복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미세한 균열이나 ‘잘못된 복제’가 발생할 수 있다고 합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머리가 짜르르 울렸습니다. 미세한 균열!
    그리고 이 ‘미세한 균열’이 일어나려면 지속적인 행동과 언어적 실천이 있어야 하는 것으로 ‘수행성’개념을 이해했습니다.

    ‘청희’는 아내나 엄마, 며느리, 미용실 원장등 그녀를 둘러싼 기존의 젠더 규범을 성실히 반복하며, 그 틀에 맞추는 과정을 열심히 해왔습니다.
    그런데 어디서 ‘미세한 균열’을 일으켰을까요. 저는 그녀가 미용학원에 ‘진짜’학원생을 위한 커리큘럼을 고민했던 일, ‘옥희’를 집으로 데려온 일, 상류층 과외 모임에서 결국은 이탈한 일, 그리고 ‘옥희’에게 자신의 ‘집’을 넘겨준 일, 이런 일들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물론 이런 acts 들에 100%의 진실성을 담보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리고 거기에 자신 깊은 곳에 위선의 조각들이 있더라도 말입니다.

    그래서 ‘옥희’도 청희가 건네준 ‘새로운 곳’에서 뭔가 지속적인 행동을 통해 ‘미세한 균열’을 가져왔으면 싶습니다.

번호 제목 작성자 작성일 조회
20
N <살아있는 날의 시작> 후기 - '그 여자'에 대해 (1)
이쿠바 | 00:47 | 조회 48
이쿠바 00:47 48
19
[8회 공지-살아있는 날의 시작] - 살아있는, 살아 날뛰는 이야기 (3)
파랑 | 2026.05.01 | 조회 176
파랑 2026.05.01 176
18
[휘청거리는 오후2 후기] 허성이 가진 가족 허상 (10)
은사자 | 2026.04.19 | 조회 173
은사자 2026.04.19 173
17
[7회 공지- 휘정거리는 오후(2)] - 모녀간이란, 형제간이란 얼마나 지겨운 악몽인가 (5)
문탁 | 2026.04.11 | 조회 208
문탁 2026.04.11 208
16
<후기> 휘청거리는 오후 (1) - 연탄때는 집으로 시집가고 싶지 않은 욕망 (6)
산책 | 2026.04.04 | 조회 194
산책 2026.04.04 194
15
[6회 공지- 휘정거리는 오후(1)] 더 꼼꼼하게 들어가 봅시다 (6)
파랑 | 2026.03.27 | 조회 191
파랑 2026.03.27 191
14
<도시의 흉년> 세미나 후기는 아닌, 그냥 뻘글
파랑 | 2026.03.24 | 조회 93
파랑 2026.03.24 93
13
<도시의 흉년> 곳곳에 넘실대는 소위 '화냥기'에 대해
문탁 | 2026.03.23 | 조회 100
문탁 2026.03.23 100
12
[도시의 흉년3 후기] '화냥기'에서 시작된 질문: 여성의 섹슈얼리티는 어떻게 자본이 될까 (8)
도레미 | 2026.03.22 | 조회 168
도레미 2026.03.22 168
11
[5회 공지-도시의 흉년(3)] - 이제야 파랑의 말을 알아들었습니다 (5)
문탁 | 2026.03.13 | 조회 184
문탁 2026.03.13 184
10
[도시의 흉년2 후기] 70년대의 도시, 신화적 저주와 자본의 흉년 사이에서 (5)
은사자 | 2026.03.08 | 조회 107
은사자 2026.03.08 107
9
[4회 공지- 도시의 흉년(2)] 더욱 적극적으로 상상하며 읽기를 제안합니다 (6)
파랑 | 2026.02.27 | 조회 208
파랑 2026.02.27 2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