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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나이듦연구소</title>
		<link>https://naidum.org</link>
		<description>다른 노년의 탄생</description>
		
				<item>
			<title><![CDATA[[죽음을 배우는 시간] 1회차 공지]]></title>
			<link><![CDATA[https://naidum.org/?kboard_content_redirect=600]]></link>
			<description><![CDATA[<p class="p3">이 책은 기본적으로 이반 일리치가 쓴 &lt;병원이 병을 만든다&gt;(1974)에서 제기하는 문제의식에 기반하고 있습니다.</p>
<p class="p3">이반 일리치는 ‘진찰과 치료가 도리어 병을 만들어 낸다’면서 ‘사회적 병원병病院病)’의 문제를 지적했었지요.</p>
<p class="p3"> </p>
<p> </p>
<p><img class="aligncenter" src="https://naidum.org/wp-content/uploads/kboard_attached/10/202604/69edda87bbd476554272.jpg" alt="" width="252" height="361" /></p>
<p> </p>
<p class="p3">저자인 김현아교수는 서문에서 이 책을 쓴 목적이 “병원의 죽음 비즈니스에 속하지 않고 원하는 방식으로 생을 마무리하기 위해서 어떤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는지 알리기 위함”이라고 밝히고 있지요.</p>
<p class="p3">시스템화된 대형병원에 재직하고 있음에도 마치 내부고발자 같은 입장으로, <br />
철저하게 병원시스템에 이끌려다닐 수밖에 없는 환자와 보호자들, 그리고 획일화된 죽음의 장면을<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적나라하게 묘사합니다.</p>
<p> </p>
<p class="p3">1장에서는 김현아교수가 의사로서 목격한 안타까운 죽음의 장면들이 등장합니다.</p>
<p class="p3">환자와 보호자들이 생사의 기로에서 불가피하게 선택할 수 없는 연명의료와 병원시스템 그리고 중환자실의 문제를<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꼬집고 있습니다.</p>
<p class="p3">2장에서는 장수와 노화, 노환, 죽음의 질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p>
<p class="p3">특히 완화의료 부분이 중요하게 와 닿았습니다.</p>
<p class="p3">저는 지난 해 12월부터 한 달에 한 번 용인에 있는 호스피스 병원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데요.</p>
<p class="p3">많은 사람들이 호스피스병원을 ‘죽으러 가는 곳’으로 잘못 이해하지만<br />
중환자실에 비하면 호스피스병동은 상당히 평화롭습니다. 물론 의식이 없는 환자들도 많습니다만, 의식이 있는 분들은 주변 사람과 눈을 맞추고 대화도 하고 기운이 있으면 밖에 나가 햇빛을 쬐고 바람을 쐬면서 시간을 보낼 수 있습니다. 현행 제도 상 말기 암 환자만 입소가 가능하니 거기 계신 분들이 굉장히 우울할 거라고 생각하지만 환자도 보호자도 그렇게 침울한 분위기는 아니에요. 그 모습을 보면서 저는 심각한 고통을 겪게 되는 상황이 오면 호스피스에서 지내거나 가정 호스피스 서비스를 받고 싶다는 생각을 더 굳히게 되었지요.</p>
<p>그래서 김현아교수가 자연사와 완화의료에 대해 강조하는 것에 더욱 공감하게 됩니다.</p>
<p class="p3">여러분은 이 책의 전반부를 어떻게 읽으셨는지 궁금합니다.</p>
<p class="p3">발제문에 적은 것처럼,</p>
<p class="p3">다음과 같은 질문들에 대해 한 번 생각해 보고 오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p>
<p> </p>
<p class="p4">*본인 또는 가족이 중대한 병(암)에 걸렸을 때 적극적인 치료가 필요한 상황과 그렇지 않은 상황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나요?</p>
<p class="p4">*자연사 혹은 그 유사한 방식(단식 존엄사) 대해 생각해 보신 적이 있나요?</p>
<p class="p4">*호스피스나 완화의료에 관한 경험이 있다면 나누어 볼까요?</p>
<p class="p5">그럼 월요일 오후<span class="s1"> 9</span>시까지 여러분의 생각을 담은 메모를 올려주세요<span class="s1">.</span></p>
<p> </p>
<p>[추가 정보]</p>
<p>1.김현아 교수는 이 책(2020년)을 쓴 이후에도 &lt;의사 외전&gt;(2021), &lt;의료 비즈니스의 시대&gt;(2023), &lt;가짜 환자&gt;(2026) 등 우리나라 병원 시스템의 문제를 지속적으로 일깨우고 있습니다. 최신작은 읽어보지 못했지만 &lt;의료 비즈니스의 시대&gt;도 읽어볼만한 책입니다.</p>
<p class="p1">그리고 아래는 &lt;죽음을 배우는 시간&gt;과 관련된 강의 동영상입니다.</p>
<p> </p>
<p class="p1"><a href="https://www.youtube.com/watch?v=ny-xB05O37w">https://www.youtube.com/watch?v=ny-xB05O37w</a></p>
<p> </p>
<p>2.완화의료에 관해서는 제주MBC에서 만든 다큐멘터리 2부작<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lt;어쩌면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gt;도 한번 보실 것을 추천합니다.</p>
<p class="p1">일본에서 재택의료가 가장 먼저 시작된</p>
<p class="p1">야마나시현 고후시 호스피스 의사 나이토선생님과 환자들의 이야기를 7년동안 기록한 다큐입니다.</p>
<p class="p1">1부 <a href="https://pp21.org/QuHUlJ">https://pp21.org/QuHUlJ</a></p>
<p class="p1">2<span class="s1">부</span> <a href="https://pp21.org/cmgMbz">https://pp21.org/cmgMbz</a></p>]]></description>
			<author><![CDATA[서해]]></author>
			<pubDate>Sun, 26 Apr 2026 18:39:21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naidum.org/?kboard_redirect=10"><![CDATA[나이듦대중지성]]></category>
		</item>
				<item>
			<title><![CDATA[나이듦 대중지성 시즌 1 8회차 &lt;몸의 일기&gt; 후반부 후기]]></title>
			<link><![CDATA[https://naidum.org/?kboard_content_redirect=599]]></link>
			<description><![CDATA[<p><span style="font-weight:400;">후기를 어떻게 써야 하나, 일요일이 되어서야 못 다 읽은 부분을 마저 읽고 책상 앞에 앉아 고민하다가</span><span style="font-weight:400;"><br />
</span><span style="font-weight:400;">기린샘이 주신 질문에 하나씩 답해보기로 합니다</span><span style="font-weight:400;"><br />
</span><span style="font-weight:400;">다른 분들도 세미나에서 못다한 답들을 달아주시면 어떨까요~^^</span><span style="font-weight:400;"><br />
</span><span style="font-weight:400;"><br />
</span><strong>1) 주인공과 연결된 인물들(아버지, 어머니, 비올레트아줌마, 티조, 사촌들, 모나, 자식들, 손주들)중 인상적인 인물에 대해</strong><span style="font-weight:400;"><br />
</span><span style="font-weight:400;"><br />
</span><span style="font-weight:400;">누구보다 인상적이고 가장 애정이 가는 인물은 티조입니다, 겉으로는 정돈된 삶을 사는 주인공의 숨겨진 욕망의 분신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정곡을 찌르는 유머에 삶의 진실을 담아내는 단단한 티조의 이야기들. 고개를 끄덕이게도 되고, 한참 그 의미를 곱씹어 보게도 되는 현실속에 있지 않은 농담같은 스토리들, 어디로 튈지 모르는 그의 행동에 잠시나마 자유를 느끼기도 합니다. 가장 좋아하는 부분은 60세 생일에 10년 주기의 탄생이론으로 해주는 축하의 메세지. 그리고 자신의 죽음도 어마하게 큰 돼지 이야기로 웃어넘길수 있는 모습. 어이! 뭐가 그리 심각해! 힘빼라고! 말해주는 것 같습니다. 잔뜩 진지하게 살아온 습관이 쉽게 어디 가지는 않지만 생로병사를 피할수 없는 삶에서 결국 필요한 건 느슨한 몸에서 나오는 유머감각이 아닐까 싶네요.  </span><span style="font-weight:400;"><br />
<br />
</span></p>
<p><strong>2) 손자의 죽음 후 팡슈와 보낸 7년 동안 몸의 일기는 중단됩니다. “세상을 건강하게 하는 일”을 하는 동안 몸의 일기를 쓰지 않았다는 내용에 대해</strong><span style="font-weight:400;"><br />
</span><span style="font-weight:400;"><br />
</span><span style="font-weight:400;">몸과 상관없이 살아간 7년의 세월. 주인공은 ‘세상을 건강하게 하는 일’을 했다고 하지만, 사실 많은 사람들이 일생의 대부분을 몸과 서로 상관없는 동거인처럼 살아가고 있지 않을까요? 그냥 제가 그랬던 것 같아요. <br />
열 두살 때부터 몸의 일기를 써온 주인공은 손자의 죽음을 맞이하고 나서, 몸이 자꾸 일으키는 사고를 직면하고 싶지 않아 관찰과 기록을 잠시 멈춥니다. <br />
그리고 젊음을 다시 되찾은 것처럼 활발하게 일합니다. <br />
하지만 저는 심하게 아파서 일상생활이 어려워진 40대 중반까지는, 그냥 몸을 내 생각과 의지에 당연히 따라와야 하는 부속품처럼 끌고 왔던 것 같아요. <br />
겉으로 꾸밀줄만 알았지, 평생을 함께 가야 하는 동거인으로 존중하기 보다 왜 더 분발하지 않냐고 채근하는 때가 더 많았지요. <br />
아프면서 몸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는데, 정신없이 굴려온 관성에서 벗어나는 건 그리 쉽지 않았습니다. <br />
생각만 하고 있던 몸의 기록, 일기를 그때부터 마음이 아니라 몸에 집중해 써보았더라면 고속열차처럼 달려가던 습관들에 브레이크를 거는 게 조금은 수월하지 않았을까 생각이 듭니다. <br />
어쨌든 주인공이 몸의 일기를 쓸수 있었던 7년 이전과 이후의 시간들을 오히려 복받은 시간이 아니었을까요. </span><span style="font-weight:400;"><br />
<br />
</span></p>
<p><strong>3) 지금까지 자신이 지속해 온 일이 있을까요? 혹은 지금부터라도 시작해서 지속하고 싶은 일을 떠올린 것이 있다면<br />
</strong><span style="font-weight:400;"><br />
</span><span style="font-weight:400;">무슨 일이든 무리하지 않고 </span><span style="font-weight:400;">50%만 하기. <br />
어떤 일을 하고 있던 중간에라도 힘들면 무조건 내려놓고 쉬기. <br />
하루 중에 단 십분, 일주일 중에 한나절이라도 아무것도 안하고 쉬는 시간을 정해놓기. <br />
아무리 게으르게 살려고 해도 매일 엄청나게 많은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내 생산성을 절대 자책하지 않기. </span><span style="font-weight:400;"><br />
<br />
</span></p>
<p><strong>4) 노년에 자신의 몸이 점점 기능 부전으로 향하는 과정(노화)을 기록하는 주인공의 태도에서 어떤 죽음관을 읽을 수 있는가?</strong></p>
<p><span style="font-weight:400;"><br />
</span><em><span style="font-weight:400;">“평생 자기 몸에 관해 일기를 써온 사람이 마지막 가는 길을 거부할수는 없다” (445)</span><span style="font-weight:400;"><br />
</span><span style="font-weight:400;">“난 몸이 날 놀라게 하는 한이 있어도 그냥 자유롭게 내버려뒀다. 이 일기를 씀으로써 놀람을 받아들일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된 것이다.” (462)<br />
</span></em><span style="font-weight:400;"><br />
</span><span style="font-weight:400;">나이가 들수록 내가 나를 참 모르는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마음도 그런데 제대로 살펴본 적이 없는 내 몸에 대해서는 무지하고요. </span><span style="font-weight:400;"><br />
</span><span style="font-weight:400;">하지만 자기 자신, 특히 자신의 몸을 평생 동안 자세히 관찰하고 알아온 주인공이</span><span style="font-weight:400;"><br />
</span><span style="font-weight:400;">노화와 죽음을 놀라지 않고 받아들이는 모습에서는, 그 쌓아온 노력에 부러운 마음이 듭니다. </span><span style="font-weight:400;"><br />
</span><span style="font-weight:400;">자신을 차곡차곡 이해해온 과정은, 스스로의 삶에 대한 존중과 사랑이고,</span><span style="font-weight:400;"><br />
</span><span style="font-weight:400;">충분히 사랑한 사람은 </span><span style="font-weight:400;"><br />
</span><span style="font-weight:400;">마음 편히 그 사랑을 떠나보낼 수도 있는 거구나 하게 됩니다.   </span><span style="font-weight:400;"><br />
</span><span style="font-weight:400;"><br />
</span><span style="font-weight:400;">달리기의 기록이든, 병의 기록이든, 혹은 통증의 기록이든</span><span style="font-weight:400;"><br />
</span><span style="font-weight:400;">어떤 형태로의 몸에 관련한 기록을 해보아야겠다는 동기를 강하게 받았네요. </span><span style="font-weight:400;"><br />
</span><span style="font-weight:400;">나이듦을 받아들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span><span style="font-weight:400;"><br />
</span><span style="font-weight:400;">나를, 내 몸을, 이해하고 </span><span style="font-weight:400;"><br />
</span><span style="font-weight:400;">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사랑하는 게 아닐까 <br />
후기를 적으며 드는 생각입니다. </span></p>]]></description>
			<author><![CDATA[엄지]]></author>
			<pubDate>Sun, 26 Apr 2026 15:59:52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naidum.org/?kboard_redirect=10"><![CDATA[나이듦대중지성]]></category>
		</item>
				<item>
			<title><![CDATA[나이듦대중지성 시즌1 8회차 세미나 &lt;몸의 일기-2&gt; 공지]]></title>
			<link><![CDATA[https://naidum.org/?kboard_content_redirect=598]]></link>
			<description><![CDATA[<p style="padding-left:80px;"><strong><span style="font-family:nanumbarungothic;">“... 부러진 왼팔이 팔꿈치와 따로 놀면서 허공을 휘저을 때조차 놀람도 공포도 통증도 없었다. 그냥 확인을 하는 정도였다고 할까. 아, 이런 일이 일어났군, 됐어, 됐어. 이렇듯 슬픔에 빠진 내 뇌는 삶으로부터 아무런 의미도 못 느끼고 있었다. 이 여러 사건의 원인인 그레구아르의 부재가 모든 사건을 압도하고, 또 그것들로부터 모든 의미를 앗아간 것 같았다. 그레구아르가 모든 것의 원칙이었기 때문에, 그가 떠나고 나선 문자 그대로 삶이 의미를 잃은 것이었다. 그리하여 내 몸도 내 판단력의 도움을 받지 못하고 홀로 방향을 벗어나 있었다...”</span></strong></p>
<p style="padding-left:80px;"><strong><span style="font-family:nanumbarungothic;"> (p.440) 79세 5개월 6일, 2003년 3월 16일 일요일</span></strong></p>
<p> </p>
<p> </p>
<p>손자의 죽음을 겪은 주인공의 몸이 반응하는 모습을 기록한 장면입니다. 몸으로 살아가는 일의 끝은 죽음이라는 것은 &lt;몸의 일기&gt;에서도 면면히 드러납니다. 이후 7년의 공백기를 거쳐 주인공은 86세의 1년을 마저 기록하고 87세 19일 무렵에 세상을 떠납니다.</p>
<p> </p>
<p>삶과 죽음, 그 사이를 연결하는 사람들의 관계. 이 작품은 그것을 몸이라는 키워드로 펼쳐놓고 있습니다. 후반부에서는 몸이 겪는 노화를 기록하는데 온갖 질병과 함께 가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주인공이 자신의 질병을 꼼꼼히 기록하는 습관이 노화를 좀 더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하는데 일조한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관계에서도 죽음은 자연스럽게 스며들지요. 그렇지만 손자의 죽음은 그 기록도 멈추게 합니다. 7년의 공백에 주인공이 한 일을 보면, 삶의 고통을 소화하는데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됩니다. 두려움을 이겨내겠다고 쓰기 시작한 일기에서 죽음에 이르러 문장에서 마침표의 평온이 느껴졌습니다. 몸의 신호를 외면하지 않고 반복해 온 행위가 가져온 내면의 평안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p>
<p> </p>
<p>1) 주인공과 연결된 인물들(아버지, 어머니, 비올레트아줌마, 티조, 사촌들, 모나, 자식들, 손주들)중 인상적인 인물에 대해</p>
<p>2) 손자의 죽음 후 팡슈와 보낸 7년 동안 몸의 일기는 중단됩니다. “세상을 건강하게 하는 일”을 하는 동안 몸의 일기를 쓰지 않았다는 내용에 대해</p>
<p>3) 지금까지 자신이 지속해 온 일이 있을까요? 혹은 지금부터라도 시작해서 지속하고 싶은 일을 떠올린 것이 있다면</p>
<p>4) 노년에 자신의 몸이 점점 기능 부전으로 향하는 과정(노화)을 기록하는 주인공의 태도에서 어떤 죽음관을 읽을 수 있는가?</p>
<p> </p>
<p>여러분들의 메모와 함께 위 네 가지와 관련한 토의도 해 보면 좋겠습니다^^</p>
<p>메모는 월요일 밤까지 올려주세요~ 화요일 밤 8시에 뵙겠습니다^^</p>]]></description>
			<author><![CDATA[기린]]></author>
			<pubDate>Sun, 19 Apr 2026 20:28:29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naidum.org/?kboard_redirect=10"><![CDATA[나이듦대중지성]]></category>
		</item>
				<item>
			<title><![CDATA[[휘청거리는 오후2 후기] 허성이 가진 가족 허상]]></title>
			<link><![CDATA[https://naidum.org/?kboard_content_redirect=597]]></link>
			<description><![CDATA[<p><span style="font-size:28px;"><strong>허성이 가진 가족 허상</strong></span></p>
<p> </p>
<p> </p>
<p id="SE-c9656c05-2c83-4d61-a089-f2626fc75d5b" class="se-text-paragraph se-text-paragraph-align-justify se-is-text-paragraph-block-selected"><span id="SE-c712c52c-a494-4a36-92b8-e5e89cecd49b" class="se-ff-system se-fs13 __se-node">『휘청거리는 오후』라는 소설 이야기는 그만하고 싶다. 다만, 이 작품이 던진 화두를 통해 우리 시대의 '가족을 다시 생각해 본다. </span></p>
<p id="SE-78baf8a4-d82b-4e77-85f6-46e877e1f199" class="se-text-paragraph se-text-paragraph-align-justify se-is-text-paragraph-block-selected"> </p>
<p id="SE-80a533f7-cc02-4be2-bbc7-05ef41ca9359" class="se-text-paragraph se-text-paragraph-align-justify se-is-text-paragraph-block-selected"><span id="SE-2f93c2a2-4fdf-4b2e-aace-67fa75c8b99c" class="se-ff-system se-fs13 __se-node">핵가족은 배타적 성적 독점을 제도화한 것으로 1부 1처제를 기본으로 한</span>다. <span id="SE-7221c0ce-0061-4a70-891b-94ca3791ab63">성적 관계를 결혼 생활 내부로 한정하여 사회적 혼란을 최소화하고, 부부간의 결속을 강화하며, 자녀를 안정적으로 양육하는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span><span id="SE-2231f310-313a-4a67-b297-9c4a1ed04105">그러다 보니 속성상 폐쇄적 회로에 갇힐 수밖에 없다. 결혼은 제도이고, 정서적 친밀감은 감정의 문제이므로 별개의 문제이다. 현대에 와서는 대개 사랑을 전제로 결혼하지만, 이 소설 속 초희처럼 사랑을 배제한 결혼도 있고,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결혼은 일종의 계약이었기에 신랑신부는 서로 얼굴도 못 본 채 결혼하는 일이 흔했다. 그렇게 생각하면 </span><span id="SE-303aec25-7647-4934-9c87-74353729ae8a">근대 이후 개인주의가 확산되면서 '로맨틱한 사랑'이 결혼의 조건이 되기 시작한 것인데, 문제는 이 감정의 유효기간이 짧다는 점이다. 사랑이 식으면 의리로, 자식이 성장할 때까지는 전우애로 버티다가 황혼에 이른다. 왜 "이건 아니다" 하면서도 쉽게 헤어지지 못하나? 경제적 손실 때문이다. 갖가지 제도가 기혼자 중심으로 만들어져 있고, 그것이 국가 시스템의 유지와 자본의 재생산에 훨씬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2자녀에게도 다자녀 혜택을 주며 가족을 유지하라는 국가의 요구 앞에서 '4인 가족'은 표준적 강박으로 자리잡는다. </span></p>
<p id="SE-2acd089b-b047-4f80-9f8c-a8953b426cb1"> </p>
<p id="SE-d75c7694-1060-428f-896b-92a1348f2902" class="se-text-paragraph se-text-paragraph-align-justify se-is-text-paragraph-block-selected"><span id="SE-5634e7ce-883b-4179-bae6-9355c383e3ad">하지만 '스위트홈'이라는 환상은 이미 파열음을 내고 있다. </span><span id="SE-fc424754-8427-4c3d-a1d3-17b60d28f796">그</span><span class="se-ff-system se-fs13 __se-node">리하여 대안적 공동체의 실험은 계속된다. 문탁네트워크도 그 일환이 아닌가? 돌봄은 혈연 가족의 전유물이 아니고, 실존적 환대가 될 수 있다. 정서적 유대는 혈연과 관계없이 이어질 수 있다. 마음이 어디 정한다고 되는 문제던가? 친밀감은 내 촉각이 닿는대로 뻗쳐 나가되, 타인에 대한 배려와 존중을 바탕으로 선을 지키는 것이 핵심이다. 내 자식이라도 소유물이 아님을 명확히 인식해야 하고, 아무리 가깝더라도 '타인의 방'에 무단 침입해서는 안 된다. </span></p>
<p id="SE-b986af95-af91-41b8-9cd6-13cf6eeda0ea" class="se-text-paragraph se-text-paragraph-align-justify se-is-text-paragraph-block-selected"> </p>
<p id="SE-f6ab2a36-385e-4363-9920-900f737c1e34" class="se-text-paragraph se-text-paragraph-align-justify se-is-text-paragraph-block-selected"><span id="SE-4bc1bd27-3006-4881-abc5-6903cca4251d" class="se-ff-system se-fs13 __se-node">그런 의미에서 허성이 딸들에게 보내는 사랑은 모순적이다. 그는 다 주고 싶어 했으나, 동시에 다 소유하고 싶어 했다. 정서적 교감이 없는 일방적 시혜가 사랑일 수 있을까? 사랑한다면, 돈을 갖다댈 것이 아니라, 딸들의 마음을 들여다봐야 하고 딸들이 잘못된 것을 요구하면 갈등을 무릅쓰고 아니라고 이야기해야 했다. 허성은 '유능한 가장'으로 인정받고 싶어하는 자기 욕망에 중독되어 있었고, 돈을 매개로 "아빠가 좋아요"하는 딸의 지지를 얻을 수 있다는 허상을 믿었다. 허성이라는 이름은 가족제도라는 공허한(虛) 성공(成)을 좇아, 헛된(虛) 성(城)을 쌓았다는 의미일지도 모른다. </span></p>
<p id="SE-a61ceabd-24ae-43e7-9d3e-54d0a59f361c" class="se-text-paragraph se-text-paragraph-align-justify se-is-text-paragraph-block-selected"> </p>
<p id="SE-ecddda5e-90b0-4e51-80ba-65e123f7fb33" class="se-text-paragraph se-text-paragraph-align-justify se-is-text-paragraph-block-selected"><span id="SE-9d3544fa-5aef-4ef1-8f0b-ea4ee21e9941" class="se-ff-system se-fs13 __se-node">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무엇이든 요구하고 침범해도 된다는 생각은 가족제도의 악용이고, 폭력이다. 가족이라는 지층에서 벗어나 관계를 사람과 사람이라는 본질로 생각하면 보다 심플해지지 않을까 한다. 친구를 대하듯, 내 주변 다른 사람을 대하듯 서로의 실존을 존중하며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에서부터 새로운 관계가 시작될 것 같다. </span></p>
<p> </p>]]></description>
			<author><![CDATA[은사자]]></author>
			<pubDate>Sun, 19 Apr 2026 12:56:54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naidum.org/?kboard_redirect=25"><![CDATA[집중탐구학교]]></category>
		</item>
				<item>
			<title><![CDATA[나이듦 대중지성 7회차 &lt;몸의 일기&gt; 전반부 후기]]></title>
			<link><![CDATA[https://naidum.org/?kboard_content_redirect=596]]></link>
			<description><![CDATA[<p> 이제 나이듦세미나가 7부 능선을 넘어가고 있다.  낯설게 만났던 선생님들의 발췌문과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람들보다도 더 편안하고 솔직한 분위기에서 나의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가 공동의 신체를 만들어가고 있는 것 같아서,  모든 분들의 다양한 특성이 이 모임에서 빠질 수 없이 소중하다는 생각이 든다.  </p>
<p> 이번 책은 &lt;몸의 일기&gt;라고 하는 제목과 일기로 되어 있어서 읽으면서도 허구라는 것을 잊어버리고 주관적으로 빠져들게 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인지 읽다보면 잊고 있던 자신들의 &lt;몸의 기억&gt;들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되었는데,  세미나를 통해서 여러 샘들도 그렇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각자 살아온 삶의 조건과 몸의 조건이 다르기에 '몸'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각자 달랐다.</p>
<p> 우선 '몸의 통증'과 질병의 기억이 떠오른 분들의 이야기. </p>
<p> 먼저  머루님은 극심한 복통의 주기적으로 찾아왔을 때의 두려움과 몸이 아파서 약속을 취소할 때의  무기력감, 그리고 통증이 사라질 때의 안도감과 실수를 반복하더라도 산다는 것의 감동에 대해서  이야기 하셨는데, 그 여운이 오래 남는다. 저번 세미나에서도 머루님은 외로움을 수용하면서도 어떻게 사람들과의 기쁜 관계와 유대감을 갖고 살 것 인가라는 질문을 던졌었다.  새봄 님이 올려주신 이야기, 새봄 님이 갑작스레 눈이 아파서 병원에 입원했을 때의 경험을 코난님이 대신해서 충분히 잘 전달해주셨다.  누구나 비올레타 아주머니가 필요하다고 하셨는데, 새봄님에게는 그런 코난님이 계셔서 안심이 되실 것 같다. 또한 코난님 자신도 그동안 워크홀릭으로 살면서 자신의 몸에 귀를 기울이지 못해서 거북목와  허리디스크 통증이 찾아왔음을 말씀하셨다.  세 분의 이야기를 통해서 한참을 잊어버리고 있던 우리들의 과거의 통증의 기억도 건드려졌다.  한편 통증을 잘 모르고 살아온 사람들은  평소 다른 사람들의 통증에 대한 감수성이 부족하다는 것을 이야기했다.</p>
<p>다음은 '몸의 향연'과 '건강한 몸이란 어떤 것일까' 에 대한 이야기</p>
<p>무지개 전사님은 자신의 노후를 건강하고 단단하게 보내려 했던 계획이 어머니의 예기치 못한 병환으로 인해서 얼마나 바뀌었는지, 그리고 요양 병원에서 자신의 몸의 생리 조절이 불가능한 상태의 환자를 통해 &lt;몸의 일기&gt;에서 주인공이 자신의 의지대로 몸을 통제할 수 없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이야기해주셨다.  그러면서 사춘기 소년 시절부터  "어떻게 하면 내 몸을 바꿀까" 라는 이상적인 몸에 대한 관심을 가졌는데, 결국  보여지는 근육질의 몸이 아니라  잘 기능하는 몸이 나은 것 같다고 하셨다.  마리님은 책에서 '몸의 향연'과 '사랑의 환희'에 대해서 꽂히신 부분을 달콤하게 말씀해주셨다. 특히 테니스를 칠 때 주인공이 자신의 몸을 자유롭게 다루는 모습과 한눈에 사랑에 빠지는 모습을 통해  우리가 잊기 쉬운 삶의 절정의 아름다움과 기쁨을  새삼 느끼게 해주었다.  소요유님은 특히 이번 세미나를 하면서 자신의 몸이 아팠던 기억을 망각하고 살았는데 갑자기 떠오른 이야기, 지금까지  순결 교육만 받았지 몸에 대한 교육은 없었구나 하는 말씀,  젊었을 때는 상처로 보였던 어린 시절들이 나이가 들면서 자신의 몸과 더불어 자신이라는 존재가 귀한 대접을 받았다는 것을 감사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하셨다. 자신의 삶과 몸을 있는 그대로 긍정할 수 있게 되는 것이 바로 '몸의 향연'이겠지요. </p>
<p> 마지막으로 몸과 정신의 분열 상태에 대한 이야기</p>
<p> 앙코르석공님은 젊은 시절에 소설에 대한 흥미를 잃으셨기에 책을 읽기가 힘드셨지만 '내 정신이 내 몸에게 느끼게 하는 것'을  최근 뇌과학의 도움을 얻어 흥미를 가지려고 노력 중이라고 하셨다.  늘 객관적이고 과학적으로 알고자 하시는 열의가 느껴지신다.   베짱이님은 남성으로서 가부장제와 정치적 올바름, 도덕성을 가치로 내세워 솔직한 몸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을 막았던 사회적, 문화적 분위기 속에서 어떻게 '나'라는 주체가 분열된 상태로 살아 왔고, 지금도 살고 있는지를 말씀해주셨다.  나 역시 여성으로서 겪었던 모순된 삶, 정신과 육체의 연결이 끊어진 불화의 상태로 살아왔고, '성적인 것'을 터부시 하는 분위기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하고 있음을 확인하는 것이 이 책에서 가장 많이 나에게 건드려진 부분이었다.   지식을 통해서 알기는 하는데, 나의 의식도 분열되어 있고 무의식은 거의 그대로 방치되어 있는 듯하다.  엄지님이 쓰셨듯이 '내 몸을 안다는 것은 어렸을 적 내가 이상이라 생각했던 틀에 어떻게 든 바꿔 맞추려 하던 걸 표기하고 내 성격의 고유함을 받아들이는 것과 같다..... 구멍난 존재를 있는 그대로 소중히 끌어안고 살아가기.'</p>
<p> 앞으로 어떻게 자신의 몸과 화해를 이루어낼 것 인가에 대한 새로운 말과 몸짓의 언어들을 만들어갔으면 좋겠다.  그래서 낯선 외국어를 익히듯이 이 새로운 언어로 배워서 새로운 세계를 열어가고 싶다.^^  </p>
<p> </p>
<p> </p>
<p> </p>]]></description>
			<author><![CDATA[블루밍]]></author>
			<pubDate>Fri, 17 Apr 2026 09:36:33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naidum.org/?kboard_redirect=10"><![CDATA[나이듦대중지성]]></category>
		</item>
				<item>
			<title><![CDATA[노인돌봄서비스 인력의 전망과 정책방향 - KDI(2026.04.16)]]></title>
			<link><![CDATA[https://naidum.org/?kboard_content_redirect=594]]></link>
			<description><![CDATA[<p>초고령 인구가 증가하는 가운데 노인돌봄 일자리에 대한 기피로 노인돌봄서비스 인력 부족이 심화될 것으로 전망된다. 노인 인구의 삶의 질 유지를 위해서는 노인돌봄서비스 일자리의 질적 제고를 통한 인력 확충이 절실하나, 국내 인력에 대한 유인책 제고만으로는 한계가 있으므로 외국인 인력 활용을 위한 비자 정책의 변화가 요구된다. 또한 노인돌봄 인력의 노동생산성 제고를 위해 돌봄 로봇 기술을 활용하는 방안을 적극적으로 모색할 필요가 있다.</p>
<p> </p>
<p>[목차]</p>
<p><b>Ⅰ.  들어가며</b></p>
<p class="p_type03"><b>Ⅱ.  장기요양서비스 수급 전망</b></p>
<p class="p_type02"><b>   1. 장기요양서비스 수요 전망</b></p>
<p><b>   2. 장기요양서비스 공급 전망: 요양보호사 인력 전망</b></p>
<p><b>III.  외국인 요양보호사 현황과 외국인 인력 정책의 개선 방향</b></p>
<p><b>Ⅳ.  돌봄 로봇 활용 현황과 정책 대응</b></p>
<p> </p>
<p><a href="https://www.kdi.re.kr/research/focusView?pub_no=19161&amp;utm_source=stibee&amp;utm_medium=newsletter&amp;utm_content=fo_Kjunghyun_oldman&amp;utm_campaign=260416">원문 보기</a></p>]]></description>
			<author><![CDATA[나이듦연구소]]></author>
			<pubDate>Thu, 16 Apr 2026 16:15:10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naidum.org/?kboard_redirect=21"><![CDATA[통계]]></category>
		</item>
				<item>
			<title><![CDATA[나이듦대중지성 시즌1 7회차 세미나 &lt;몸의 일기-1&gt; 공지]]></title>
			<link><![CDATA[https://naidum.org/?kboard_content_redirect=592]]></link>
			<description><![CDATA[<p>제목만 보면 논-픽션을 예상하지만 이번 우리의 나이듦 세미나 대상은 소설 입니다. 나이듦 세미나 3년차인 저도 소설은 처음 읽는데요, 문학 작품이 나이듦을 고찰하는 데 있어 어떤 감흥을 줄 수 있을지 여러분들의 감상이 기대됩니다. ^^</p>
<p> </p>
<p>이 소설은 1923년생 남자가 1935년부터 2010년까지 70여 년간 기록한 '신체 관찰 일기'로 우리는 이 남자의 이름도 정확한 직업도 알지 못합니다. 그가 하나도 빼놓기 않고 기록하려 한 몸의 감각, 느낌들로 삶의 궤적을 따라갈 뿐이죠. </p>
<p> </p>
<p>저는 이 남자의 일기를 몸과의 화해 일지로 해석했습니다. 남자가 몸의 일기를 쓰기로 결심하고, 거울에 비친 낯선 모습의 자신을 마주하려 용기를 내는 대목이 인상적 이었어요.  저는 제 몸과의 화해를 아주 늦게 시작했습니다. 몸의 성장만 조숙해서 또래에 비해 껑충 큰 키에 팔, 다리는 조율 되지 못하고 허우적거리는 꼴이라 쉽게 넘어져 다치거나 놀림감이 되기 일쑤였습니다. 어설픈 몸놀림을 드러내는 게 싫어 체육 활동은 질겁을 했고, 사춘기가 되자 위로 자라던 몸이 옆으로도 무섭게 그 부피를 늘려 나가버리니 제 몸을 꽤나 원망만 했었더랬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원망만 하고 방치한 몸은 나를 봐 달라고 아우성을 치기 시작했습니다. 부러진 뼈가 붙지를 않고, 피부와 코, 눈에 각종 알러지 반응이 나타나며 일상 생활이 어려울 지경까지 간 적도 있었습니다. 그제서야 내 몸을 이해하고 돌보아야 한다는 자각이 강하게 들면서 요가원을 다니며 운동을 시작하고 몸의 소리를 귀 기울여 듣게 되었습니다. 꽤 건강해 졌다고 자부하던 시절도 잠시, 요즘은 조금만 방심하면 어지럼증, 소화불량 등으로 경보를 울려대는 몸을 애써 진정시키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p>
<p> </p>
<p>여러분들의 솔직한 몸의 이야기도 듣고 싶습니다. </p>
<p>아래는 발제문에 올린 토론 거리인데요, 이 외에 느낌이나 질문을 자유롭게</p>
<p>단, 마감 시한은 맞추어서 <strong>월요일 (13일) 밤 9시</strong>까지 댓글로 올려 주시기 바랍니다.</p>
<p> </p>
<ul>
	<li>‘존재의 장치’로서의 몸에 대해 동의 하시나요? 우리에게 '몸'은 어떤 의미 (존재의 장치, 도구, 짐 등)일까요?</li>
	<li>‘몸의 일기’에 묘사된 수준으로 신체의 반응에 대해 가족이나 친구에게 솔직하게 얘기한 경험이 있을까요? 가장 인상 깊었던 '몸의 기록' 장면에 관한 얘기를 나눠보고 싶습니다.</li>
	<li>몸의 일기를 쓴다면 어떤 주제 (예: 아픈 기억, 특정 감각, 훈련 등)가 큰 비중을 차지할까요?</li>
</ul>
<p> </p>]]></description>
			<author><![CDATA[자갈]]></author>
			<pubDate>Sat, 11 Apr 2026 20:53:51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naidum.org/?kboard_redirect=10"><![CDATA[나이듦대중지성]]></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이제 우리는 &lt;도덕경&gt; 낭송에 들어갑니다]]></title>
			<link><![CDATA[https://naidum.org/?kboard_content_redirect=591]]></link>
			<description><![CDATA[<p>장자, 외잡편은 어떠셨나요?</p>
<p>아서 웨일리는 &lt;장자&gt;가  “세상에서 가장 심오한 책 중 하나일 뿐만 아니라 가장 재미있는 책 중 하나”라고 말한바 있습니다. 지난번 포스팅에서도 말씀드렸듯이 그것은 &lt;장자&gt;가 이질적인 것들이 공존하는 다성적 텍스트이고, “가장 논리적인 상황에서조차 생략을 선호하는 시인”(그레이엄)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p>
<p>그러나 외, 잡편으로 가면 이야기가 늘어지고, 설명하는 문체여서 좀 재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후대의 연구자들은 이게 대부분 후대의 작품이라고 말하는 것이지요.</p>
<p> </p>
<p>아무튼...그래도 장자를 다 읽었습니다. (천하편 좀 남았지만)</p>
<p>그리고 공지드린대로 이제 노자 읽습니다.</p>
<p>이번 주말, 우리 읽을 책 앞부분 해설을 좀 읽어보시길 권합니다.</p>
<p>아니면 여기라도</p>
<p><a href="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5548">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5548</a></p>
<p> </p>
<p>톡에 올린 것 다시 정리해볼게요</p>
<p> </p>
<p><strong>1. 판본: 전승된 텍스트(통행본)와 발굴된 텍스트(출토본)</strong></p>
<p> </p>
<p>노자는 장자보다 더 텍스트 문제가 큽니다. 최근에 출토본이 발견되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심지어 지금 노자 읽어도 소용없다. 조만간 또 어떤 땅에서 무엇이 나올지 모른다...는 농담도 횡행합니다. ㅋㅋ</p>
<p> </p>
<p>&lt;통행본 (수천 년간 전해온 표준)&gt;</p>
<p> </p>
<p>1)왕필본 (226~249): 20대 천재 학자의 주석본. 송대 이후 현재까지 가장 중요한 표준 판본.</p>
<p>2)하상공본 (한대 성립 추정): 몸(양생)과 나라(치국)를 다스리는 법을 연결.</p>
<p>3)부혁본 (574 발굴/교정): 당대 도사 부혁이 고판본을 바탕으로 교정한 신뢰도 높은 판본.</p>
<p> </p>
<p>&lt;출토본 (최근 땅속에서 발견)&gt;</p>
<p> </p>
<p>1)곽점 죽간본 (B.C. 350년경): 1993년 발굴. 현존 최고(最古) 판본. 통행본의 1/3 분량(1장·38장 없음).</p>
<p>2)마왕퇴 백서본 (B.C. 200년경): 1973년 발굴. 비단에 씌었으며, 도(道)보다 덕(德)을 앞세운 『덕도경』 체제.</p>
<p> </p>
<p><strong>2. 주석서: 시대별 사유의 변화</strong></p>
<p> </p>
<p>1)초기 (전국~한대):</p>
<p>-한비자(B.C. 280~233): &lt;해로&gt;, &lt;유로&gt;를 통해 통치술로 해석.</p>
<p>-회남자(B.C. 179~122): &lt;도응훈&gt;에서 도가적 우화로 풀이.</p>
<p> </p>
<p>2)종교·양생 (한대~삼국):</p>
<p>-장로(?-216): 《상아주》. 오두미교(도교) 관점의 주석.</p>
<p>-하상공장구: 황로학(양생론) 중심. 한의학적 사유와 밀접.</p>
<p> </p>
<p>3)철학 (위진~현대):</p>
<p>왕필(226~249): 위진 '현학'의 정수이자 현대 학계의 핵심 지침서.</p>
<p> </p>
<p><strong>3. 우리가 읽을 책은 진고응의 &lt;노자주역급평개(老子注譯及評介)&gt;입니다.</strong></p>
<p> </p>
<p>왕필본을 기본으로 하되,</p>
<p>곽점본(B.C. 350)과 백서본(B.C. 200) 등 최신 출토 자료를 바탕으로 주석을 달고 (주)</p>
<p>고문을 현대 중국어로 번역하고 (역)</p>
<p>그리고, 현대 철학적 관점에서 자신의 해설을 덧붙인 (평개: 평가와 소개) 책입니다.</p>
<p> </p>
<p><strong>4. 노자, 장자가 해석하기가 까다롭다보니까 영역본을 함께 보는 경우도 많습니다. (사실 주역도 그렇습니다)</strong></p>
<p> </p>
<p>James Legge나 D.C. Lau, Arthur Waley의 번역본이 정평 있으며 아마 인터넷 뒤지면 영어 번역본 원문 찾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참고로 저는 영역본을 읽어본 적은 없습니다)</p>
<p> </p>
<p> </p>
<p><strong>5.  원문을 읽으실 수 있다면 좋을텐데</strong></p>
<p> </p>
<p>노자는 81장, 아주 짧습니다. 전체가 아포리즘이구요. 원문이 중요합니다만... </p>
<p>아무튼 도덕경 공식 번역본 사이트를 아직 못 찾았습니다. </p>
<p>원문은 여기서 보실 수 있네요.</p>
<p><a href="https://ko.wikisource.org/wiki/%EB%B2%88%EC%97%AD:%EB%8F%84%EB%8D%95%EA%B2%BD">https://ko.wikisource.org/wiki/%EB%B2%88%EC%97%AD:%EB%8F%84%EB%8D%95%EA%B2%BD</a></p>]]></description>
			<author><![CDATA[문탁]]></author>
			<pubDate>Sat, 11 Apr 2026 07:56:05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naidum.org/?kboard_redirect=24"><![CDATA[양생프로젝트]]></category>
		</item>
				<item>
			<title><![CDATA[[7회 공지- 휘정거리는 오후(2)] - 모녀간이란, 형제간이란 얼마나 지겨운 악몽인가]]></title>
			<link><![CDATA[https://naidum.org/?kboard_content_redirect=590]]></link>
			<description><![CDATA[<p>전, &lt;휘청거리는 오후&gt;의 주제를 표현하는 단 한 문장을 뽑으라고 하면 주저하지 않고 바로 이 문장, “모녀간이란, 형제간이란 얼마나 지겨운 악몽인가”(1권, 296쪽)를 뽑겠습니다. 물론 ‘모녀’ 자리에 모자, 부녀, 부자 그 어떤 단어가 들어가도 상관없을 거구요.</p>
<p> </p>
<p>아무튼 지난 시간 제가 컨디션 난조 등으로  더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제대로 하지 못한 것 같은 찝찝함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번 공지는 지난 시간 (즉 1권)을 좀 복기하는 것으로 대체할까 합니다.</p>
<p> </p>
<p><span style="font-size:18px;"><strong>1. 물신(fetish) 혹은 물신주의에 대해</strong></span></p>
<p> </p>
<p>우리는 &lt;휘청거리는 오후&gt;를 통해 1970년대의 물신주의와 마주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 개념을 조금 더 정확히 짚고 넘어갈까요?</p>
<p> </p>
<p>‘물신(fetish)’라는 용어 자체는 종교학과 인류학에서 먼저 등장했지만(물신=신통력 있는 물건), 맑스는 이를 자본주의 분석에 적용하여 ‘상품 물신성(commodity fetishism)’이라는 개념으로 재구성합니다. 그는 &lt;자본론&gt;에서, 상품이 단순한 사용가치를 넘어 교환가치를 지니는 순간, 인간들 사이의 관계가 더 이상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고 상품 간의 관계처럼 나타나는 현상을 지적합니다.</p>
<p> </p>
<p>좀 더 쉽게 말하면, 이전 사회에서는 물건을 만드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가 비교적 분명하게 보였습니다. (문탁에서도 그렇죠. 쌍화탕을 누가 다리는지, 화장품을 누가 만드는지 우리는 잘 압니다. 그래서 화장품을 살 때는 가성비를 따지기 보다 친구들의 삶을 고려합니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그러한 관계가 점점 은폐됩니다.  마르크스의 표현을 빌리면, “사람들 간에 분명히 존재하는 사회적 관계”가 “물건들간의 관계 같은 신비한 형태”를 띠게 되는 것입니다. 즉 물건은 더 이상 인간의 노동과 관계를 반영하는 결과물이 아니라, 마치 스스로 가치와 힘을 지닌 존재처럼 등장합니다. 이때 물건은 일종의 ‘물신’이 됩니다.</p>
<p> </p>
<p><img src="https://www.50plus.or.kr/upload/im/2018/07/fdda4274-75fe-4fd3-b432-425d0999f183.jpg" alt="fdda4274-75fe-4fd3-b432-425d0999f183.jpg" width="564" height="376" /></p>
<p> </p>
<p>특히 화폐는 모든 상품과 교환 가능한 ‘일반적 등가물’로서, 상품 세계 전체를 매개하는 특수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그래서 화폐는 단순한 상품이 아니라, 상품 세계 전체를 조직하는 중심적인 물신이 됩니다. 바로 “돈,돈,돈” 하는 세상이 되는 것이지요.</p>
<p> </p>
<p>이 점에서 자본주의 사회는 강한 의미에서 물신주의적 성격을 띠게 됩니다. 물건과 화폐는 단순한 수단을 넘어, 삶을 조직하고 관계를 규정하는 기준이 됩니다.</p>
<p> </p>
<p><span style="font-size:18px;"><strong>2. 김중배의 다이아는 어떻게 공회장의 에메랄드 목걸이가 되었을까?</strong></span></p>
<p> </p>
<p>&lt;휘청거리는 오후&gt;에서 이 물신주의는 결혼이라는 사적 영역으로 스며들며, 예비 사위 조광욱 한복의 ‘금단추’ 같은 예단 혹은 상처한 공회장이 초희에게 주는 ‘에메랄드 목걸이’ 같은 선물로 등장합니다.</p>
<p> </p>
<p>그런데 전 이 지점에서 느닷없이 김중배의 다이아가 떠올랐습니다. 아시죠? 이수일과 심순애...그리고 김중배. 이수일이 대동강 부벽루에서 변심한 심순애를 원망하며 그 유명한 대사, “김중배의 다이아가 그렇게 좋더냐?” 라는 멘트를 날리죠. 그게 1913년이에요. 일본 소설 &lt;금색야차&gt;를 번안한 &lt;장한몽&gt;이 1913년 5월부터 &lt;매일신보&gt;에 연재되었으니까요. 아무튼 이 대사는 100년이 넘도록 한국사회에서 사랑을 배신한 물신주의를 상징하는 관용구가 되었고, 돈과 사랑에 대한 원형적 무의식을 형성했습니다. ㅋㅋ</p>
<p> </p>
<p>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서사가 ‘신파’였다는 점입니다. &lt;장한몽&gt;에서 물신은 분명 문제적입니다. 사랑을 배신하게 만드는 원인이며, 도덕적으로 비난받아야 할 대상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극복 가능한 것으로 남습니다. 이수일은 복수를 위해 돈을 모으고, 심순애는 불행한 결혼 끝에 자살을 시도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두 사람이 재회하며 용서와 화해로 마무리되니까요. 권선징악, 해피엔딩, 하여 신파!!</p>
<p>즉 이때까지만 해도 물신은 문제이되, 끝내 도덕적 질서 속에서 회수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p>
<p> </p>
<p><img src="https://cdn.1gan.co.kr/news/photo/202505/264575_206345_4852.png" alt="김중배의 다이아몬드 반지가 그렇게도 좋더냐?” &lt; 문화일반 &lt; 문화 &lt; 기사본문 - 일간경기" width="442" height="553" /></p>
<p> </p>
<p> </p>
<p>그러나 &lt;휘청거리는 오후&gt;는 전혀 다른 길을 갑니다. 이 소설에는 신파적 화해도 도덕적 회수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물신은 더 이상 사랑을 배신하는 예외적 사건이 아니라, 사랑과 결혼 자체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으로 작동합니다. 박완서는 물신이 어떻게 가족과 결혼을 재편시키는지, 정말 낭만, 판파지, 신파라고는 0.00000001도 넣지 않은 채 가차없이 낱낱이 해부합니다. 정말, 소설계의 해부학자가 따로 없더군요^^</p>
<p> </p>
<p><strong><em>박완서를 통해서 본 1970년대의 물신주의를 좀 더 이야기해볼까요?</em></strong></p>
<p> </p>
<p>저는 우선, 물신이 더 이상 특별한 욕망의 대상이 아니라(이것은 공단이불이 아닙니다) 마치 공기처럼 주어진 조건이 되고 있다는 점이 눈에 띄였습니다. 사람들이 그것을 선택하거나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 안에서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한다고나 할까요? 물신주의는 민여사가 말하는 “세상물정”(1권, p58)이고, 초희가 말하는 “시대”(1권, p90)이며,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의 에피스테메로 작동합니다.</p>
<p> </p>
<p>그렇다면 이러한 변화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요? 지난 시간에도 이야기했듯이, 이는 국가 주도의 산업화와 도시화를 통해 형성된 사회적 조건(개발독재)과 깊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박정희는 정당성이 없는 군부구데타로 집권한 이후 경제개발계획을 밀어붙이면서 ‘중산층’이라는 삶의 모델을 적극적으로 제시하고, 그것을 아파트라는 구체적인 생활 양식으로 가시화합니다. 아파트는 단순한 주거 형태가 아니라, ‘정상적인 삶’의 표준이 되었고, 중산층은 하나의 계급이라기보다 따라야 할 삶의 형식으로 작동하게 됩니다.</p>
<p> </p>
<p>동시에 이 시기는 사회적 유동성이 상당히 큰 시기였습니다. 교육을 통한 계층 이동이 가능했던 시기였고, 이른바 “개천에서 용 난다”는 서사가 현실적 설득력을 갖던 때였습니다. 이 점에서 1970년대 한국 사회는 흔히 말하는 ‘아메리칸 드림’과 유사한 구조를 갖는 것처럼 보입니다. 서부 개척 시대, 금광을 찾아 이동하던 사람들처럼, 더 나은 삶을 향해 이동할 수 있다는 믿음이 존재했던 것이지요. (혹시 영화 &lt;파 앤 어웨이&gt; 보셨나요? 그야말로 금광을 향한 ‘질주’!!! )</p>
<p> </p>
<p><img src="https://image.yes24.com/momo/TopCate0010/hani/L_1039166.jpg" alt="Far &amp; Away (파 앤드 어웨이)(한글무자막)(Blu-ray)" /></p>
<p> </p>
<p>물론 여기서 이야기하는 것은 사회학적 분석이 아닙니다. 그것이 실제로 얼마나 가능했는가가 아니라, 그러한 가능성이 어떻게 이미지로 작동했는가에 있습니다. (사족이지만, 저는 근대 여성교육과 관련해서도...그것을 ‘학교 열망’이라고 부른 바 있습니다) 허성씨네 세 딸 역시 이러한 조건 속에서, 각기 다른 방식으로 그 ‘가능성의 이미지’를 살아내고 있는 것 같네요.</p>
<p> </p>
<p> </p>
<p><span style="font-size:18px;"><strong>3.신데렐라 스토리는 왜 사랑받는가?</strong></span></p>
<p> </p>
<p>“길라임씨는 언제부터 그렇게 예뻤나”</p>
<p>네, &lt;시크릿 가든&gt;의 가장 유명한 대사이지요. 계층을 뛰어넘는 사랑, 선택받는 여성, 그리고 그 선택을 통해 완성되는 삶. 말 그대로 낭만이자 판타지!!</p>
<p> </p>
<p><img src="https://encrypted-tbn0.gstatic.com/images?q=tbn:ANd9GcSUhMRXgM2jEfYB2hzC36PSZcbso2AJv3Bubw&amp;s" alt="시크릿 가든 3회 - 길라임씨는 몇살때부터 그렇게 이뻤나? : 네이버 블로그" width="500" height="280" /></p>
<p> </p>
<p>이것을 비판하는 것은 쉽습니다. 하지만 더 유효한 질문은  왜 그것이 끊임없이 반복되고 사랑받는지와 관련된 것입니다. 아마 그것은 여성의 계층 이동이 ‘노력’이 아니라 ‘선택받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현실을 전도된 형태로 너무 잘 그리고 있어서가 아닐까요? 그래서 다시 이 신데렐라 서사는 비판받아 마땅합니다. 그것이 단순한 판타지 (현실에서 실현불가능하다는 의미)여서가 아니라, 결혼이라는 교환 구조를 은폐하고 교란하는 하나의 장치로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현실의 결혼은 철저히 조건과 자원의 결합인데, 신데렐라 서사는 그것을 ‘운명’과 ‘사랑’의 이야기로 번역합니다. 말하자면, 교환을 낭만으로 위장하는 서사인 셈입니다.</p>
<p> </p>
<p><em><strong>그렇다면 현실에서 여성의 ‘성공한 결혼’은 어떤 조건 위에서 가능했을까요. 역시 &lt;휘청거리는 오후&gt;는 당대 그 조건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아주 미시적으로 그리고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strong></em></p>
<p> </p>
<p>일단, 여성에게 미모는 필수적입니다. (&lt;도시의 흉년&gt;의 수연도 &lt;휘청거리는 오후&gt;의 초희도 상당한 미모의 소유자입니다.) 지영샘이 이야기했듯이 미모는 여성이 결혼이든 취업이든 교환 시장에서 자신을 비싸게 팔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자원(교환가치)입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일정 수준 이상의 학벌은 남편과의 교양과 수준을 맞추기 위한 조건이지요. (이것은 근대 신여성때부터 등장했습니다. 피아노도 좀 치고, 타이핑도 좀 하고, 아이들 숙제도 봐줄 수 있는 ‘교양있는 주부’^^) 그런데 우리는 소설 속에서 또 하나의 조건을 목격합니다. 즉 어느 정도의 수준 있는 집안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체로 선호되었던 것이 교육자 집안이나 중소기업 사업가 집안 아니었을까요? 허성씨 같은 ‘공업인’은 자격에 못 미칩니다.</p>
<p> </p>
<p>이쯤되면 흥미로운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결혼 교환 시장에서 남성은 개인의 능력(그것으로 차지할 수 있는 직업)이 가장 큰 상품입니다. 이에 비해 여성은 개인의 능력이 아니라 여러 조건의 조합으로 상품성이 만들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결국 여성의 ‘성공한 결혼’은 개인의 승리라기보다, 부모의 자본력과 딸의 신체적, 학력적 자본이 결합해 이루어낸 일종의 가족 프로젝트가 됩니다. 자, 드뎌 우리는 근대 핵가족의 작동방식을 분석할 수 있는 지점에 이르렀습니다.</p>
<p> </p>
<p> </p>
<p><span style="font-size:18px;"><strong>4. 허성, 혹은 근대 가족의 가장</strong></span></p>
<p> </p>
<p>지난 세미나에서 가장 핫했던 토론은 바로 ‘허성’씨를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문제였습니다. 한쪽에서는 손가락이 잘려 나가며 가족을 부양한 그에게 연민을 느끼는 ‘이입파’가 있었고, 다른 한쪽에서는 그가 보여주는 무기력과 우왕좌왕, 그리고 순결 이데올로기 등을 날카롭게 꼬집는 ‘비판파’가 있었지요.</p>
<p> </p>
<p>저는 지난 시간 논쟁?을 보면서 보면서 1990년대 중반 한국 사회를 휩쓸었던 소설 &lt;아버지&gt;(김정현, 1996)가 떠올랐습니다. 기억나시죠? 6개월 만에 200만 부가 팔리고, 중년 남성들을 책 사게 만들고, 대한민국의 아버지들을 다 울렸다는, 소위 ‘아버지’ 신드롬과 ‘고개 숙인 아버지’ 담론을 만들어냈던, 바로 그 소설 말입니다. 어쩌면 허성씨는 가족을 위해 자신을 지워버린, ‘현금인출기’로서의 가장을 표현한다는 점에서 소설 &lt;아버지&gt;의 선구적 모델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허성 감정 이입파는 바로 이 점에 주목하신거겠죠.  (사실, 이 아버지는 &lt;폭싹 속았수다&gt;에서도 반복됩니다. 박보검을 통해. ㅋㅋㅋ)</p>
<p> </p>
<p><img src="https://media.bunjang.co.kr/product/205756075_1_1668742011_w360.jpg" alt="김정현 장편소설 아버지" /></p>
<p> </p>
<p>그런데 저는 그때도 그 ‘고개숙인 아버지’ 담론에 분기탱천했었습니다. 아니 여자들은 평생 고개 숙이며 살아왔는데... 하면서 말입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가부장제의 모순을 아버지라는 개인의 ‘피해 서사’로 바꿔버리는 서사전략입니다. 이것은 신데렐라 판타지 만큼이나 유해한 것입니다. 가부장의 고통을 강조함으로써 그 체제가 생산해내는 폭력과 소외를 가려버리기 때문입니다.</p>
<p> </p>
<p><em><strong>우리는 &lt;휘청거리는 오후&gt;를 통해 전통적 가부장제 - 가문을 대표하던 ‘호주’와 봉제사접빈객을 미덕으로 삼던 ‘아내(며느리)’ - 가 압축적 근대화 시기에 어떻게 재편되는지를 구체적으로 보고 있습니다.</strong></em> 전통적 권위가 붕괴된 자리에서 아버지는 가문을 지키는 어른이 아니라, 자본을 수혈해 가족의 계급적 생존을 책임지는 ‘자산 관리자’가 되어가고, 포스트 부모 세대인 초희와 우희 같은 자녀들은 부모의 욕망이 투사된 ‘최종 생산물’이 되어가는 과정을 말입니다.</p>
<p> </p>
<p>아시겠지만 모든 비극의 원인을 “문제는 가부장제다” (혹은 "문제는 돈이다")라고 뭉뚱그리는 것은 ‘결론은 버킹검’ 식의 도식적인 해답이기 때문에 우리가 소설을 읽고 확보해야 할 지평을 축소시킬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진짜 던져야 할 질문은 이 압축적 근대화 시기에 가부장제라는 메커니즘이 어떻게 재편되고 있는가? 부모는? 자식은? 어떤 욕망과 좌절, 어떤 불안과 원망을 가지고 있는가이고, 이것을 좋은 소설만이 가질 수 있는 구체적인 대사나 장면을 통해 미시적으로 분석하는 것입니다.</p>
<p> </p>
<p>저는 &lt;휘청거리는 오후&gt;와 드라마 &lt;스카이 캐슬&gt;이 40여년의 시간차와 상관없이 비슷한 가족 메카니즘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어쩌면 민여사 혹은 초희(우희, 말희)의 모습을 여전히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p>
<p> </p>
<p><img src="https://www.newsian.co.kr/news/photo/201812/33577_10645_541.jpg" alt="김성수의 문화 포커스] SKY캐슬 : 입시지옥과 계층상승욕구의 상관관계 &lt; 김성수의 문화 포커스 &lt; 스페셜칼럼 &lt; 기사본문 - 뉴시안" width="450" height="234" /></p>
<p> </p>
<p> </p>
<p>이번 하편 세미나에서는 이 작업을 좀 더 정치하게 해봅시다. 즉 근대 한국 가부장제가 어떻게 구성원 개개인의 실존을 잠식하며 파국으로 치달았는지 더 깊이 이야기봅시다. 자체의 모순으로 인해 파열될 수밖에 없는 그 지겨운 ‘가족이라는 악몽’의 실체를 함께 들여다보고 싶습니다.</p>
<p> </p>
<p> </p>
<p>피에쑤</p>
<p>1.이번 메모는 지금처럼 씨앗문장쓰고, 분석하기를 하셔도 좋고, 아예, 토론 토픽을 두, 세개 정리해서 올리셔도 됩니다. </p>
<p>2.이번 세미나는 조별토론으로 진행할까 합니다. 좀 더 많은 분들이 더 열심히 토론에 함께 할 수 있도록^^</p>
<p> </p>
<p> </p>]]></description>
			<author><![CDATA[문탁]]></author>
			<pubDate>Sat, 11 Apr 2026 06:45:13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naidum.org/?kboard_redirect=25"><![CDATA[집중탐구학교]]></category>
		</item>
				<item>
			<title><![CDATA[&lt;해파리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gt; 후반부 후기]]></title>
			<link><![CDATA[https://naidum.org/?kboard_content_redirect=589]]></link>
			<description><![CDATA[<p>&lt;해파리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gt; 후반부 후기</p>
<p>어제 다같이 소감을 나누면서 이 책에 대한 거부감을 조금이라도 덜어내고 이해를 확장시킬 수 있었습니다.</p>
<p> </p>
<p>많은 분들이 3장을 읽고, 모든 몸에게 적용될 수 있는 '획일적인 정답'은 없다는 점에 공감해주셨어요. 사람들이 건강에 좋다고 하는 것을 무조건 따라하는 게 아니라, 먼저 내 몸의 고유한 특성을 자세하게 이해하는 것부터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막연하게 알고 있던 건강 관련 상식들의 과학적인 근거를 이해하게 되어서 유익했다는 소감도 있었습니다. 동시에 과학적 연구 결과에 개입하는 자본주의적 이해관계를 비판적으로 보는 것의 필요성에 대해서도 이야기 나눌 수 있었습니다.</p>
<p> </p>
<p>또한, 우리 몸을 바라보는 관점이 '나'라는 개인에서 '공동 거주지'로 확장되는 흥미로운 경험을 공유했습니다. 개인의 몸 안에 존재하는 수많은 미생물들의 존재를 생각하면, 다시 한 번, '한 사람은 하나의 우주'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내 안의 생태계에서 균형을 잘 잡을 수 있게 돕는 것, 그리고 나를 둘러싼 생태계에서 조화를 이루는 것이 함께 가는 것의 중요성을 생각해볼 수 있었습니다.</p>
<p> </p>
<p>마지막으로 사회적 관계의 중요성과 노화를 맞서야 할 적으로 보는 저자의 관점에 대한 이야기들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사회적 관계망은 축소되기 쉬운데, 어떻게 외로움을 수용하면서 유대감을 계속 느낄 수 있을지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들을 앞으로 같이 고민해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베짱이님께서 노화를 '쇠퇴'로만 보는 사회적 서사에서 벗어나, 스스로 어떤 이야기를 선택해 살아갈 것인지의 문제라는 통찰을 나누어주셔서 좋았습니다.</p>
<p> </p>
<p>더 많은 이야기들이 있었는데, 저의 기억력의 한계로 이 정도로만 적어보겠습니다. 이번 시간도 함께해주셔서 모두 감사했습니다. </p>]]></description>
			<author><![CDATA[머루]]></author>
			<pubDate>Wed, 08 Apr 2026 12:18:01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naidum.org/?kboard_redirect=10"><![CDATA[나이듦대중지성]]></category>
		</item>
				<item>
			<title><![CDATA[&lt;해파리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gt; 2회 공지]]></title>
			<link><![CDATA[https://naidum.org/?kboard_content_redirect=588]]></link>
			<description><![CDATA[<p class="p1">이번 주에는 책의 후반부를 읽습니다.</p>
<p class="p1">19세기, 손도 씻지 않고 부검실과 분만실을 오가며 산모를 산욕열로 죽게 한 의사들의 이야기,</p>
<p class="p1">젊은 피를 수혈해 젊음을 사려했던 20세기의 용감한 과학자의 이야기에</p>
<p class="p1">시작부터 좀 섬뜩했습니다.</p>
<p class="p1">늙은 쥐와 젋은 쥐의 접합을 통해 늙은 쥐의 회춘을 을 실험하는 장면에서는 영화 &lt;서브스턴스&gt;가 떠오르기도 했습니다.</p>
<p class="p1">과연 젊음은 그렇게 훔쳐올 수 있는 것일까요?</p>
<p class="p1">책의 후반부는 파트 2에서 미생물의 활약을 다루면서 다시금 과학책 읽기의 어려움에 빠지게 합니다만</p>
<p class="p1">많다고 좋은 게 아닌 철분의 역할과 특징, 미생물과 면역체계의 상호작용, 그리고 면역체계와 알츠하이머의 관계는 매우 흥미로웠습니다.</p>
<p class="p1">여기서 혹시나 조금 헷갈릴 수 있는</p>
<p class="p1">미생물, 박테리아, 바이러스에 대해 지피티가 정리한 내용을 첨부합니다.</p>
<p> </p>
<p><img src="https://naidum.org/wp-content/uploads/kboard_attached/10/202604/69d23126f1e313285758.png" alt="" /></p>
<p> </p>
<p class="p1">이에 비해 파트 3은 그래도 읽기가 수월하지 않으셨나요?</p>
<p class="p1">지난 시간에 이어 영양섭취와 식습관에 관련된 내용은 조금 솔깃해지는 내용입니다.</p>
<p class="p1">하지만 종합해보건데</p>
<p class="p1">역시 경제적 여유가 있고 학력이 높을수록 더 장수하기 쉽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 같은데요.</p>
<p class="p1">독자들이 이런 생각을 할까봐</p>
<p class="p1">저자가 마지막을 이렇게 마무리하는 것일까요?</p>
<p class="p1">적당히 먹고 운동 열심히 하는 것이 장수의 비결이긴 하지만</p>
<p class="p1">뭐니뭐니해도 가장 중요한 건 노화를 대하는 마음가짐이라고,</p>
<p class="p1">사람들과 함께하는 유대감 속에서 책임감과 삶의 의미를 느낄 수 있어야 장수할 수 있다고.</p>
<p> </p>
<p class="p1">여러분은 어떻게 읽으셨는지</p>
<p class="p3">월요일 밤<span class="s1"> 10</span>시까지 댓글로 메모 남겨 주세요<span class="s1">~</span></p>]]></description>
			<author><![CDATA[서해]]></author>
			<pubDate>Sun, 05 Apr 2026 19:10:22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naidum.org/?kboard_redirect=10"><![CDATA[나이듦대중지성]]></category>
		</item>
				<item>
			<title><![CDATA[나이듦 대중지성 5회차 후기-&lt;해파리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gt; 전반부]]></title>
			<link><![CDATA[https://naidum.org/?kboard_content_redirect=587]]></link>
			<description><![CDATA[<p class="isSelectedEnd">이번 세미나는 시작부터 살짝 당황스러웠다.<br />
앞선 두 권의 책을 통해 나이듦에 대한 편견을 조금은 내려놓았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는 “세월의 무게를 덜어주는 경이로운 노화 과학”이라니…<br />
노화를 되돌릴 수 있다면, 우리는 과연 거슬러 갈 것인가?</p>
<p>샘들도 비슷한 난감함과 당혹감을 이야기하셨다. 그런데 재밌게도 앙코르샘은 이 책 때문에 세미나를 신청하셨다고! 혼자라면 쉽게 손이 가지 않았을 책을, 함께라서 읽게 되는 것. 그렇게 우리는 “호기심 모드”로 이번 세미나를 시작했다.</p>
<p> </p>
<p>긴 메모글을 올려주신 무지개 전사샘은 노화를 진화의 선택 결과로 바라보는 관점을 짚어주셨다. 생물은 영생보다 ‘지금 살아남고 번식하는 것’에 최적화되어 왔고, 그 과정에서 노화가 형성되었다는 설명이었다. 또 하나 흥미로웠던 지점은 노화를 바라보는 두 가지 시선이었다. 피할 수 없는 자연의 흐름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수정 가능한 손상의 축적으로 볼 것인가. 만약 후자라면, 노화는 언젠가 되돌릴 수도 있는 ‘과정’이 된다.</p>
<p><br />
마리샘은 소아마비 백신이 HeLa 세포에서 시작되었다는 이야기를 짚어주셨고, 자연스럽게 2005년 황우석 줄기세포 사건까지 소환되었다. 난자 제공을 강요(?)받았던 조교들의 모습, 그리고 최근 합법화된 줄기세포 치료 이야기까지 이어지며,  여러 생각이 오갔다. 개인적으로는 시험관 시술로 아이를 임신하며 냉동배아를 사용했던 기억도 떠올라 묘하게 연결되는 순간이었다.</p>
<p> </p>
<p>코난샘은 영화 &lt;맨 프럼 어스&gt;를 떠올리며, 10,000년을 사는 삶이 과연 축복일지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오래 사는 것과 잘 사는 것 사이의 간극이 다시 한번 선명해졌다. 앙코르샘의 요즘 여행에서는 예전처럼 가슴이 뛰지 않는다는 이야기에, 베짱이샘의 말처럼 유한한 삶이기에 오히려 더 소중해지는 감각이 떠올랐다. 괜히 직장 근처 목련꽃이 다르게 보이는 순간까지 덤으로 따라왔다. </p>
<p> </p>
<p class="isSelectedEnd">엄지샘은 호르메시스 효과를 통해 ‘중도’를 이야기하셨다.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싶으면서도, 어떻게든 피하고 싶은 마음 역시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  나 역시 거창한 과학의 성과는 잘 모르겠지만, 장수와 관련된 소소한 팁들은 슬쩍 저장해두고 싶은 마음… 솔직히 부정할 수 없다. 니은샘은 “바람 없는 나무는 쓰러진다”는 비유로, 고생도 결국 생명을 단단하게 만든다는 유쾌한 결론을 내려주셨다. "고생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자!"</p>
<p> </p>
<p class="isSelectedEnd">머루샘은 노화 과학의 혜택이 결국 특정 계층에 집중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짚으며 “이건 정의로운가?”라는 질문을 던지셨다. 지난 시간의 홈리스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이어지며, 누군가는 훨씬 더 가혹한 조건 속에서 노화와 죽음을 맞이한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소요유샘은 실험동물의 희생을 떠올리며, 동시에 고기를 먹는 자신의 모습에서 느끼는 모순을 솔직하게 털어놓으셨다. 나 역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지점이었다. 그런 와중에 “일관성은 주입된 가치일지도 모른다”는 베짱이샘의 말이 묘하게 위로가 되었다.</p>
<p> </p>
<p class="isSelectedEnd">이어서 서해샘의 건강하게 살고 싶다는 말이 결국 오래 살고 싶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걸 깨닫고 뜨끔했다는 고백 역시 깊이 공감되는 지점이었다. 블루밍샘은 니체의 ‘위대한 건강’을 언급하며, 우리가 너무 쉽게 말하는 “건강하게 살고 싶다”는 말 자체를 다시 돌아보게 했다. 익숙한 문장 하나에도 생각보다 많은 전제가 숨어 있다는 걸 느낀 순간이었다.</p>
<p> </p>
<p>“윤리적인 문제만 빼면 재밌는 책”이라는 자갈샘의 말처럼, 이번 책은 흥미와 불편함이 동시에 따라오는 읽기였다.<br />
그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가며, 우리의 다음 세미나도 이어질 것 같다.</p>
<p> </p>]]></description>
			<author><![CDATA[새봄]]></author>
			<pubDate>Sat, 04 Apr 2026 11:46:47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naidum.org/?kboard_redirect=10"><![CDATA[나이듦대중지성]]></category>
		</item>
				<item>
			<title><![CDATA[&lt;후기&gt; 휘청거리는 오후 (1) - 연탄때는 집으로 시집가고 싶지 않은 욕망]]></title>
			<link><![CDATA[https://naidum.org/?kboard_content_redirect=586]]></link>
			<description><![CDATA[<p><b>연탄 때는 집으로 시집가고 싶지 않은 욕망</b></p>
<p> </p>
<p>“여보 중매쟁이가 사람 보는 눈 하나는 귀신 같습디다. 우리 초희를 보자마자 첫밗에 한다는 소리가 연탄 때는 집으로 시집갈 애는 절대로 아니래요. 얼마나 잘 봤어요?”(294)</p>
<p> </p>
<p>늦잠을 잘 수 있는 토요일... 새벽 3시 30분에 눈이 떠졌다. 제기랄... 눈을 감고 다시 잠을 청해보았지만 영 글렀다. 학교에서 학부모들의 이런 저런 민원도 있었고, 무엇보다 이번 주 세미나가 영 마음에 걸린다. 그래 어차피 잠 자기는 틀렸고 차라리 후기를 쓰자.</p>
<p> </p>
<p>내가 왜 그랬을까? 평소라면 입을 다물고 세미나를 관망했을텐데, 나도 모르게 음소거 버튼을 해제해버렸다. 허성씨를 옹호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헛다리 긁고 있는 나를 보고 문탁샘이 한 마디 하셨다. ‘논의의 방향이 허성씨를 옹호하는 편과 아닌 편으로 흐르는 것 같은데, 그게 아니고 .... 교사직을 버리고 공장을 차리는 것이 보여주는 상징성, 박정희의 자본주의 육성, 강남 개발의 맥락에서 당시 사회적 분위기에서 결혼 풍속도를 좀 보자’</p>
<p> </p>
<p>세미나를 마치고도 나는 자꾸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를 닮은 다정한 남자와 연애결혼을 했다면 초희는 행복했을까? 만약 내가 계층상승이 가능할 만큼의 외모를 지녔다면 결혼에 대한 나의 선택은 달라졌을까?</p>
<p> </p>
<p>나는 73년생, 2001년에 사랑했던 남자와 결혼했다.(우리 밥은 적게 먹고 사랑은 많이 먹으면서 살자는 오글거리는 말을 해가면서... 아! 미쳐.... 뭐 하긴 결혼이란게 미쳐야 가능한게 아닌가!) 유유상종이라고 나와 친했던 친구들의 결혼은 엇비슷하게 고만고만했다. 나름 의식 있다고 생각하는 헛똑똑이들의 연애결혼, 형편에 맞는 전셋집, 혼수를 생략하고 그 돈을 전세금을 보태는 정도의 실용성...</p>
<p> </p>
<p>직장을 다니고 아이를 기르면서 30대 후반이 되어서야 현타가 왔다. 나보다 한참 어린 친구들 중에 반포에 아파트, 분당에 아파트를 시댁으로부터 받고 결혼한 친구들이 꽤 있었다. 솔직히 많이 부러웠다. 전세금을 올려가며 이사하는 것이 힘들었고, 집 문제만 아니라면 별 걱정없이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우울했다. “나도 마담뚜한테 중매 부탁할까 봐. 나도 언니처럼 되고 싶어. 형만 한 아우 없다더니 언니가 옳았어.”(365) 우희의 울음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나에게 없었다고 할 수 있을까?</p>
<p> </p>
<p>이쯤에서 내 아버지와 어머니 이야기를 해야겠다. 지방 소도시에서 사업을 하시던 아버지는 내 나이 9살에 망하셨다. 하루 아침에 남의 집 셋방살이를 시작하게 되고 화병으로 드러누운 아버지를 대신해 어머니가 생활전선에 뛰어드셨다. 참깨 여사까지는 아니지만 어머니는 아버지 원망을 많이 하셨다.</p>
<p>나의 아버지는 예인이 되셨으면 좋았을 분이시다. 음악공부를 하신적이 없지만 아버지는 울적한 일이 있을 때마다 혼자 아코디언을 켜시면서 마음을 푸신다. 여동생은 대놓고, 아버지가 그 때 사업만 안 망했어도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었던 자기 꿈이 이루어졌을거라고 원망한다. 나는 별다른 얘기를 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원망했었다. 친구집에 놀러가면 전업주부인 어머니들이 내오시던 예쁜 간식과 깔끔하고 세련되게 꾸민 집안이 부러웠던 것 같다.</p>
<p> </p>
<p>평생 성실하게 일하셨지만 벌이는 시원치 않았던 아버지는 예나 지금이나 무척이나 다정하시다. 나는 그런 아버지를 많이 사랑했지만 내내 원망했던 것이 죄송스럽다. 이제야 좀 철이 드나보다. 그래서였던 것 같다. 허성씨와 내 아버지의 어떤 부분이 오버랩 되면서 허성씨가 뭘 그리 잘못했는지, 도대체 다 큰 딸들을 어디까지 서포트해줘야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 순간 울컥했다. 도둑이 제발 저린 꼴이다.</p>
<p> </p>
<p>결혼을 하고 나서 지겨운 카피가 시작되었다. 은근히 아버지를 구박하던 엄마의 모습이 내게 서도 나타난거다. 남편은 내가 변했다고 했다. 맞다. 직장생활과 육아, 그속에서 내 어머니의 피로가 내게 겹쳐왔다. 다정하고 세상 선하지만 풍족한 삶을 주지 못한 아버지와 남편이 오버랩 되면서... 뭐 그렇게 시간이 지나 지금은 감이당을 시작으로 여러 학당에서 인문학 공부를 하면서 나름 정신줄을 잡으려고 노력하고 있다.</p>
<p> </p>
<p>연숙샘은 초희네 가족이 지나치게 과표집된 것은 아닐까 하는 나의 질문에 ‘소설은 포착된 시대의 징후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했다. 박완서 작가는 말한다. “부자도 가난뱅이도 아닌 보통으로 사는 사람의 생활과 양심의 몰락을 통해 우리가 사는 시대의 정직한 단면을 보여주고자 했을 뿐이다.” 우리 시대의 정직한 단면,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소시민의 욕망들.</p>
<p>개인은 사회로부터 주입된 욕망을 욕망한다. 이것을 알기 때문에 우리는 모여서 공부를 한다. 주입된 욕망을 알아차리고, 내 안에 단단하게 똬리를 튼 그것들에 조금이라도 균열을 내고 싶어하는 마음으로 말이다. 그렇다면 결론은 버킹컴 같지만 다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거시담론이 아닌 미시적인 접근이겠구나.</p>
<p> </p>
<p>이제 24살 21살의 아이를 둔 어머니가 되니, 서서히 자식들에게 물려줄 재산이 없다는 것이 실감난다. 내 딸은 “연탄 때는 집이 아닌" 다른 곳으로 시집갈 수 있을까? 딸도 제 아빠처럼 착한 남자랑 연애하는 걸로 봐서는 그른 것 같다. (이건 뭐 자본주의의 징후, 대를 이어가는 자본의 욕망인가?)</p>
<p> </p>
<p>휘청거리는 오후가 신문에 연재되면서 독자들의 원성과 간섭을 받았다는 말이 실감난다. 간섭하던 독자들의 마음이 십분 이해되면서 나도 소설을 통해 공부를 하는 학인이기에 앞서 일차적으로 그런 독자가 된다.</p>
<p> </p>
<p>파국을 맞이할 것이 예감되는 내 아버지를 닮은 허성씨가 애잔하면서, 그렇게 가혹한 운명은 지우지 말지 하는 원망이 들기도 하다. 모순덩어리인 인물들이 그래도 망가지지는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든다는 거다. 구박하면서 서로 적당히 잘 살았답니다, 뭐 이런 결말을 바라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러면 너무 재미가 없겠지. 소설의 3요소가 인물 사건 배경인데 사건이 안 일어나는 소설은 소설이 아니니까.</p>
<p> </p>
<p>왜 이렇게 몰입이 되는 건가. 짜증나게...감정소모가 너무 크다. 어려운 철학 공부를 할 때는 어렵고 뭔말인지 몰라서 감정소모가 컸는데, 쉬이 읽히는 소설이라 행간의 의미는 읽히는 데 이번에는 감정이입이 너무 잘 돼서 괴롭다. 소설이라고 덥석 문 나를 원망해야할까?(역시 소설도 문탁샘과 공부하면 힘들다. 문탁샘 나쁘다) 여튼 내 안에서 충돌하는 독자와 학인 사이의 갈등은 내내 계속될 것 이고 멀미는 계속 날 것이 분명한 이 느낌적 느낌으로 휴일 신새벽 후기를 마친다. T.T</p>]]></description>
			<author><![CDATA[산책]]></author>
			<pubDate>Sat, 04 Apr 2026 07:33:35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naidum.org/?kboard_redirect=25"><![CDATA[집중탐구학교]]></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완경기 경험 및 돌봄 필요성 설문결과 보고서 - 여성환경연대(2025년 10월)]]></title>
			<link><![CDATA[https://naidum.org/?kboard_content_redirect=585]]></link>
			<description><![CDATA[<p>여성환경연대가 2025년 갱년기 여성에 대한 국내 첫 실태조사결과를 발표했습니다.</p>
<p>설문조사 결과와 완경기 경험, 완경기에 필요한 정책과 돌봄을 결과 보고서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p>
<p> </p>
<p>1) 조사 설계<br />
◦ 조사 대상은 40~60세 완경 전후 변화를 경험하고 있는 여성으로 모집단은 최근<br />
행정안전부(2025년 8월 기준) 전국 40~60세 여성 인구 8,452,169명을 기준으로 설정함<br />
◦ 구조화된 설문지를 활용한 온라인 조사로 진행하였으며 2025년 7월 29일부터 2025년 8월<br />
31일까지 34일간 진행함<br />
◦ 완경기 경험 및 돌봄 필요성 등에 관한 내용으로 조사를 진행하였으며 유효 표본 수는<br />
1,443명임 (신뢰수준 95%, 표본오차 ±2.58%p)</p>
<p> </p>
<p>2)조사내용</p>
<p>◦ 설문은 응답자 일반현황, 완경기 경험, 돌봄 필요성으로 구분하여 조사함</p>
<p> </p>
<p><a href="https://forms.gle/vnu3VZTxe1LBg9Fz9">다운받기</a></p>]]></description>
			<author><![CDATA[나이듦연구소]]></author>
			<pubDate>Thu, 02 Apr 2026 16:17:28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naidum.org/?kboard_redirect=21"><![CDATA[통계]]></category>
		</item>
				<item>
			<title><![CDATA[나이듦대중지성 시즌1 &lt;해파리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gt;1회 공지]]></title>
			<link><![CDATA[https://naidum.org/?kboard_content_redirect=583]]></link>
			<description><![CDATA[<p><img class="aligncenter" src="https://naidum.org/wp-content/uploads/kboard_attached/10/202603/69c9d1ddcd2994914357.png" alt="" /></p>
<p> </p>
<p>시간을 거꾸로 사는 작은보호탑해파리(투리토프시스누트리쿨라)의 변화를 다룬 이미지 입니다^^</p>
<p>자연의 생물체들이 자신의 환경에 적응하는 다양한 방법 중에는 노화라는 현상도 있습니다.</p>
<p>유한한 인간에 비추어 시간을 거꾸로 살아가는 해파리의 적응은 신기하긴 합니다^^</p>
<p> </p>
<p>저자는 생명체들이 노화에 대응하는 여러 방법 속에서 </p>
<p>인간은 과학으로 노화를 극복하려는 과정에 주목합니다^^</p>
<p> </p>
<p>지난 시간까지 노화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사실에 설득되었던(?) 우리로서는</p>
<p>노화를 극복하려는 과학의 성과에 대한 새로운 정보 앞에서 생각을 벼려봐야 하는 시간입니다^^</p>
<p>노화에 대처하는 과학의 방대한 성과에서 우리가 주목해 볼 수 있는 것들을 함께 찾아보겠습니다.</p>
<p>메모는 월요일밤 10시까지 올려주세요^^ </p>
<p>화요일 저녁 8시 세미나때 뵙겠습니다.</p>
<p> </p>
<p> </p>
<div class="autosourcing-stub-extra"> </div>]]></description>
			<author><![CDATA[기린]]></author>
			<pubDate>Mon, 30 Mar 2026 10:38:23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naidum.org/?kboard_redirect=10"><![CDATA[나이듦대중지성]]></category>
		</item>
				<item>
			<title><![CDATA[나이듦 대중지성 4회차 후기]]></title>
			<link><![CDATA[https://naidum.org/?kboard_content_redirect=582]]></link>
			<description><![CDATA[<p>                                                               <span style="font-size:20px;"> &lt;늙어감을 사랑하게 된 사람들&gt;을 읽고</span></p>
<p> </p>
<p>&lt;늙어감을 사랑하게 된 사람들&gt;이란 제목이 구미를 당긴다. 정말? 늙어감을 사랑하게 된 사람들이 있을까? 좋게 해석해도 ‘인정하다’ 정도가 합리적인 표현일 것 같은데 ‘사랑한다’고? 그래도 한 번 믿어보자! 부지런히 읽었다. 한 챕터, 두 챕터, 열한 챕터를 다 읽어도 당사자가 늙어감을 사랑하게 된 사람들은 없었다. 젊은 사람이 늙어가는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다른 문제다. 또 내가 너무 순진했다! 꼭 이렇게 제목을 붙여야하나... 그러려니 하면서도 짜증이 밀려온다.</p>
<p> </p>
<p>어쨌거나 책 내용은 노년 당사자를 다룬 챕터도 있고, 노년을 상대로 일하는 사람들을 다루기도 하면서 흔히 볼 수 없는 여러 가지 풍경을 접할 수 있었다. 특히 노년이면서 약자인 사람들 이야기가 많다. 비록 그 당사가가 아니라 그들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젊은이들을 인터뷰한 내용이 많았지만 다양한 노년의 모습을 보면서 나의 노년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p>
<p> </p>
<p>블루밍님은 독립적인 삶이 가장 이상적인 삶으로 생각하며 살았는데 의존성이 늘어날수록 더 자립할 수 있다는 조미경씨의 이야기에 감명을 받았다고 하고, 마리님은 요양보호사 이은주씨의 이야기를 읽으며 돌봄노동자의 노동조건이 좀 개선되어야함을 이야기하였다. 새봄님은 나이듦이 특별한 단계에 진입하는 게 아니라, 지금의 일상을 돌보며 살아가는 일이란 생각을 했다고 하고, 무지개전사님은 우리나라에서 남성 노인 혐오에 대한 생각에 대해서 실제 예를 들면서 말하였고, 소요유님은 나이든 여성에 대해 성역할을 규정하여 얘기하는 것에 대해 불만을 토로했고, 사회적 약자를 돌보는 주체가 개인이나 단체가 아닌 국가가 책임져야하는 것 아닌가하는 말도 했다. 코난님은 노년의 관계 가꾸기의 필요성과 책을 읽다가 이해가 덜 되는 부분을 질문했고, 엄지님은 루인씨의 경우, 존재의 시간성에 대한 부분과 트랜스젠더가 패싱을 포기하는 부분에서, 최현숙씨의 경우, 스스로 가차없이 자신을 드러내는 것에 대한 용기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음을 말했다.</p>
<p> </p>
<p>마지막으로 베짱이님은 우리 모두 살아온 경험, 처지, 취향이 다른데 모두에게 해당되는 좋은 나이듦의 정답 같은 것은 없다며, 나이 들어가는 타인을 이해해보려 노력하는 과정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특히 ‘자기 자신의 삶과 나이듦의 과정에만 갇혀 있는 관심은 마음 밭도 좁히고 생각도 쳇바퀴 돌게 하지만’ 이 부분! 이 글을 읽는데 누군가 똑같은 사람이 있는데 싶었다. 그 사람은 바로바로 나였다! 내가 계속 이러고 있었던 것 같다. 베짱이님은 해결책까지 주셨다. ‘세상 속 다양한 노년 타자들의 삶을 깊고 넓게 이해해 보려하는 과정이 그 자체로 우리의 삶과 노년의 발걸음에 새로운 상상력과 참조점과 시선과 의욕을 키워낼’ 것이라고 말이다. 그러므로 ‘나답게’보다 ‘나없이’ 늙어감을 상상해보는 것도 좋은 일이라고...그래서 이번 세미나에서는 좁게 내안(나의 편견, 가치관)에서만 뭘 해결해보려 애쓰는 나를 발견해서 참 다행이다. 무엇인가 열심히, 골똘히 집중한다는 것에는 함정이 있다. 베짱이님께 꾸벅!</p>
<p> </p>
<p>그럼 다시, ‘늙어감을 사랑하게 된 사람’이 몇 명이라도 있을까? 거의 없다고 생각한다. 지난 일욜 나이듦 연구소의 ‘걷는 친구들’ 산행이 있었는데, 오십 살 전후의 회원이 자신은 나이드는 게 좋다고 그렇지 않냐고 물어봐서 걍 몸만 더 아프지 않은 상태로 유지되면 괜찮다고 말했다. 아직은 나이듦이 뭔지 잘 모를 나이다. 육십이 넘어야 실감한다. 칠십이 넘으신 분은 육십을 보고 또 이렇게 말할 것 같다. 흐흐.</p>
<p> </p>
<p>나이 드는 것을, 인정하거나 이해하거나 받아들일 수는 있어도 좋아하거나 사랑할 수는 없을 것이다. 좋아하거나 사랑하지 않아도 나에게 바싹 다가오는 나이듦! 앞으로 더 공부해가면 지금보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맞이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p>
<p> </p>]]></description>
			<author><![CDATA[니은]]></author>
			<pubDate>Sat, 28 Mar 2026 18:35:12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naidum.org/?kboard_redirect=10"><![CDATA[나이듦대중지성]]></category>
		</item>
				<item>
			<title><![CDATA[[6회 공지- 휘정거리는 오후(1)] 더 꼼꼼하게 들어가 봅시다]]></title>
			<link><![CDATA[https://naidum.org/?kboard_content_redirect=581]]></link>
			<description><![CDATA[<p> </p>
<p><span style="font-size:18px;"><strong>1. 다시... 문학은 힘이 세다</strong></span></p>
<p> </p>
<p>[도시의 흉년]으로부터 우리 모두는 정신사나워했습니다. 70년대 한국사회 풍경? 자본주의? 산업화? 도시? 가족? 욕망? 주체? 인간성? 섹슈얼리티? 사랑(이건 마이 무리ㅋㅋ)... 온갖 말들이란 말이 모두 넘나드는 속에 이게 맞는지, 아니 맞고 틀리고를 떠나 그냥 ‘아싸리판’인듯 했습니다(‘아사리판’으로는 쬐금 모자라는 느낌 ^^;;;;;).</p>
<p>어쩌면 이런 혼란을 만들어내는 게 문학의 힘이 아닌가 싶습니다. 세상 모든 책들은, 세상 모든 공부들은 우리들을 지금과는 다른 새로운 곳으로 이끌어가지요. 그런데 문학은 애초부터 나를 일깨우는 명징한 힘이랄까 그런 방식과는 거리가 멀다는 겁니다. 두루뭉술하고 잡스럽고 온갖 것들이 다 뒤범벅되어 등장하는 그런 방식에 더 가깝지 않나 싶거든요. 어쩌면 작가마저도 자신이 무슨 말인지 모르는 채 토해내는 게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로 나를 ‘환장하게’ 만드는 그런 혼란 말입니다.</p>
<p>그러하니 너도 나도, 작가도 독자도 환장하게 만드는 ‘문학’은 힘이 셉니다.</p>
<p>이번에도 휘청거리다 못해 환장할.... 느낌적 느낌ㅠㅠ</p>
<p> </p>
<p><span style="font-size:18px;"><strong>2. 1970년대, 여성</strong></span></p>
<p> </p>
<p>1975년 유엔은 &lt;세계여성의 해&gt;를 선포했습니다.</p>
<p>이즈음 한국 사회에서도 주목할 일들이 꽤 많았습니다. 기존 논의에 따르면 현모양처의 여성상을 구체화하는 여성담론도 이 시기에 더욱 공고해지며(특히 박정희 정권의 통치전략을 수행하는 이데올로기로서의 역할이 두드러졌다고 합니다), 학계의 여성학 논의나 여성이론도 이 시기에 체계화되었다고 합니다.</p>
<p>특히 흥미로운 건 1975년에 보부아르의 [위기의 여자]가 한국 출판계에서 빅 히트를 날리며, 그녀의 여러 작품들이 번역되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그와 함께 활동한 사르트르는 1950년대에 한국문단과 독서시장에서는 엄청난 인기를 얻었고, 보부아르의 [제2의 성]도 1947년 작인데 말입니다. 이를 두고 세계여성의 해를 상업적으로 활용한 출판 시장의 성공으로도 해석합니다만 하여간 70년대 문단이나 출판계는 물론 한국사회에서도 ‘여성’은 돌출된 지점이었음이 분명해보입니다.</p>
<p> </p>
<p>또 하나 흥미로운 건 70년대의 청년문화와 남성작가로부터 등장한 ‘여성’입니다.</p>
<p>통기타와 청바지, 생맥주로 대표되는 청년문화는, 박정희 체제로 대표되는 억압과 금기를 넘어서는 저항과 낭만의 상징이었지요.</p>
<p>그리고 순수의 결정체와 같은 촉촉한 눈망울의 ‘그녀’들이 등장합니다. 심지어 창녀일지라도 티없이 맑고 깨끗한 영혼을 가진 그녀들.</p>
<p>1972년 최인호 [별들의 고향] ‘경아’</p>
<p>1973년 조선작 [영자의 전성시대] ‘영자’</p>
<p>1975년 조해일, [겨울여자] ‘이화’</p>
<p>저 눈밭에서 사슴처럼 겅중거리다 쓰러져 해맑은 미소를 터뜨리는 그녀들을 향한 클로즈업....</p>
<p>(이하, 생략함다ㅋㅋ)</p>
<p> </p>
<p>이런 가운데 박완서는 ‘초희, 우희, 말희’를 등장시켰으니, 참 희한하지요. 청년다운 패기와 저항은 원래 없고, 순수의 화신과도 아예 거리가 먼 속물? 현실 여성?이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이 소설은 ‘신문’이라는 대중적인 장(場)에서 대중적인 성공을 거둡니다. 연애와 결혼 풍속을 정면으로 ‘고발’했다, 사회 문제를 구체적으로 ‘비판’했다는 점에서 문단의 호평도 얻습니다. 특히 결혼문화에 작동하는 자본주의적 이데올로기와 세태를 사실적으로 재현했다는 점을 높이 평가받았고(백낙청, 유종호, 염무웅 등등 &lt;창작과비평&gt;계열), 이후 이것은 [휘청거리는 오후]에 거의 ‘공식’처럼 적용되어왔습니다.</p>
<p>사실적 재현, 뭐...고개를 끄덕일 밖에 없습니다만 ....</p>
<p>소위 천민자본주의, 속물성, 허위의식에 대한 비판? 반성? 그런가????</p>
<p>저는 물음표가 막막 솟아납니다. 저들을 재현했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습니다만, 과연 박완서의 소설이, [휘청거리는 오후]가 그렇게 “비판하고 반성하고 성찰”한다, 이렇게 마무리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p>
<p> </p>
<p><span style="font-size:18px;"><strong>3. 사랑, 연애와 결혼</strong></span></p>
<p> </p>
<p>사실 여성의 사랑(연애)과 결혼은 너무나 익숙한 주제이지요.</p>
<p>동서양을 막론하고([오만과 편견], [불여귀(不如歸)], [금색야차(金色夜叉)_장한몽]...) 이건 여성의 영역이었습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였고, 1960년대에 이르러서는 ‘여류작가’와 ‘낭만적 사랑의 서사’는 뗄래야 뗄 수 없는, 즉 여성 작가의 전문영역으로 고정되다시피 했습니다.</p>
<p> </p>
<p>사랑, 그리고 연애와 결혼. 익숙하다 못해 지겹도록 되풀이되는 서사 혹은 현실.</p>
<p>그런데 조금씩 다 다릅니다. ‘연애’라는 말을 신문물로 영접하던 근대 초기의 신여성들은 ‘자유연애’를 꿈꾸고 실행하려들지만, 현실은 ‘사랑의 완성=결혼’이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결혼할 상대 남성이 없어 히스테리컬한 노처녀(B사감)으로 늙어가든지, ‘제2부인’(첩)이 되든지, 아예 죽음(情死)으로나 완성될(윤심덕) 것이었습니다.</p>
<p>해방 이후의 현실도 그닥 녹록치 않았습니다. 교육제도를 비롯한 사회시스템이 마련되어가기는 했습니다만, 여전히 여성이 공부를 하는 것도 쉽지 않았고, 공부를 했기 때문에 결혼 상대자를 만나기 더 어려워졌다고 했습니다.</p>
<p> </p>
<p>그렇다면 박완서는 ‘초희, 우희, 말희’를 통해 &lt;아버지의 세계&gt;와 &lt;남편의 세계&gt; 사이에서, &lt;사랑&gt;과 &lt;연애 / 결혼&gt; 사이에서 무엇을 어떻게 보여주고 있는 것일까요.</p>
<p> </p>
<p><strong>[휘청거리는 오후] 1권에서는, 이전 소설의 연장선상-비교로부터 </strong></p>
<p><strong><span style="color:#0000ff;">"더 꼼꼼하게"</span> 들어가 보고 싶습니다.</strong></p>
<p> </p>
<p>예를 들면...... </p>
<p> </p>
<p>(1) 아버지와 어머니</p>
<p>대체로 아버지, 오빠는 죽었거나 혹은 그 모습도 잘 드러내지 않는 매우 희미한 존재들이었습니다. 지대풍씨는 간간히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지만, [휘청거리는 오후]에 이르러서 드디어 아버지(허성)의 눈(관점)과 생각이 서사를 끌고 나갑니다. 또 아들의 죽음으로 회색빛 유령이다시피했던 어머니는 생존을 위해 맹렬히 진격하다가 ‘돈맛’을 알게 된 김복실 여사가 되었더랬습니다. ‘바지사장’이었던 가부장은, 이제 공장 사장이 되어 확실한 경제권을 가진 듯 보입니다. 가부장의 귀환이라고 할 수는 있는 걸까요? 또 어쨌거나 민 여사는 허성 씨의 돈을 받아쓰는 현모양처식 주부라고 할 수는 있는데, 이들의 관계는 묘합니다.</p>
<p>그 이전과 달리 역전된 권력 관계에 놓인 듯한 민 여사와 허성 씨를 더 꼼꼼하게 보고 싶습니다.</p>
<p>또 허성 씨의 내면이 자주, 구체적으로 풍부하게 등장하는데 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는 당연히 없지요. 시대의 변화로 달라진 아버지에 대한 연민...여기에만 머무르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허성 씨가 스스로를 보는 방식도, 아내와 딸들이 그를 보는 방식도 묘합니다.</p>
<p> </p>
<p>(2) 돈, 돈, 돈.... 눈에 보이는 신(神)</p>
<p>[오만과 편견]이 ‘사랑과 결혼’의 고전이라는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습니만, 전통적인 권력 층인 귀족과 급부상하는 젠트리계급의 양상, 상속을 둘러싼 부(富)를 비롯한 경제적 변화 등에 대한 사회문화적 고찰이 녹아있다고들 설명합니다. 결혼 문화/풍속은 사회 제도적 관계의 총합이나 다름없으니까요.</p>
<p>[휘청거리는 오후]에도 아주아주 흥미로운 양상들이 쏟아집니다. 상향 결혼을 꿈꾸는 민여사와 초희의 꿈은 그저 부잣집에 시집가겠다는 정도가 아니며, 모녀의 욕망은 또 각각 다릅니다. 전쟁 직후의 생존 욕망과도 당연히 다르며, 김복실여사가 마주했던 ‘공단 이불’의 실체가 제대로 드러난다고도 생각했습니다. 우희도 민수와 민수어머니도 공장의 차씨도 제각각의 욕망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p>
<p>화폐의 본질이랄까요. 자본의 욕망이랄까요.</p>
<p> </p>
<p>맑스는 ｢1844년의 경제학 철학 초고｣에서 셰익스피어(｢아테네의 타이몬｣, 1607)를 인용합니다.</p>
<p>“금? 귀중하고 반짝거리는 순금? 아니라네. 신들이여! 실없이 내가 그것을 기원하는 게 아니라네. 이만큼만 있으면, 검은 것을 희게, 추한 것을 아름답게 만든다네. 나쁜 것을 좋게, 늙은 것을 젊게, 비천한 것을 고귀하게 만든다네.”</p>
<p>그리고 “분명 고귀한 것은 드물고도 어렵다”는 스피노자의 말을 “고귀해서 드문 것이냐, 드물어서 고귀한 것이냐”고 되묻습니다.</p>
<p>맑스의 저 물음을 [휘청거리는 오후]에 들이대보고 싶습니다. 그들의 욕망은 물론 그들이 꿈꾸는 ‘결혼’이라는 교환 관계를 꼼꼼하게 들여다보고 싶습니다.</p>
<p> </p>
<p>(3) 감각/정동, 그리고 육체</p>
<p>박완서답게 [휘청거리는 오후]에서도 시각과 촉각을 비롯한 감각적인 서술들이 넘쳐납니다.</p>
<p>민여사의 독특한 말투, 초희의 짜증, 우희의 고민 등등은 물론이거니와, 허성 씨와 유영감의 훼손당한 신체도 각별합니다. ‘인공적 순결’을 장착하지 못한 우희의 몸(정조), 중년 여성들의 기름진 몸, 생명의 활기.... 수두룩합니다.</p>
<p>이들이 여성적 재현/여성의 글쓰기와 어떻게 연결될까,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앞으로의 박완서 읽기에서 계속 되어야할 질문이긴 합니다만, [휘청거리는 오후]에서도 꼼꼼하게 들여다보고 싶습니다.</p>
<p> </p>
<p>여러분의 읽기는 어떠셨는지요. 어떤 생각을 품으셨는지요.</p>
<p>다음 주 수요일을 기다리고, 기다리고 있겠습니다.</p>
<p><strong><span style="color:#0000ff;">B조 여러분, </span></strong></p>
<p><strong><span style="color:#0000ff;">휘청거리지 마시고 꿋꿋이 &amp; 꼼꼼한 읽기를 보여주시어요!!!!</span></strong></p>
<p> </p>
<p> </p>]]></description>
			<author><![CDATA[파랑]]></author>
			<pubDate>Fri, 27 Mar 2026 11:36:17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naidum.org/?kboard_redirect=25"><![CDATA[집중탐구학교]]></category>
		</item>
				<item>
			<title><![CDATA[&lt;도시의 흉년&gt;  세미나 후기는 아닌, 그냥 뻘글]]></title>
			<link><![CDATA[https://naidum.org/?kboard_content_redirect=580]]></link>
			<description><![CDATA[<p><span style="font-size:18px;"><strong>1. 소설은 힘이 세다?</strong></span></p>
<p> </p>
<p>김승옥의 단편 ｢염소는 힘이 세다｣가 떠올랐습니다.</p>
<p>아주 예전에 읽은 터라, 줄거리도 가물가물합니다만... 전혀 힘이 세지 않아 염소탕이 되어 버린 염소, 힘없는 소년과 누이... 힘없는 그저그런 것들이 매애애 울며 자신들이 힘이 세다라고 앵앵거리는 듯한 그런 느낌만이 제게 남아있습니다.</p>
<p> </p>
<p>&lt;도시의 흉년&gt;의 세 번째 세미나를 마치고 뜬금없이 ‘소설/문학은 힘이 세다’라는 말이 떠올랐습니다. 아마도 소설이 우리 모두를 ‘환장’하게 만들었던 합리적인 이유ㅋㅋ때문인 거 같습니다(저는 거의 &lt;도시의 흉년&gt;에 의해 패대기쳐지는 기분이었습니다)</p>
<p> </p>
<p>그리고 나서 문득 ｢염소는 힘이 세다｣라는 제목이 연상되었던 거지요. 표현이 비슷하다는, 라임(?)이 반복된다는 거였는데, 막상 떠올리고 보니 그 의미가 묘하게 연결되는 겁니다.</p>
<p>힘없는 염소와 소년과 누이처럼 언제인들 소설이, 문학이 힘이 있다고 여긴 적이 있었을까요.</p>
<p>본래 소설은 대설大說에 미치지 못하는 잡스러운 이야기요, 문학은 먹고 사는 일과는 하등 상관없는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 취급을 받아왔었으니까요.</p>
<p>하지만 읽는 이의 정신을 쏙 빼놓는 그 ‘환장스러움’은 차치하더라도, 게시판을 뜨겁게 달구는저 에너지는 분명 문학의 힘임에 분명합니다.</p>
<p>(그래서 어쩌라구....그 힘이 뭐냐고?? 이건 박완서읽기가 끝나갈 즈음 다시 생각해보겠슴다. 일단 패쑤함다~ )</p>
<p> </p>
<p><span style="font-size:18px;"><strong>2. 어디까지의 오독이 허용되는가 vs 오독은 없다</strong></span></p>
<p> </p>
<p>이쿠바쌤이 응답자를 콕 찝으시는 바람에, 엉겁결에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캄사~</p>
<p>넓고 다양한, 그래서 좋은 소설일수록 더더욱~~~~ 질문하시면서 대답해주셨네요 ㅋㅋㅋ</p>
<p>잘 알려진 것처럼 ‘텍스트 읽기의 무한한 변이와 생성’에 대한 논의는 역사가 깊습니다. 능동적 독서, 주체적 독서, 적극적 독서, 생산적 독서, 저항적 독서를 비롯한 독자반응비평으로부터 텍스트 사이의 상호 영향까지도 거론하며(미하일 바흐친) 뭐가 원본이냐, 원래의 의미라는 게 있냐는 등등의 수많은 설왕설래가 이어졌더랬습니다.</p>
<p><a href="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1037669.html"><u>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1037669.html</u></a></p>
<p> </p>
<p><img class="alignleft" src="https://naidum.org/wp-content/uploads/kboard_attached/25/202603/69c24aaa652ca8855946.png" alt="" width="216" height="288" /></p>
<p> </p>
<p style="padding-left:40px;">이런 방식으로 단순화할 수도 있을 거 같습니다.</p>
<p>(재미나이 시켜서 그리게 했어요 ^^;;;)</p>
<p> </p>
<p> </p>
<p> </p>
<p> </p>
<p> </p>
<p> </p>
<p> </p>
<p>그러하니 ‘오독’은 없습니다. 다만 게으른 읽기와 서투른 읽기 이런 건 있을 듯합니다.</p>
<p>게으른 읽기, 기존에 내가 살아온 방식과 고정관념에 텍스트를 꿰맞추고 아, 그러네 하고 끝.</p>
<p>또 ‘대가(大家)’의 텍스트, 고전 등에는 또다른 게으른 읽기가 되기 십상입니다. 예를 들면, 역시 박완서의 OOOO은 옳다, 과연 그러하다, 끝.</p>
<p>서투른 읽기, 내게 촉발된 새로움에 대해 구체적인 근거와 논거를 찾지 않고, 그냥 이랬어 하고 끝.</p>
<p>저는 훌륭한 텍스트란 “천 개의 눈과 천 개의 길”을 가능케 하는, 그야말로 무한한 생성을 가능케 하는 공간이라고 생각합니다.</p>
<p>다만 그 무한한 길은 반드시 텍스트 내부로 촘촘하게 한 발짝씩 걸어들어갈 때만 열린다고 생각합니다. 텍스트를 매개로 내 생각과 내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 즉 내가 텍스트를 통과하는 방식이어야한다는 거지요. 내가 왜 이렇게 생각했는지, 내가 왜 이런 걸 좋아하는 지, 왜 싫어하는지, 내게 왜 이런 느낌이 생겨났는지.... 등등 모두 텍스트 속에서 내가 찾아내고 내 말로 설명되어야한다는 겁니다.</p>
<p>(물론 저도 도달해야 할 먼먼 이상향입니다 흑흑...)</p>
<p> </p>
<p>결국 나를 통과한 텍스트가 새롭게 쓰이는 리라이팅(rewriting)의 생성. 천 개의 눈으로 천 개의 길이 솟아나는 방식이 우리들의 책읽기가 아닐까 싶습니다.</p>
<p>(이게 소위 학술논문과 어떻게 다른 지도 또또 수다를 떨고 싶습니다만.... 일단 멈.춤.)</p>
<p> </p>
<p>결론은,</p>
<p>힘내서 열심히 갑시다!!!!</p>]]></description>
			<author><![CDATA[파랑]]></author>
			<pubDate>Tue, 24 Mar 2026 17:27:41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naidum.org/?kboard_redirect=25"><![CDATA[집중탐구학교]]></category>
		</item>
				<item>
			<title><![CDATA[&lt;도시의 흉년&gt; 곳곳에 넘실대는 소위 '화냥기'에 대해]]></title>
			<link><![CDATA[https://naidum.org/?kboard_content_redirect=579]]></link>
			<description><![CDATA[<p>‘화냥기’ 혹은 도처에 넘실대는 에로틱 씬들을 좀 전복적으로 읽어내고 싶었습니다. 가능할 것도 같았어요. 그런데 지영샘의 후기에서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여성의 사회적 자본과 연결시키는 방식이 흥미로웠습니다. 그래서 이 문제 먼저 다루어보겠습니다.</p>
<p> </p>
<p><span style="font-size:18px;"><strong>1.공적영역과 여성성의 두가지 작동방식</strong></span></p>
<p> </p>
<p>이 문제와 관련해서는 제가 오래전부터 정리한 내용이 있습니다. (어딘가에 쓰기도 했는데 너무 오래되어 못 찾겠네요)</p>
<p>아시다시피 근대는 공적영역과 사적영역을 구분하고 남성에게 공적영역을 여성에게 사적영역을 할당하였습니다. 남성성=공적영역에 적합한 애티튜드, 여성성=사적영역에 어울리는 애티튜드로 분배되었구요. 그런데 문제는 여성이 공적영역, 즉 학교를 거쳐 사회에 진출하면서 발생합니다. 온통 남성의 문법만 존재했던 그곳에서 여성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p>
<p> </p>
<p>두 가지 방식이 존재했던 것 같습니다.</p>
<p><strong><em>하나는 소위 ‘여성성’을 철저히 거세하여 상징남성으로서 사회생활을 하는 방식입니다.</em></strong></p>
<p>남장여자로 유명한 정신여고 출신의 김옥선 전 국회의원이 대표적입니다.</p>
<p> </p>
<p><img src="https://i.namu.wiki/i/VBTAdBemrstAWzii1c7ZO2rDr-oYzKmfNhT8r42x-Q4gnzL0z7zYQFJuSWZbdfY48i0BS1RNDnrDwDADI0003GCKZdP18qnho7UcrnjelqEp73SPLkSV_qkAAnpLVOi9E2I9I2dPgDwks9v267g7sA.webp" alt="김옥선전의원" /></p>
<p> </p>
<p>그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저 역시 그랬습니다. 남녀공학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전 여성적인 것으로 보여질 수 있는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머리는 최대한 짧게 자르고 (제 뒷모습을 보고 “저 남자애는 꼭 여자애처럼 생겼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늘 바지만 입고 다녔고, 술, 담배, 음담패설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으며, ‘단칼’에 가까운 표정과 말투, 논리로 상대(주로 남성)를 제압했습니다.</p>
<p>남성 중심의 상징계에서 '나약한 여성'이라는 기표를 스스로 잘라내어 발언권을 얻으려 했던 처절한 시도였습니다. "나는 너희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상징적 거세였다고도 말할 수 있고요.</p>
<p> </p>
<p><em><strong>다른 하나는 여성성과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자본화하는 경우입니다</strong></em>.</p>
<p>여기서 실명을 거론하긴 힘들어도 우리 시대의 어떤 아이코닉한 어떤 여성 연극 배우나 특정 명문대 출신의 재원들 사이에서 흔히 발견되던 모습이죠. 그들은 세련된 교양과 우아한 여성미, 그리고 상대를 매료시키는 특유의 기운을 전략적으로 배치함으로써 남성 중심 사회의 높은 벽을 통과했습니다. 그들에게 '여성성'은 거추장스러운 굴레가 아니라, 결정적인 순간에 협상력을 높여주는 세련된 무기였던 셈입니다.</p>
<p> </p>
<p><span style="font-size:18px;"><strong>2. 박완서 소설 속의 ‘화냥기’들을 어떻게 보아야할까요?</strong></span></p>
<p> </p>
<p>명동이라는 거리의 화냥기, 마담 그레이스의 화냥기, 이모의 화냥기, 엄마의 화냥기, 수연의 화냥기, 수희의 화냥기....</p>
<p>문제는 소설 속 이 화냥기들이 여성성을 자본화하는 것이라고 단정짓기도, 그렇다고 화냥기를 통제하려는 가부장제에 맞서는 주체들의 전복적 실천이라고 말하기도 좀 애매한 구석이 있다는 것입니다.</p>
<p> </p>
<p>위에서 말한 ‘화냥기’는 분명 남성의 시선을 끌어당기고, 관계를 열고, 때로는 여성에게 자원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 점에서 지영샘 말처럼 그것은 여성이 사회적 자본을 획득하는 문제와 연결되어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소설 속에서 이것은 결코 안정된 자본이 아닙니다. 그것은 언제든 휘발되고, 뜻대로 환전되지 않으며, 오히려 여성 자신을 더 깊은 결핍과 환멸 속에 빠뜨리기도 합니다.</p>
<p>이모는 끝없이 남자를 고르지만 번번이 실속이 없고 엄마의 화냥기는 결국 파국을 촉진합니다. 마담 그레이스의 매혹조차 매번 다시 수행되어야 하는 불안정한 능력입니다. 여성의 섹슈얼리티는 분명 자원이지만, 너무 쉽게 닳고 너무 쉽게 여성 자신을 소진시키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p>
<p> </p>
<p>그렇다면 수연은 어떤가요?</p>
<p>수연의 ‘화냥기’는 이모나 엄마, 혹은 마담 그레이스와는 약간 결이 달라 보입니다. 그것은 누군가를 유혹하거나 관계를 통해 무엇을 얻어내기 위한 계산된 능력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경계를 시험하고, 금기를 건드리고, 관계를 뒤틀어보려는 충동에 더 가까워 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인지 그녀의 섹슈얼리티는 종종 자기 내부의 어떤 균열과 흔들림에 직면합니다. 즉 그녀의 화냥기는 기존의 질서로부터 미끄러져 나가려는 도주선처럼 보이지만 매번 다시 포획되기도 하는 매우 불안정하고 잠정적인 도주선인 듯 보입니다.</p>
<p> </p>
<p>전복적이라고 말하기에는 어딘가 부족하고, 그렇다고 기존 질서에 완전히 포섭된 것이라고 보기도 어려운 그 어디쯤에 존재하는 수연의 ‘화냥기’,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수연의 그 미완의 움직임, 혹은 실패하는 탈주를 같이 목격하면서 응원하는 일일까요?</p>
<p> </p>
<p>오늘은 여기까지 정리해보겠습니다. 지영샘 후기가 촉발시켜서 썼습니다. '꼬고무'처럼 누군가 또 이어가주면 좋겠네요. </p>]]></description>
			<author><![CDATA[문탁]]></author>
			<pubDate>Mon, 23 Mar 2026 15:29:24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naidum.org/?kboard_redirect=25"><![CDATA[집중탐구학교]]></category>
		</item>
				<item>
			<title><![CDATA[[도시의 흉년3 후기] '화냥기'에서 시작된 질문: 여성의 섹슈얼리티는 어떻게 자본이 될까]]></title>
			<link><![CDATA[https://naidum.org/?kboard_content_redirect=578]]></link>
			<description><![CDATA[<p class="p3">고백하건대 나는 그렇게 계몽적인 사람이 아니다. 심지어 의식적으로 계몽적인 것과 거리두기를 한지도 오래되었다. 그러한 나였건만, 『도시의 흉년』을 읽는 동안 내 안에서 솟아오르는 일종의 계몽주의와 싸워야 했다. 도덕이나 윤리의식 따위는 손톱만큼도 없는 등장인물들. 주인공인 수연이 또한 예비형부 서재호를 꼬시려 들거나 성의없는 취준생 태도를 보일 때, 끊임없이 가르침을 주고 싶은 충동에 시달렸다. 내가 그토록 계몽적인 사람이었는지 스스로도 놀라웠다.</p>
<p class="p3">3권까지 다 읽고나서, 혼란스럽고 찜찜한 마음이 오래갔다. 도대체 이 소설이 뭘 말하고 싶은 것인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 이 소설은 어떤 메시지를 설파하기보다, 1970년대 중산층의 물질만능주의와 허위의식을 적나라하게 보여줌으로써 그 자체로 문제를 드러내는 방식을 취했음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1960년대 이후 한국사회는 급격한 산업화와 도시화가 진행됐다. 소위 '한강의 기적'을 이루며 물질적 풍요를 축적해 갔지만, 그 이면에서 사람들의 삶은 도덕과 윤리가 흔들리는 정신적 기근 상태에 놓여 있었던 것 같다. 수연이네 가족이 겪은 사건은 실로 재난급 가뭄이거나 홍수 같은 것이었으니, 도시의 흉년이라는 책의 제목이 이 보다 적절할 수 없겠다.</p>
<p class="p3">곱씹게 되는 건, 소설 속 여성들의 생존 방식이었다. 사회적 자본이 부족한 여성들이 사회.경제적으로 살아남기 위해 여성성을 활용하고 있다. 김복실 여사는 양색시 장사로 동대문상가와 서울의 집 몇채를 살 밑천을 마련했다. 수연이는 이모가 가진 화냥기가 좋다고 말하지만, 이모는 골라잡는 남자마다 실속이 없다. 마담 그레이스는 유학까지 다녀온 실력에 더해,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묘한 끼, 곧 수연이 말하는 화냥기를 지녔다. 마담 그레이스의 고객들은 맞춤옷을 주문하면서 동시에 그녀의 화냥기, 즉 남성의 시선을 끌어당기는 어떤 기운까지 옮겨오기를 바란다. 그렇게 옮겨온 화냥기로 더 번듯한 남자를 만나고자 했을 것이다. 현모양처로 가기 위한 관문, 결혼시장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서는 학벌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인식이 만들어낸 풍경이리라.</p>
<p class="p5">수연이 이모와 마담 그레이스의 끼를<span class="s1"> ‘</span>화냥기<span class="s1">’</span>라는 전통적인 낙인어로 부르면서도<span class="s1">, </span>그 의미는 긍정이나 조롱 어느 한 쪽으로 쉽게 기울지 않는다<span class="s1">. </span>나는 그 말에<span class="s1">, </span>여성에게는 쌓기 어려운 사회적 자본을 대신해 몸과 관계가 동원될 수밖에 없었던 구조에 대한 인식이 담겨 있는 것으로 읽혔다<span class="s1">. </span>그렇다면 남성과 자본이 중심인 질서 속에서 여성의 섹슈얼리티가 사실상 자본처럼 작동하던 그 구조는 지금 어떤 모습으로 이어지고 있을까<span class="s1">.</span></p>
<p>———————————————-</p>
<p>이날의 튜터 문탁샘은 메모조가 종합적인 후기를 잘 써보라고 하셨지만, 소설을 읽으며 혼란했던 마음은 세미나가 끝나자마자 홀라당 아무 생각이 없게 만드는 것으로 이어졌다. 암튼 그래서 이 정도로 서설을 끝내고 세미나 내용을 간략히 정리하면서 후기를 마치려고 한다. 『도시의 흉년』 3권으로 진행된 지난 세미나는 수연이의 '자립', 소설 전반에 흐르는 '막장성(폭력성과 불륜)', 그리고 당시 시대적 한계와 여성상에 대한 이야기로 채워졌다.</p>
<p> </p>
<p class="p3"><strong>1. 수연의 '자립'에 대한 해석</strong></p>
<p class="p3">• 수연이 갈망한 자립은 경제적 독립보다는 '가족이라는 족쇄(할머니의 저주, 부모의 위선)'로부터의 탈피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녀의 생활은 여전히 부모의 자본에 기반한 소시민적 안락함에 젖어 있는 모순과 한계를 드러냈다.</p>
<p class="p3">• 구주현을 따라 농촌으로 내려가는 결말은 결국 또 다른 형태의 종속(결혼)이며, 70년대 고학력 여성이 선택할 수 있었던 대안의 부재를 보여주는 한계로 보는 시각이 많았다.</p>
<p class="p3">• 소설 속에서는 비록 (자립이) 미완의 상태일지라도, 익숙한 안락함을 버리고 끊임없이 흔들리며 '도주선'을 찾아 나가는 과정 그 자체를 자립의 동력으로 보기도 했다.</p>
<p> </p>
<p class="p3"><strong>2. 소설의 '막장성'과 현실의 리얼리티</strong></p>
<p class="p3">• 인물들의 저열함과 노골적인 폭력 묘사가 신체적인 불쾌감을 줄 정도로 과하다는 의견. 특히 모든 사건이 불륜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방식이 불편했다는 의견이 있었다.</p>
<p class="p3">• 이러한 '막장'이야말로 당시 중산층 가정의 위선과 70년대 한국 사회의 혼재된 욕망을 현미경처럼 적나라하게 폭로한 것이라는 평가도 있었다. 소설이 대중에게 영합한 것이 아니라 현실이 그만큼 막장이었다는 해석이다.</p>
<p> </p>
<p class="p3"><strong>3. 야학 장면을 통한 인물 분석</strong></p>
<p class="p3">• 수연은 다른 지식인들처럼 아이들을 사명감이나 연민으로 대하지 않고 철저히 거리를 둔다. 이는 그녀가 기존의 이념이나 대의(현모양처, 계몽주의)에 함몰되지 않는 주체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동시에 위계질서 자체에 대한 거부감으로 해석될 수 있다.</p>
<p> </p>
<p class="p3"><strong>4. 가부장제와 '여적여(여자의 적은 여자)' 프레임</strong></p>
<p class="p3">• 상피 붙는다는 저주. 할머니가 내뱉는 이 미신적 장치는 가부장제가 여성의 성과 욕망을 억압하는 강력한 규범적 기제로 작동함을 상징한다.</p>
<p class="p3">• 소설 속에 여성 간의 시기.질투가 등장하지만(여적여 프레임), 실제로는 위기 상황에서 가정을 지탱하거나 서로의 삶을 응원하는 여성들의 생명력과 연대가 더 중요하게 다뤄졌다.</p>]]></description>
			<author><![CDATA[도레미]]></author>
			<pubDate>Sun, 22 Mar 2026 02:49:20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naidum.org/?kboard_redirect=25"><![CDATA[집중탐구학교]]></category>
		</i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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