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청거리는 오후2 후기] 허성이 가진 가족 허상

은사자
2026-04-19 12:56
239

허성이 가진 가족 허상

 

 

『휘청거리는 오후』라는 소설 이야기는 그만하고 싶다. 다만, 이 작품이 던진 화두를 통해 우리 시대의 '가족을 다시 생각해 본다.

 

핵가족은 배타적 성적 독점을 제도화한 것으로 1부 1처제를 기본으로 한다. 성적 관계를 결혼 생활 내부로 한정하여 사회적 혼란을 최소화하고, 부부간의 결속을 강화하며, 자녀를 안정적으로 양육하는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속성상 폐쇄적 회로에 갇힐 수밖에 없다. 결혼은 제도이고, 정서적 친밀감은 감정의 문제이므로 별개의 문제이다. 현대에 와서는 대개 사랑을 전제로 결혼하지만, 이 소설 속 초희처럼 사랑을 배제한 결혼도 있고,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결혼은 일종의 계약이었기에 신랑신부는 서로 얼굴도 못 본 채 결혼하는 일이 흔했다. 그렇게 생각하면 근대 이후 개인주의가 확산되면서 '로맨틱한 사랑'이 결혼의 조건이 되기 시작한 것인데, 문제는 이 감정의 유효기간이 짧다는 점이다. 사랑이 식으면 의리로, 자식이 성장할 때까지는 전우애로 버티다가 황혼에 이른다. 왜 "이건 아니다" 하면서도 쉽게 헤어지지 못하나? 경제적 손실 때문이다. 갖가지 제도가 기혼자 중심으로 만들어져 있고, 그것이 국가 시스템의 유지와 자본의 재생산에 훨씬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2자녀에게도 다자녀 혜택을 주며 가족을 유지하라는 국가의 요구 앞에서 '4인 가족'은 표준적 강박으로 자리잡는다.

 

하지만 '스위트홈'이라는 환상은 이미 파열음을 내고 있다. 리하여 대안적 공동체의 실험은 계속된다. 문탁네트워크도 그 일환이 아닌가? 돌봄은 혈연 가족의 전유물이 아니고, 실존적 환대가 될 수 있다. 정서적 유대는 혈연과 관계없이 이어질 수 있다. 마음이 어디 정한다고 되는 문제던가? 친밀감은 내 촉각이 닿는대로 뻗쳐 나가되, 타인에 대한 배려와 존중을 바탕으로 선을 지키는 것이 핵심이다. 내 자식이라도 소유물이 아님을 명확히 인식해야 하고, 아무리 가깝더라도 '타인의 방'에 무단 침입해서는 안 된다.

 

그런 의미에서 허성이 딸들에게 보내는 사랑은 모순적이다. 그는 다 주고 싶어 했으나, 동시에 다 소유하고 싶어 했다. 정서적 교감이 없는 일방적 시혜가 사랑일 수 있을까? 사랑한다면, 돈을 갖다댈 것이 아니라, 딸들의 마음을 들여다봐야 하고 딸들이 잘못된 것을 요구하면 갈등을 무릅쓰고 아니라고 이야기해야 했다. 허성은 '유능한 가장'으로 인정받고 싶어하는 자기 욕망에 중독되어 있었고, 돈을 매개로 "아빠가 좋아요"하는 딸의 지지를 얻을 수 있다는 허상을 믿었다. 허성이라는 이름은 가족제도라는 공허한(虛) 성공(成)을 좇아, 헛된(虛) 성(城)을 쌓았다는 의미일지도 모른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무엇이든 요구하고 침범해도 된다는 생각은 가족제도의 악용이고, 폭력이다. 가족이라는 지층에서 벗어나 관계를 사람과 사람이라는 본질로 생각하면 보다 심플해지지 않을까 한다. 친구를 대하듯, 내 주변 다른 사람을 대하듯 서로의 실존을 존중하며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에서부터 새로운 관계가 시작될 것 같다.

 

댓글 10
  • 2026-04-21 10:19

    아니 이번에도 C조의 후기는 은사자님이 써주셨군요. 감사합니다. 후기를 써야한다는 사실을 새까맣게 잊고 즐겁게 주말을 보냈는뎅..ㅎㅎㅎ 후기를 먼저 띄워주신 은사자님 멋져~~

    저는 올해 <박완서 읽기>세미나의 화두는 '너무나도 리얼하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주인공에 이입되어 괴롭기만 한 소설 읽기는 과연 나에게 무슨 변화를 가져다 줄까', 혹은 '소설 읽기는 이론서 읽기와 무엇이 다를까' 정도가 되겠네요. 지금껏 박완서 선생님의 네 작품 일곱권을 읽어 오면서 괴로움은 많이 줄어들었어요. 도대체 허성씨의 가족에 이입될 수 없어서 그 괴로움이 줄어든 것도 같아요. 시공간이 다른 것도 있고, 계급적 차이도 있어서 그런지 저는 허성씨네 가족의 결혼관에 도통 이입이 안 되더라구요. 다만 지금 공부하고 있는 <자본주의>세미나와 연결 지어 생각을 해보곤 했어요. <임금의 가부장제>와는 일하는 남성과 가정주부라는 구도와 <포식하는 자본주의>와는 끊임없이 포식하려는 자본의 논리가 이 가족에게도 적용되어 끊임없이 물질적인 안정을 포식하려는 건가...정도의 생각이 듭니다만.... 천민 자본주의라고 선생님들이 말씀하시는데, 천민의 반대는 귀족 자본주의인가...고런 단순한 생각도 해보고요..ㅋㅋㅋㅋ 두서없고만유. 정치하게 읽기나 분석이 영 되질 않는군요. 천민이든 귀족이든 포식이든 자본주의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사랑, 결혼, 가족의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작동되는지 보는 것이 이 작품을 이해하는데 키워드가 되는 것 같습니다.

    하여튼 도대체 허성씨네 가족은 왜 그러는지? 수연이는 도대체 왜 그러는지? 진이는 또 왜? 경아는 또 왜? 왜 왜 왜를 파악하는 것이 소설 읽기의 다른 지점들인 건가 생각하며, '왜'를 염두에 두면서 소설 읽기를 계속 해봐야겠어요.

    • 2026-04-22 10:30

      그러니까… 왜 저럴까? 이해가 안 된다. 너무 극단적인 것 아닌가? 자극적이고 통속적인 이야기 아닌가? (실제로 이런 비평도 존재했습니다.)
      이런 접근보다는, 이 중산층 가족의 해체 서사를 알레고리로 읽어보실 것을 권해드립니다.

      아시다시피 ‘알레고리’—흔히 은유나 직유와 함께 ‘풍유’로 번역되곤 하는 이 장치는—은유나 상징과는 다릅니다. 상징이 대상과 의미를 하나로 응축하여 어떤 완결된 통일성과 아름다움을 지향한다면, 알레고리는 그러한 일치와 통합을 거부합니다. 특히 발터 벤야민의 맥락에서 알레고리는, 부서진 파편과 잔해 속에서 시대의 진실을 읽어내는 방식입니다.

      다시 말해 <휘청거리는 오후>는 '성장', '개발', '중산층'이라는 허울 좋은 구호 아래 일상 속에 스며든 파편화된 욕망과 관계의 균열을 드러내는 알레고리적 독해를 할 때 비로소 그 의미가 선명해집니다. 이 작품의 ‘휘청거림’은 개인의 감정이 아니라 시대 자체의 불안정성을 가리키는 징후인 거죠.

  • 2026-04-22 08:58

    오... 은사자 쌤 후기를 통해서 나이듦연구소의 취지도 새삼 이해하게 되었고요. "허성이라는 이름은 가족제도라는 공허한(虛) 성공(成)을 좇아, 헛된(虛) 성(城)을 쌓았다는 의미일지도 모른다"라는 문장에서 저는 한번도 허성이 왜 허성인지 생각해보지 못했다는 깨달음(?)도 얻었습니다. ^^ 저도 단순삶 쌤처럼 정치하게 읽기나 분석에 취약한데, 아직 반도 안되었으니까요. 앞으로 계속 시도해보려 합니다-

  • 2026-04-24 07:31

    메모도 후기도 모범적으로 먼저 작성해 주신 혜근 샘께 감사를 표합니다.

    가족이란 제도를 해부함으로써 엄청나게 포개져 있는 것들을 이해하고 또 질문해 볼 수 있어서 좋았다. 근대의 핵가족은 인간으로서 해결해야 할 모든 욕구들을 감당해야 했다. 생존, 관능적 욕망, 정서적 지지, 돌봄 등이 모두 핵가족의 몫이었다. 이중 일부는 유효기간이 있고, 또 어떤 것들은 가족내 권력 관계로 인해 충족이 쉽지 않다. 또 자원부족으로 가족단위에서 감당하기 어려운 것도 있다. 생존, 정서, 돌봄을 모두 감당하도록 설계된 근대의 핵가족은 미션 임파서블 자체였다. 가족을 이처럼 해부해 보니 박완서 소설이그린 1970년대 중산층 핵가족이 왜 막장일 수 밖에 없었는지가 좀 이해되었다. 이미 균열하고 있고 또 해체가 진행되고 있는 모습을 작가가 잘 그려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족이 이처럼 문제적이었다면 <휘청거리는 오후>> 의 등장 인물들은 가족 말고 다른 유의미한 관계망이 있었나? 속내를 얘기하고 정서적 지지를 받을 우정의 관계망이 어떤 식으로 존재했을까? 소설 내 남성들과 여성들의 우정이나 연대의 관계망이 꽤 다르게 그려진 게 눈에 들어왔다. 허성씨의 경우 자신의 속얘기를 할 수 있고 또 자신의 처지를 공감해주는 유영감이 있었다. 돈이 필요할 때 실질적인 도움을 주기도 했다. 또 본인을 잘 따르고 또 어른 역할을 해주고 싶은 부하직원이었던 차씨도 있었다. 정훈은 매우 계산적인 인물로 나온다. 그럼에도 정훈이 스스럼없이 경하에게 부탁을 하고, 또 경하가 그에게 마음을 쓰는 것을 보면 둘 사이에 선후배 간의 의리가 어느 정도 작동하고 있었다고 짐작할 수 있다.

    이에 반해 소설에 드러난 여성 인물들의 관계망에서는 우정의 흔적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만나는 사람들은 주로 가족의 이익과 관련되어 있고, 또 친구들과의 관계도 엽기적이었다(친구라고 부르는 것이 민망할 정도). 민여사가 어울리는 인물들, 즉 이모, 중매쟁이, 마담 뚜 등은 다들 돈과 지위를 높이기 위해 서로를 이용한다 (소설 내 민여사의 역할 설정이 혼인 비즈니스를 주도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녀의 다른 생활영역이 등장하지 않은 탓도 있겠지만). 말희의 경우 친구 미선의 애인을 빼앗고도 죄책감이 없었다. 또 집안이 풍지박산되어 학교를 그만둔 미선에 대해 말희와 친구들은 통쾌해 했다. 미선의 불행은 조롱섞인 가십거리로 소비되었다. <목마른 계절>>에 등장하는 수연의 동성 친구들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지난 번 수업에서도 박완서 소설에 나타나는 여적녀 프레임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었다. 이와 같은 약간 기괴하게 느껴지는 차이가 왜 나타났을까? 당시 전근대적 가부장제로 인해 여성들은 개별적으로 고립되어 있었고, 연애 상대, 결혼, 자녀들의 성공에 올인할 수밖에 없었던 구조 때문이었을까. 가족 성원의 성공만이 본인이 인정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기에 우정은 뒷전으로 밀려났을까. 이것 말고도 다르게 해석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감이 잘 오지 않는다. 중산층 남성들의 경우 활동할 수 있는 공적인 장이 상대적으로 많았을 것이다. 서로 부딪히면서 경쟁하기도 하고 연대하기도 하고 때론 상대의 실수를 봐주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면서 진정한 우정까진 아니더라도 전략적 파트너쉽이나 구조적 연대같은 게 생겨날 여지가 상대적으로 많았을 것 같다.

    소설이 그린 70년대 서울 중산층들의 가족 중심으로한 관계망은 향후 소설들에서 어떻게 변모하게 될지 궁금해진다.
    요즘 난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가족과 관계망이 어떻게 그려지는지에 먼저 주목하게 된다. <휘청거리는 오후>>를 읽은 여파인 것 같다. 핵가족을 벗어난 관계망들이 있는지 그리고 그것들이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를 나도 모르게 살펴보고 있다.

    • 2026-04-25 08:27

      좋네요. 저도 해성 샘의 '주목'을 계속 '주목'해볼게요^^

  • 2026-04-25 09:42

    허성 씨를 보면서 『도시의 흉년』에서의 김복실 여사가 자꾸 생각났다. 두 인물은 모두 한때 자신의 힘으로 자산과 위치를 일궈냈지만, 산업화가 만들어낸 새로운 질서를 읽고 그 안에서 자신을 재배치하는 데에는 한계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김복실이 사회적 자본이 없는 여성이라는 조건 속에서 구조적으로 이동 경로가 제약된 인물이라면, 허성은 그 구조 안에 들어와 있으면서도 자본을 확장 가능한 체계로 전환하지 못한 채 머무른다. 이처럼 두 인물은 단순한 개인의 성실성 문제가 아니라, 변화한 시대가 요구하는 네트워크와 감각, 그리고 자본의 전환 능력을 충분히 갖추지 못한 인물들이어서 오버랩된 것 같다.

    허성은 (문탁샘 말씀처럼) 공업인이다. 처음에는 꽤 낯선 단어였다. 공업인 허성을 단순히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이 아니라, 산업화 시기에 등장한 새로운 생산 주체이자 중간계층을 상징하는 인물로 들여다보자. 그는 농업 중심 사회에서 산업사회로 이동하는 과정 속에서, 생산을 책임지며 가족의 생존과 체면을 동시에 떠안는 근대적 가장의 모습이다. 허성의 위치는 공업인이라는 범주 안에서도 특히 과도기적으로 보인다. 그는 노동자도, 대자본가도 아닌 채 생산과 경영을 함께 짊어진 중간계층에 머문다. 생산 기반을 갖고 있지만, 그것을 더 큰 자본 체계로 전환하거나 확장하지 못한다. 유영감의 아들들과 대비해 보면 그 차이가 보다 선명해진다. 유영감의 아들들은 이미 형성된 공장을 물려받아 자본을 확장하고 조직과 거래망을 관리하는 ‘상속 경영’의 구조를 만들어낸다. 공업인이 생산 현장에 밀착된 ‘만드는 사람’이라면, 유영감의 아들들은 자본과 네트워크를 운용하며 ‘확장하는 사람’에 가깝다. 이 장면에서 허성은 김복실 여사처럼 시대의 흐름을 타지 못하는 인물로 남게 된다. 이러한 위치는 개인의 능력 부족이라기보다, 산업 구조가 바뀌는 시기에 형성된 중간계층의 취약성으로 보인다. 그런 점에서 허성의 휘청거림은 한 개인의 실패를 넘어, 산업화의 전환기 속에서 중산층 가장이 감당해야 했던 불안과 균열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으로 읽을 수도 있겠다.

    (소설 속 등장인물들이 모두 그러했듯이) ‘허성과 김복실은 대체 왜 이러는 건가?’라는 당혹감이 소설을 읽는 내내 따라다녔다. 하지만 조금 더 생각해보면, 그들은 이상하거나 예외적인 존재라기보다, 산업화와 도시화가 만들어낸 욕망의 질서 속으로 끌려 들어갔지만 그것을 감당할 조건까지는 부여받지 못했던 다수를 대표하는 인물이 아니었을까. 더 많은 돈, 더 나은 혼인, 더 높은 위치를 향한 욕망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었지만,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자본과 네트워크, 감각은 결코 평등하게 주어지지 않았다. 허성의 휘청거림은 개인의 실패라기보다, 이러한 구조가 만들어낸 균열이었을 것이다.

    결국 박완서 작가가 허성이라는 인물을 통해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새로운 질서가 다수를 욕망의 경쟁으로 밀어 넣고도 그 결과를 감당하지 못하게 만드는 현실, 그 반복되는 불안의 풍경이 아니었을까. 우리가 매일 분투하는 일상 역시, 얼굴만 바꾼 채 지속되는 이 불안의 구조 속에 놓여 있는 것은 아닐까. 견고한 구조 속에서도 끊임없이 출구를 찾으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모두가 한결같이 답답하고 한심해 보였던 소설 속 등장인물들과 우리는 얼마나 다르게 살고 있는 걸까? 이 소설 끝내 찜찜하다.

    • 2026-04-27 08:58

      좋네요.

      저는 아버지가 '공업인' 이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혹시 그것이 '마찌꼬바' 였을까요? 마찌꼬바는 을지로, 청계천 세운상가 일대, 문래동 등에 많았었지요.
      그런데 이 사람들을 나중에 '중소기업인'으로 부르게 되나요? 아니면 중소기업인과 영세상공업인으로 분화되는 것일까요?
      허성씨 공장은 마찌꼬바에 가까운 것 같던데...
      아무튼 공업인, 마찌고바, 중소기업, 영세상공업 등.... 용어와 그것의 함의, 혹은 변천과정이 덩달아 궁금해집니다.

      한편,
      저희 친정 아버지는 을지로에 자리 잡으셨고 (거기서는 메리야스 기계 부속품을 대구 공장에서 받아서 판매하는 중간 판매책을 하는 가게와 살림집이 붙어 있었어요. 저도 을지로 6가에서 태어났구요)
      나중에 성수동에 작은 공장을 차리셨었어요.

      지금은 을지로도 성수동도 핫플이죠?
      특히 한국의 브루클린이라고 불리는 성수동은 예전 공장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까페 등이 인기라면서요?

      그럼 거기에 있던 공업인들은 지금 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끼요?

      유영감의 자식들은 계속 승승장구했을지,
      차씨는 유영감처럼 되었을지, 아닌지
      새삼 궁금해집니다.

      을지로-마찌꼬바.png

  • 2026-04-27 10:41

    내가 학창 시절을 보냈던 70년 대의 한 중산층 가정이 몰락하는 과정을 아버지와 딸들 중심으로 전개되는 결혼을 통해 살펴 보았다.
    농촌의 중산층(이런 말이 있을까?, 암튼 농촌에서는 그런대로 살았던~~)가정에서 자랐고, 나의 아버지는 딸들도 모두 대학 공부를 시키셨다. 나의 아버지도 모든 의사 결정의 중심이 되고 등록금도 마련하고, 결혼 자금까지 준비하는 등등은 허 성 씨와 다르지 않아서 처음에는 쉽게 읽어 나갔던 이야기였다. 그러나 읽을수록 뭔지 모르게 위태 위태한 가정의 흔들림이 전해졌고, 또 나는 허 성 씨가 아련하게 다가와서 더 마음이 쓰였다.

    '에잇! 하필 이 소설에 메모와 후기가 걸릴 게 뭐람?'
    세미나가 끝나던 날, 후기는 개기기로 마음 먹었다. 더 이상 허 성씨와 초희, 우희, 말희와 얽히기 싫었다. 후기가 올라왔다는 문탁 샘의 톡도 후다닥 넘기고~~~.
    잘 넘기고 있었는데 누구 누구 님도 후기를 올리셨다고 오늘 아침 톡이 또 올라왔다.
    아!!!, 후기, 이건 이렇게 개겨서 되는 일이 아니었다. 자진 입학한 박완서 학교에서 왜 숙제도 안 하는 불량 학생이 되려는 생각을 했을까. 이건 애초 되는 일이 아니었는데~~~.
    반성과 함께 노트북을 꺼낸다. 일단 죄송하니까 머리부터 조아려야지. 안 하려고 마음 먹었던 애초의 생각을 얼른 고쳐 먹는다.
    반성문에서 봤던 다음부터 열심히 하겠습니다. 다음부터 더 잘 하겠습니다. 뭐 이런 단골 멘트도 살아난다.

    아무튼, 가족의 형태가 다양해지고 여성이 사회 진출로 경제력을 갖춘 여성의 목소리가 힘을 받는 세대로 변화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렇다면 이 시대에는 허 성씨의 세 자매가 없을까? 아니 줄어들었을까?
    여전히 결혼 조건은 돈에 의해 등급까지 매겨져서 혼인 시장에 떠돌아다니고 이 등급을 올리려는 허 성씨는 더 분발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 2026-04-28 07:27

      ㅋㅋ... 제가 너무 들들 볶죠?

  • 2026-04-29 10:42

    휘청거리는 오후를 읽으면서 저는 개인을 둘러싼 세계'구조'와 '개인의 자유'와의 관계가 떠올려졌습니다. 저는 '시대가 이러니 할 수 없어'라는 말에 왠지 구조에 묶여버린 듯한 갑갑함이 있거든요. 그래서 저는 '위선'의 가치에 주목하곤 합니다. 사람들이 흔히 민주화 세대에게 들이대는 종주목이 '말은 민주니 평등이니 그럴 듯한데 실제는 우리와 다를 바 없어'하면 비난하는데. 저는 잠시라도 위선이 갖는 그 기간만큼, 그 크기만큼 역사가 발전해왔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어떻게 노예제 사회에서 여기까지 왔을까 싶거든요. 그래서 저는 허성씨가 자신을 둘러싼 구조에 위선이라도 떨면서 조금이라도 저항해보기라도 했으면 어땠을까 상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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