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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나이듦연구소</title>
		<link>https://naidum.org</link>
		<description>다른 노년의 탄생</description>
		
				<item>
			<title><![CDATA[늙어감에 대하여 (1) 후기]]></title>
			<link><![CDATA[https://naidum.org/?kboard_content_redirect=721]]></link>
			<description><![CDATA[<p>먼저, 자갈샘의 발제문 - 글이 너무 많은 소주제들을 담고 있어서, 발제문 쓰기가 어렵겠다 생각했지만, 자갈샘이 잘 정리해 주셔서 다행이다. 그래도 글의 내용이 기본적으로 어려운 것을 보니 '늙어감'은 역시 삶의 어려운 명제 중의 하나 이다.</p>
<p> </p>
<p>이번 메모들에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 '늙어감'이라는 직설적 제목이 마음에 든다는 사실이다.</p>
<p> </p>
<p>소요유샘 - 마음에 드는 제목 말고도 소제목들도 괜찮다. 늙어감은 확실히 불편하지만, 자신이 늙어가는 것을 인정하면 삶이 어떻게 되는가? </p>
<p>니은 - 나도 제목이 ! 그리고 지난 주와 같이 늙어가는 몸에 대해 이야기 하고 싶다.</p>
<p>앙코르 석공 - 자아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의 느낌, 기억, 사유의 집합이 스스로 자신을 자아라고 환상을 하고 있다.</p>
<p>마리 - 노인들을 만나기도 하면서, 노인의 삶을 준비하면서 살고 있다. 장 아메리 덕분에 쁘리모 레비가 생각난다.</p>
<p>하현 - 청년에게는 세계가 있고 늙어가는 노인에게는 세계가 빠져 나가고 시간만 있다. 자신이 되기 위해 세계를 포기한다는 것은 알듯 말듯 !</p>
<p>유유 - 아픈 몸이 불편하다. 하지만 이런 몸을 어떻게 자연스럽게 수용하며 살아갈까, 고민이다.</p>
<p>엄지 - 영화 백발마녀전을 기억하니 이 글이 더 잘 이해된다. 하지만 노화를 '오롯이' 받아 들이려면 성찰이 더 필요하다.</p>
<p> </p>
<p> </p>]]></description>
			<author><![CDATA[앙코르석공]]></author>
			<pubDate>Mon, 26 Oct 2026 23:08:43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naidum.org/?kboard_redirect=10"><![CDATA[나이듦대중지성]]></category>
		</item>
				<item>
			<title><![CDATA[[나이듦대중지성_시즌3] &lt;늙어감에 대하여&gt;2회차 공지]]></title>
			<link><![CDATA[https://naidum.org/?kboard_content_redirect=720]]></link>
			<description><![CDATA[<p>&lt;늙어감에 대하여&gt; 1회차 메모가 기억납니다.</p>
<p> </p>
<p>"&lt;늙어감에 대하여&gt;라는 직설적인 책제목이 퍽 마음에 들었다. 소제목 &lt;저항과 체념 사이에서&gt; 나이듦, 늙어감의 매 순간 갈등과 체념, 수용의 경험을 하는 나로서 매우 흥미로울 것 같은 인상이 들었다. 서문에 나오는 시도, 모험, 탐색, 관찰, 공감, 성찰, 주관적 이런 단어도 좋았다."</p>
<p> </p>
<p>또는</p>
<p>"‘늙어감’이라는 단어를 용감하고 정직하게 제목으로 썼다 는 것에 믿음이 간다. 각종 미사여구로 포장해 늙어감을 직면한다는 것이 무슨 더러운 것을 만지는 것처럼 여겨지게 하는 다른 책들과는 다르다. 내용도 정직하면서 디테일해서 좋다. 우 리 ‘나이듦 연구소’도 ‘늙어감 연구소’라고 하는 건? 멋지지 않나요? 용감하고 씩씩하게!"</p>
<p> </p>
<p>그리고</p>
<p>"노인에 대한 부정적 시선에 저항하는 노년의 실존 이전 농촌에서 살았던 어린 시절 속, 노인에 대한 부정적인 기억이 없다. 자연과 다양한 세대 가 섞여 자연스럽게 흘렀던 사회, 노인은 존경 받고 '지혜'로운 존재였다. 산업화로 '소유'가 존재의 기준이 되는 시대가 되면서 노인은 '쓸모'로 비하되고 부정적인 시선에 내몰렸다. 노인 대열에 들어가는 60대, 자존을 위한 '진짜 공부'가 필요하다."</p>
<p> </p>
<p>마지막으로</p>
<p>"늙고 아픈 몸을 수치스럽고 불편해하는 마음. 그런 마음은 내 안에 켜켜이 쌓아온 시간, 즉 나의 역사를 부정하고 모욕하는 것이다. 나를 부인하는 것이다. 몸이 아프고 통증이 심해지자 일상생활에 당연시 하던 여러 일들이 제약을 받기 시작했고 일 단 마음부터가 소심해지고 주저함이 많아진다. 마음도 위축되고 우울감도 심해지는 것도 물론 이다. 이런 현상이 나의 자아/ 정체성에도 혼란을 일으킨다는 말인가 싶다. 나의 몸을, 아프고 병들어 가는 나의 신체를 어떻게 자연스럽게 수용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좋은 건가 고민이 깊어진다."</p>
<p> </p>
<p>1회차 세미나에서 나누었던 고민들이 2회차로 이어져 여러분들이 어떤 깨달음에 도달했을지 궁금합니다^^</p>
<p> </p>
<p>장 아메리는 5부까지 치열하게 질문해 온 늙어감에 대해 속 시원한 대답을 내놓지 않습니다. 다만 이렇게 일단락짓고 있습니다.</p>
<p>"A는 균형을 깨트리며, 타협을 폭로하고, 통속화를 짓밟으며, 싸구려 위로를 깨끗이 쓸어버리는 그 어떤 일을 해냈을까?</p>
<p>그는 그랬기를 희망한다."</p>
<p> </p>
<p>장 아메리가 희망한 것에 대해 우리의 답을 내놓아 봅시다^^</p>
<p>메모는 월요일 밤까지 입니다~</p>
<p>화요일 세미나에서 뵙겠습니다^^</p>]]></description>
			<author><![CDATA[기린]]></author>
			<pubDate>Sat, 24 Oct 2026 19:22:12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naidum.org/?kboard_redirect=10"><![CDATA[나이듦대중지성]]></category>
		</item>
				<item>
			<title><![CDATA[박완서 파이널 에세이 - 팁]]></title>
			<link><![CDATA[https://naidum.org/?kboard_content_redirect=719]]></link>
			<description><![CDATA[<p>유투브를 올려주신 지영샘을 보며,</p>
<p>아, 에세이에 대한 고민을 시작하시겠구나 싶어서,</p>
<p>저와 파랑이 되는대로 에세이 주제가 될만한 것들을 뽑아봤습니다.</p>
<p> </p>
<p>----------------------------------------------------------</p>
<p>우선 저는...</p>
<p>1. 70년대 박완서의 중산층 소설은 왜 그렇게 불편할까?<br />
혹은 박완서 주인공은 왜 이렇게 찌질할까?</p>
<p><br />
2. 압축적 근대화와 박완서 소설 속의 공간 : 2층양옥과 맨션, 명동</p>
<p><br />
3. 고개숙인 아버지의 원조, 허성씨와 가족주의</p>
<p><br />
4. 초희를 위한 변명 -여성의 생존전략을 중심으로</p>
<p><br />
5. '억척어멈'의 계보학 - 엄마의 말뚝과 그 많던 싱아를 중심으로<br />
혹은 여성가장의 계보학 - 도시의 흉년과 김복실 여사를 중심으로</p>
<p><br />
6. 서 있는 여자는 이혼한다 - 박완서의 페미니즘</p>
<p><br />
7. 기억과 상상력 혹은 픽션과 넌픽션 : 싱아와 그 산의 문학적 성취에 대하여</p>
<p><br />
8. 박적골과 개성- 박완서 문학의 원체험</p>
<p><br />
9. 문안의식과 문밖의식 - 전후 한국인 집단심성의 형성과정</p>
<p><br />
10. 식민지는 어떻게 체험되는가? - 미망의 인물들이 경험한 식민지 근대</p>
<p><br />
11. 전쟁은 여성의 얼굴을 하고 있다</p>
<p><br />
12. 전쟁은 어떻게 글쓰기가 되는가</p>
<p><br />
13. 박완서, 소위 천의무봉 글쓰기의 핵심 : 인물의 다면성과 생생함</p>
<p> </p>
<p> </p>
<p>--------------------------------</p>
<p> </p>
<p>파랑은...</p>
<p>1.박완서의 속물_ 찌질함은 누구를 통해 나타나는가, 그의 찌질함은 무엇인가</p>
<p> </p>
<p>2. 박완서의 전쟁과 평화 : 박완서에게 전쟁은 어떤 것으로 어떻게 감지되는가.</p>
<p>고난서사, 상실체험과 복원 욕망, 근원적 공포를 부여하는 경험, 해체와 재구축의 욕망.....</p>
<p> </p>
<p>3. 일상의 균열을 드러내는 정동과 몸의 징후 : 미열/신열, 멀미/현기증, 두통, 초조, 불안, 괴이한 식욕....</p>
<p> </p>
<p>4. 어머니와 자식의 관계</p>
<p>(1) 소통단절과 불가: 나목, 도시의 흉년....<br />
(2) 극진한 자식사랑</p>
<p> </p>
<p>5. 여성의 일/직업과 주체<br />
(1) 생존으로서의 경제활동, 생계부양, 경제적 주체..</p>
<p>(2) 가모장(여성주체)의 성립 가능성_ 미망, 서있는 여자</p>
<p> </p>
<p>6. 박완서 소설의 그 남자와 그 여자</p>
<p><br />
(1) 백마탄 왕자? 든든한 오빠? 나쁜 남자? 내편/남편? (옥희도/태수(나목), 민준식(목마른 계절), 구주현(도시의 흉년), 현과 남상(오만과 몽상)</p>
<p>공회장/김상기, 오민수, 정훈/문경하 (휘청거리는 오후)<br />
정인철(살아있는 날의 시작), 철민(서 있는 여자)</p>
<p><br />
(2) 착한 여자?</p>
<p>콩쥐(살아있는 날의 시작), 영자(오만과 몽상)...</p>
<p> </p>
<p>7. 밥 먹기의 힘과 밥상차리기의 힘(음식, 식욕, 모성)</p>
<p><br />
[나목]_ 음식 거부하는 어머니, 어머니의 김치국, 경아가 탐하는 만두, 옥희도집의 밥상. 미군 PX, 중국집 복순루.</p>
<p>[목마른 계절]_ 생존의 밥</p>
<p>[도시의 흉년]_ 생존, 김치, 고추장/찹쌀고추장</p>
<p>[오만과 몽상] 통닭의 기름냄새.</p>
<p>[서있는 여자] 벽제갈비(윤경쌤), 식탁. 이혼순례길의 부자친구- 먹이기의 모성, 밥상차리기</p>
<p> </p>
<p>8. 전쟁으로부터 살아남기, 딸들의 희생서사 VS 여성 가장의 탄생</p>
<p> </p>
<p>9. 여성과 돌봄</p>
<p>순정과 시어머니, 청희와 친정/시어머니, 콩쥐의 가족부양....</p>
<p> </p>
<p>10. 기억은 어떻게 글쓰기가 되는가.</p>
<p>과거는 어떻게 현재로 소환되는가. : 나목과 목마른 계절 /그 많던 싱아~ 와 그 산이 정말~</p>
<p> </p>
<p> </p>
<p>----------------------------------------------------------------------------</p>
<p>제가 좀 웃었습니다.</p>
<p>저도 파랑도 그간 강조했던 것을 다시 정리한 것에 불과한데요,</p>
<p>이렇게 그걸 모아서 써놓고 보니까 저와 파랑의 차이가 확실하네요.</p>
<p> </p>
<p>저는 뭐랄까, 컨텍스트에 더 관심이 있고, 파랑은 텍스트 자체에 더 관심이 있네요.</p>
<p>제가 약간 사회비평적인 접근을 하고 싶어한다면, 파랑은 텍스트 자체가 발신하는 기호를 추적하고 의미를 부여하는데 더 초점을 맞춥니다.</p>
<p><br />
제 접근의 약점은 개념이 앞서서 텍스트가 도구가 될 수 있다는 점이고</p>
<p>파랑 접근의 약점은 "so, what?" 의 질문이 남을 수 있다는 점 아닐까요?</p>
<p> </p>
<p>근데 다시 보니<br />
파랑은 확실히 아카데미 연구자 같고, 저는 그냥 대충 직관적이네요. ㅋㅋ</p>]]></description>
			<author><![CDATA[문탁]]></author>
			<pubDate>Wed, 21 Oct 2026 05:39:53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naidum.org/?kboard_redirect=25"><![CDATA[집중탐구학교]]></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치매세미나] 7회차 공지]]></title>
			<link><![CDATA[https://naidum.org/?kboard_content_redirect=718]]></link>
			<description><![CDATA[<p> </p>
<p>&lt;생의 마지막 당부&gt; 4장과 5장을 읽습니다.</p>
<p>4장은 조력사망에 관련한 내용입니다. </p>
<p>   "그래도 의료 시스템 안에 탈출 경로가 있다면, 우리처럼 지치고 너무 쇠진한 사람들이 최후에 영면을 택할 수 있다면 좋겠다. 만성병이나 진행성 또는 말기 질환자 모두가 그래야한다는 것이 아니고, 말기를 피하고 싶은 사람들, 인생의 다른 모든 부분을 계획한 것처럼 마지막도 계획하고 싶은 사람들, 할 수 있을 때 작별을 고하고 싶은 사람들, 조력 사망을 고려할 권리를 원하는 사람들이 그런 선택을 할 수 있다면 좋겠다. 그러면 좋겠다."(162)</p>
<p>저자는 여기에서도 '선택'을 이야기합니다. </p>
<p> 저자는  "정부와 의료진이 자기 건강은 자기가 평생 책임져야 한다고 말하지만 정작 마지막 때가 되면 죽는 방식에 대한 통제권을 우리에게 주지 않고 그 책임을 앗아가는 현실"을 다른 사람과의 대화를 통해 풀어갑니다. </p>
<p>존엄사와 관련된 법적 상황도 짚어보고 완화치료 의사,  조력사망을 옹호하는 사람, 반대하는 사람들과도 대화를 나눕니다.</p>
<p>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도 조력사망에 관해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p>
<p> </p>
<p>5장은 삶에 대한 대화 입니다.</p>
<p>현재 삶이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 나의 장애요인은 무엇인지, 남은 생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p>
<p>치매가 가르쳐 준 현재를 살아가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p>
<p>  "인생에 대한 강한 집착을 놓을 때, 손가락을 조금 펼치고 그 사이로 시간이 모래처럼 빠져나가는 것이 더 끈질기게 느껴질 때가 되면, 두려움이 없어진다. 우리 모두에게 일어날 일이 더 강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통제는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다 직관적으로 알게 된다. 그리고 바로 그때 정말로 부지런하게 삶을 살아간다."(244)</p>
<p> </p>
<p>치매 진단을 받고 살아가면서 자신의 삶에 대해, 다른 치매인들을 위해, 그리고 모든 사람들을 위해 책을 쓰고 강연을 하며 치매인으로 살아가는 저자가 이야기하는 '마지막 당부'를 함께 나누어보면 좋겠습니다.</p>
<p> </p>
<p>같이 나누고 싶은 이야기 메모로 남겨주세요</p>
<p> </p>
<p>다음 주는 마지막 주입니다. A4 2쪽 정도의 짧은 미니 에세이를 써서 함께 나누는 시간을 가져보겠습니다.</p>
<p> </p>
<p> </p>
<p> </p>]]></description>
			<author><![CDATA[인디언]]></author>
			<pubDate>Tue, 20 Oct 2026 09:18:17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naidum.org/?kboard_redirect=27"><![CDATA[단기세미나]]></category>
		</item>
				<item>
			<title><![CDATA[[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후기] 굴욕의 연대]]></title>
			<link><![CDATA[https://naidum.org/?kboard_content_redirect=717]]></link>
			<description><![CDATA[<p>  주말에 지영샘이 올려준 박완서 관련 동영상 봤는데요. “그냥 여성도 똑같은 인간으로 생각하고 발언하고”, “독립된 생각”을 말했을 뿐이라는 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감사해요. ^^</p>
<p>  지난 세미나에서 많은 이야기가 나왔는데, 제가 올린 질문과 관련한 부분만 정리해 보았습니다. 다른 이야기들은 다른 샘들이 올려주시겠죠?</p>
<p> </p>
<p><b>1. '</b><b>올케</b><b>'</b><b>와의 우정을 뭐라고 명명할 수 있을까</b><b>?</b></p>
<p>  이 자전적 소설에서 나는 여성 ‘동지’들과의 관계가 계속 눈에 들어왔다. 엄마, 올케, 할머니, 근숙이 언니, 티나김. 특히 올케와의 관계는 소설 속에서 '우정'이라는 단어로 계속 환기된다. 문탁샘은 이 관계를 뭐라고 명명할 수 있을지 말해 보자고 했다. 샘들이 흥미롭고 다양한 의견을 내주셨다.</p>
<p>  먼저 적절한 거리감을 유지한다는 점에서 ‘배우자’, 밥벌이를 위해 의기투합한다는 점에서 ‘가장공동체’와 같은 의견으로 시작했다. 께름칙한 경험을 공유했기에 ‘공범’, ‘공동정범’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고,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한 ‘전우애’를 나누었다고도 볼 수 있겠다. 전우애는 남성들과의 비교가 가능한데, 남성들의 전우애는 적군이 명확하게 있는 경우로서, 적을 물리치고 아군을 구함으로써 영웅서사가 이루어질 수 있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 같은 경우이다. 하지만 여성들의 전우애는 적군이 없는 전우애이며,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게 우선이었고, 후방에서 더 치열하게 매순간 남의 이목에 신경쓰며 몰래, 또는 요령껏 식구들의 생계를 해결하는 데 힘썼다. 생계와의 전쟁에서 윤리나 도덕은 일단 보류하고, 때로는 빈집털이를 하고, 때로는 몸을 팔고, 몸 파는 여성에게 옷을 팔고, PX에서 미군을 상대로 호객행위를 하기도 한다. 타인의 굴욕 앞에서 함께 수치심을 느끼며 같이 토악질을 해댈 수밖에 없는 경우도 생긴다. 이것을 ‘수치심의 연대’라고 할 수 있을까? 또는 ‘굴욕의 연대’도 가능할 것 같다. 굶주림을 면하기 위한 돈벌이는 모멸감을 무릅써야 한다. 모멸감, 공동의 수치심, 연민, 이러한 것으로 맺어진 연대는 끈끈하다. 이 모든 것은 ‘밥벌이의 준엄함’ 덕분에 다 가능한 것이다. 먹고 사는 것을 우선순위에 두면 ‘자포자기의 연대’도 가능하다. 수치심에 대해서는 파랑샘이 언급해 주신 프리모 레비라는 사람을 참고하면 좋을 것 같다.(『이것이 인간인가』) 여성들의 이런 연대감은 영웅적인 것과는 다르게 숭고하다는 생각이 든다.</p>
<p> </p>
<p><b>2. 엄마</b></p>
<p>  소설 속에서 (혹은 작가의 삶 속에서) ‘엄마’도 개성이 강한 인물로 나온다. 마지막 장면에서 ‘나’는 결혼하고 친정에 와서 엄마가 통곡을 했다는 말을 듣고 묵혀 두었던 울음을 토해 낸다. 그러면서도 엄마와 결코 울음을 같이 나누지는 않을 것 같다고 하는데, 그 말이 찌릿했다. ‘엄마’는 ‘나’에게 왜 그렇게 차가웠을까? 나의 엄마도 어릴 때를 떠올리면 냉랭하고 차가웠다. 친구도 많고 사회성도 좋은 엄마였다. 집에 있을 때도 전화기를 붙들고 있을 때가 많았는데, 통화는 늘 내가 들을 수 있을 만큼 큰 소리였고, 그중 가장 거슬리는 건 내 자랑이었다. 자기는 아무것도 안 했는데 우리 애가 공부를 이번에 몇 점 받았대, 뭘 한대, 상을 받았네, 어쩌고 저쩌고.....하지만 정작 내게 뭘 잘했다고 칭찬한 적은 없었다. 지금은 나이가 들면서 관계가 많이 달라졌지만, 소설 속 ‘나’가 ‘엄마’에 대해 느끼는 섭섭함과 뒷담화에는 격하게 공감이 되었다.</p>
<p> </p>
<p><b>3.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b><b>?</b></p>
<p>  ‘그 산’이 무엇인지를 두고 여러 이야기들이 오갔다. 먼저 해야샘은 ‘가난하고 평범한 여성들의 전쟁 체험’으로 다가왔다고 했다. 그 체험은 생존과 생계를 책임지는 일이면서, 연민과 돌봄이 함께 하는 일이었던 것 같다. 나는 그 산이 ‘이데올로기’로 느껴졌다. 굶주림을 해결하는데 이데올로기의 유불리가 쓰일 뿐 그 실체는 없었기에, ‘그 산, 즉 그 이데올로기가 정말 거기 있었을까’하는 기억에 대한 의심으로까지 이어졌다고 생각한다.</p>
<p>  작가는 『싱아~』와 『그 산~』이 기억에 의존해 쓴 소설이라고 했다. 후쿠오카 신이치의 『동적평형』에 따르면 기억을 담당하는 분자는 따로 없고, 신경 세포 사이 연결의 강도와 회로의 패턴이 있을 뿐이다. 작가는 수십 번 글을 쓰면서 그 연결을 강화하고 같은 패턴을 반복했을 것이다. 또 새로운 자극이 올 때마다 전쟁의 기억이 섬광처럼 되살아나 그 패턴이 다시 나타났을 것이다. 그렇다면 글쓰기는 새로 만난 섬광을 기존의 기억에 덧붙여 다시 만들어 내고, 아직도 아픈 자신의 상처를 씻김굿으로 달래는 행위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보았다.</p>
<p> </p>]]></description>
			<author><![CDATA[은사자]]></author>
			<pubDate>Sun, 18 Oct 2026 18:48:22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naidum.org/?kboard_redirect=25"><![CDATA[집중탐구학교]]></category>
		</item>
				<item>
			<title><![CDATA[[나이듦대중지성_시즌3] &lt;늙어감에 대하여 1&gt; 공지]]></title>
			<link><![CDATA[https://naidum.org/?kboard_content_redirect=716]]></link>
			<description><![CDATA[<p>나의 죽음에 대한 존재론적 고민을 다룬 소설에 이어 이번에는 쪼금(?!) 더 어려운 텍스트를 읽습니다.</p>
<p>위키백과에는 장 아메리를 수필가, 작가로 소개하고 있는데요,</p>
<p>홀로코스트 생존자로서의 처절한 경험을 저술한 [정신의 한계에서-<i id="mwDA">아우슈비츠와 그 현실에 대한 생존자의 성찰</i>]로 유럽 문단의 주목을 받은 2년 후, 청춘의 열기가 서구 사회 전반을 뒤흔들던 때 [늙어감에 대하여]를 출간 합니다. </p>
<p>저는 1968년이라는 출간 연도와 책의 제목이 참 공교롭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p>
<p>그래서 본문 이해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하여 발제문 서두에 장 아메리가 [늙어감에 대하여]를 집필하던 시기의 상황을 Gemini 님의 도움을 받아 정리해 보았습니다. </p>
<p>그 시대 유럽 작가들의 글쓰기 방식이 친절하지는 않죠?</p>
<p>그래도 우리 집단 지성의 힘으로 다가가 보도록 합시다.</p>
<p> </p>
<p>발제문에 포함한 토론 질문을 참고한 의견이나 이해가 어려웠던 문장들을 질문으로 올려 주셔도 됩니다.</p>
<p>메모는 월요일 밤 9시 늦지 않게 올려 주시구요,</p>
<p>화요일 뵙겠습니다.</p>
<p> </p>]]></description>
			<author><![CDATA[자갈]]></author>
			<pubDate>Sat, 17 Oct 2026 15:27:49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naidum.org/?kboard_redirect=10"><![CDATA[나이듦대중지성]]></category>
		</item>
				<item>
			<title><![CDATA[&lt;이반일리치의 죽음 &gt; 후기]]></title>
			<link><![CDATA[https://naidum.org/?kboard_content_redirect=715]]></link>
			<description><![CDATA[<p>이번 나이듦 대중지성에서는 톨스토이의 &lt;이반일리치의 죽음&gt;을 읽었습니다.</p>
<p>서해 님의 발제로 각자의 의견과 생각을 나눴습니다.</p>
<p>이반일리치가 죽은 모습을 묘사한 장면을 읽어주었는데 죽음의 과정과 마지막 임종의 모습과 연결 지으면 납득이 되는 모습이었다고 했습니다. 저도 표트르가 남긴 이반일리치의 죽은 모습을 묘사한 장면이 퍽 인상적이었습니다.</p>
<p> </p>
<p>세미나에서 주로 나온 얘기로는</p>
<p>이반일리치가 비교적 행복한 삶을 살고 죽음의 과정도 그만하면 괜찮은 것 같다. 부럽다.</p>
<p>아빠의 죽음이 생각나고, 갑작스러워서 지금 돌이켜보니 죽음의 과정이 없어서 안타까웠다. 건강하게 애도하고 받아들이고 싶다.</p>
<p>타인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태도와 애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산사람 중심으로만 생각했는데 죽은 자에 대한 생각도 해야 하지 않을까</p>
<p>게라심, 하인이 인상적이었다. 이반 일리치를 이해하고 죽어가는 사람을 위한 일을 기꺼이 하는 사람.</p>
<p>어린이에게도 죽음에 대한 설명과 교육이 필요하다. 죽음과 관련된 동화책을 이용하면 좋을 것 같다.</p>
<p>죽음에 이르는 과정이 마치 삶의 성적표를 받는 것 같았다. 삶의 성찰이 필요하다.</p>
<p>톨스토이가 이 책을 쓴 것은 죽음에 대한 성찰과 생각을 하고 살아가라는 교훈을 주려고 한 것 같다. 삶에서 죽음을 받아들여야 한다는.</p>
<p>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Elisabeth Kübler-Ross)가 제시한 '죽음의 5단계&lt;부인 - 분노 - 타협 - 우울 - 수용&gt;(The Five Stagesof Grief)'를 통해 인간이 죽음을 마주하고 이를 받아들이는 과정이 생각났다.</p>
<p>이반일리치가 신부에게 성찬을 받은 후 변화되어가는 부분이 마음에 와 닿았다. 그때부터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성찰의 시간을 갖은 것 같다.</p>
<p>톨스토이가 아내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하는데 이 소설에서도 아내를 좋게 쓰지 않은 것 같다. 결혼생활을 계속 좋게만 이어간다는 건 어려운 일인 것 같다. 톨스토이의 죽음의 과정과 마지막가지 아내를 만나 주지 않은 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p>
<p>평소 죽음에 대해 많이 생각하고 있다. 소설 속의 상황과 지금의 상황에 대한 차이가 있어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p>
<p>삶과 죽음은 늘 이어져있음을 기억하고 잘 살아내는 것이 중요하다.</p>
<p>죽은 자나 살아남은 자나 모두 각자 자기의 삶을 산다. 죽은 사람이 자신이 아님을 안도하고, 살아갈 궁리를 한다.</p>
<p>죽음의 발병 순간부터 차츰 죽음을 받아들이는 과정과 마지막에 빛을 보고 ‘이렇게 좋을 수가’ 하고 말하며 죽는 과정을 묘사한 게 놀라웠다.</p>]]></description>
			<author><![CDATA[소요유]]></author>
			<pubDate>Sat, 17 Oct 2026 10:35:56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naidum.org/?kboard_redirect=10"><![CDATA[나이듦대중지성]]></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치매세미나] 6회차 공지]]></title>
			<link><![CDATA[https://naidum.org/?kboard_content_redirect=714]]></link>
			<description><![CDATA[<p>이번 주에는 &lt;생의 마지막 당부&gt; 1, 2, 3장을 읽습니다. 한 주에 읽기에 좀 부담스러울 것 같아서 두 번에 나누어 읽기로 했어요.</p>
<p>&lt;두근두근 노인돌봄&gt;은 각자 읽어보기로 했습니다.</p>
<p> </p>
<p>저자 웬디 미첼은 50대에 초로기 치매 진단을 받았고 &lt;내가 알던 그 사람&gt; &lt;치매의 거의 모든 기록&gt; 등의 책을 쓰면서 치매를 적극적으로 알리는 알츠하이머병 협회 홍보대사로 활동하고 있습니다.</p>
<p>이 책은 그녀가 진행성 질환 환자로 살면서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며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그것을 풀어낸 책입니다.</p>
<p> </p>
<p>    삶의 마지막은 어떨까? 고통스러울까? 그때 좀 더 편안해질 수 있도록 지금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 고통스럽게 느껴질 경우, 마지막을 앞당기기 위해 할 수 잇는 일이 있는 걸까? .....  두려워하지 않길 바란다. 나는 죽음이 어떻게 진행되어야 한다고, 또는 어떤 느낌이어야 한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저 어느 날 죽음이 찾아올테니 준비를 많이 할수록, 그리고 의료 전문가들이나 사랑하는 사람들과 더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현재를 살아갈 힘이 더 커진다는 점을 조용히 일깨우고 싶을 뿐이다.(11쪽)</p>
<p> </p>
<p>그녀가 프롤로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는데 그는 어떤 사람들과 무슨 대화를 나누면서 죽음을 준비하고 현재를 살아갈 힘을 얻고 있을지 함께 읽어보고 이야기 나누어 보면 좋겠습니다.</p>
<p> </p>
<p>댓들로 메모 올려주시고 목요일에 뵙겠습니다.</p>
<p> </p>
<p> </p>
<p> </p>
<p> </p>
<p> </p>]]></description>
			<author><![CDATA[인디언]]></author>
			<pubDate>Mon, 12 Oct 2026 22:53:20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naidum.org/?kboard_redirect=27"><![CDATA[단기세미나]]></category>
		</item>
				<item>
			<title><![CDATA[[나이듦대중지성_시즌3] &lt;이반 일리치의 죽음&gt; 공지]]></title>
			<link><![CDATA[https://naidum.org/?kboard_content_redirect=713]]></link>
			<description><![CDATA[<p class="p1">여러분, 연휴 잘 보내셨는지요?</p>
<p class="p1">이번 책은 유난히 짧아서 다들 가뿐하게 읽어내셨으리라 생각됩니다.</p>
<p class="p1">물론 주제는 가볍지 않았지만요.</p>
<p class="p1">&lt;이반 일리치의 죽음&gt;(1886)은 톨스토이가 58세때 출간되었습니다.</p>
<p class="p1">톨스토이는 1870년대 후반부터 심각한 정신적·실존적 위기를 겪었습니다. 전쟁과 평화》와 《안나 카레니나》를 쓴 작가로서 명성과 성공을 누렸지만, 그런 성공이 삶의 의미를 보장해 주지는 않는다고 느꼈다는데요. 결국 자신은 왜 살아야 하는가, 죽음이 모든 것을 끝낸다면 삶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라는 질문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리고 한 법조인의 죽음 소식을 접한 것이 이 소설 집필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하네요.</p>
<p> </p>
<p class="p1">덧붙여서,</p>
<p class="p1">‘죽음’이라는 주제에 대해 생각해 보기 위해 함께 읽어볼 글도 추천드립니다.</p>
<p class="p1">요요샘이 죽음을 주제로 쓰신 두개의 리뷰인데요.</p>
<p class="p1">바로 톨스토이의 &lt;이반 일리치의 죽음&gt;과, 장 켈레비치의 &lt;죽음에 대하여&gt;입니다.</p>
<p class="p1">이 리뷰를 읽고 오시면 세미나에서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더 많아질 것 같아요.</p>
<p> </p>
<p class="p1">1)이반일리치의 죽음</p>
<p class="p1"><a href="https://naidum.org/post/57902">https://naidum.org/post/57902</a></p>
<p class="p1">2)죽음에 대하여(장 켈레비치)</p>
<p class="p1"><a href="https://naidum.org/post/57869">https://naidum.org/post/57869</a></p>
<p> </p>
<p class="p1">이반 일리치의 삶과 죽음을 통해 여러분은 어떤 사유를 하셨는지 궁금합니다.</p>
<p class="p3">메모는 월요일밤<span class="s1"> 9</span>시까지 올려주세요<span class="s1">~</span></p>]]></description>
			<author><![CDATA[서해]]></author>
			<pubDate>Sun, 11 Oct 2026 19:37:22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naidum.org/?kboard_redirect=10"><![CDATA[나이듦대중지성]]></category>
		</item>
				<item>
			<title><![CDATA[&lt;생물과 무생물사이&gt;2회차 후기]]></title>
			<link><![CDATA[https://naidum.org/?kboard_content_redirect=712]]></link>
			<description><![CDATA[<p>생물과 무생물 사이2, 후기</p>
<p>이야기꾼 분자생물학 전공자 후쿠오카 신이치, 지하통로로 연결된 오래된 뉴욕 맨해튼 록펠러대학 도서관 건물 이야기에서 시작하여 뉴욕에서만 느낄 수 있다는 깊은 땅속에서 울리는’진공’까지, 무심한 듯 감수성 예민한 작가의 설명, 다소 어려운 유전자에 대한 ‘공부’를 했다. 생명은 자기복제와 동적평형의 흐름이라는 증명, 멈춰있지 않고 흐르고(교체), 고정된 듯 보이나 결코 고정되지 않은 생명의 특성, 가장 작은 세포의 역할까지 ‘함께’ 가 아니라면 접하지 못했을 책이었다. 후기를 맡았으나 이야기 듣느라 기록에 놓친 부분도 있다.</p>
<p> </p>
<p>’생명은 동적평형 상태의 흐름‘을 발제한 기린샘은 ’동적평형‘이 논어에서의 균형감각을 떠올리게 한다고 했다. ’맞물림, 헐거운, 붙었다 떨어졌다‘하는 엄청난 생명력을 상보성으로 설명했고, 삶의 현상기술과 생명기술이 다르지 않음을 확인하는 시간이었다고 했다.</p>
<p>엄지님은 ①생명은 유연한 상보성을 통해 유지되는 동적평형상태이며, ②생물내부는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의 흐름이 있고, 그에 따른 일방행진을 하며, ③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자연의 흐름을 있는 그대로 기술하는 것이다 , 정리를 하고, 책의 서술 자체가 지은이의 삶의 태도와 방식을 보여준다고 했다. 동적평형은 압도적인 숫자의 상보성으로 가능한 것인데, 엄청난 기술 발전 속도와  인간의 접촉이 줄어드는(피하는, 프라이버시 강조)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우려도 표현했다.</p>
<p>하현님은 동적평형은, 생명이란 고정된 구조가 아니라는 점을 주시하고 고정되지 않고 ’흐름‘ 과 ’흔들리는‘ 삶에 대한 생각을 &lt;남성판타지&gt;내용과 비교하며 가치관이 고정되어있는 ’남성성‘의 한계에 대한 것을 설명했다.</p>
<p>이해되지 않는 세계, 미지세계(영역)을 실험으로 증명해내는 일은 흥미로운 일이라며 실증이 제시되는 책에 대한 소감을 전한 자갈님은 실제 미시세계는 멈추지 않고 흐르고 있는데(과학적 증명), 거시적 삶은 흐름을 회복시키려는 저항이 있다고, AI발달로 사람사이 접촉이 사라지는 것을 염려하는 것에 대해 오히려 더 다양한 새로운 접촉(반려동물, 세분화된 AI..)가능성을 이야기하며 인간과 AI가 공존하는 접점에 대한 긍정적인 생각을 보여주었다.</p>
<p>니은님은 생명의 가변성과 유연성에 대하여 치열한 한판을 벌이면서도, 다시 읽은 이번 ’이과‘책이 사고의 영역을 넓혀준 것을 인정하며 같은 책을 2번, 3번 읽어내는 힘을 강조하였다.</p>
<p>(*돌보던 손녀가 갑자기 아프게 되어 놀란 가슴을 쓸어내고 출석한 소요유님께는 토닥토닥..)</p>
<p>앙코르석공님은 이 책을 ①생물과 무생물 사이존재인 바이러스와 ②동적평형을 왜 생물과 무생물사이에 놓았을까로 생각해 봤다고 했다. 고분자 하나하나는 각각 무생물이지만 합치면 생물이며, 하나의 유전자는 다기능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하나의 기능에 다유전자가 관여하는 생명 특성을 설명했다.</p>
<p>죽음이 어떻게 진행되는지-사전기(임종기,순환계와 중추신경 정지)-&gt;임상죽음(심장박동정지)-&gt;장기 움직임은 남아있는 죽음(피부발한 등)-&gt;세포죽음(분해단계)로 호스피스 교육내용을 풀어주신 서해님. 호흡이 멈추고 혈액순환이 멈춘 상태에서 몸이 죽음을 향해가는 시간이 ’동적흐름‘안에서 작동되는 것을 설명했다. 또한 ’매커니즘‘ 무용 공연을 소개하며 기울어진 시소(에 누워있던 배우)가 반대편 물통이 채워지며 평형을 이루던 순간, 모두에게 각자의 균형점이 있음을 보여주고, 이 책에서 또한 ’흐름‘(변하는)속에서의 균형을 발견할 수 있었다고 했다.</p>
<p> </p>
<p>나이듦세미나 첫 시간에 ’흔들‘리는 삶에 대한 것을 나눴던 기억이 났다. 흔들리는 삶은 생명의 ’흐름‘과 맞닿아 있는 것 같다. 고정되지 않고 살피고 회복시키는 생명의 힘, 오늘도 살아냈다.</p>
<p> </p>]]></description>
			<author><![CDATA[마리]]></author>
			<pubDate>Thu, 08 Oct 2026 00:31:41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naidum.org/?kboard_redirect=10"><![CDATA[나이듦대중지성]]></category>
		</item>
				<item>
			<title><![CDATA[[박완서 19회 공지- 그 산이...]- 박완서는 왜 자꾸 같은 이야기를 썼을까?]]></title>
			<link><![CDATA[https://naidum.org/?kboard_content_redirect=711]]></link>
			<description><![CDATA[<p><span style="font-size:14px;color:#800080;">공지를 조금 일찍 올립니다.(써야 할 게 나래비並び 서 있어서리...^^)</span><br />
<span style="font-size:14px;color:#800080;">하지만 이것은 꼭 &lt;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gt;에 대한 공지는 아닙니다.</span></p>
<p> </p>
<p><span style="font-size:14px;color:#800080;">제가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서 엄마의 노년이 새삼 너무 가슴 아파서, 엄마와 엄마 세대 (30년대생)의 삶에 대해서 애도의 글을 한 편 써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span><br />
<span style="font-size:14px;color:#800080;">그때 제가 떠올린 레퍼런스는 보부아르의 &lt;아주 편안한 죽음&gt;, 비비언 고닉의 &lt;사나운 애착&gt;, 아니 에르노의 &lt;한 여자&gt; 같은 책들이었고요.</span></p>
<p> </p>
<p><span style="font-size:14px;color:#800080;">그런데 박완서를 읽으면서, 특히 &lt;엄마의 말뚝&gt; 연작과 &lt; 많던 싱아..&gt;, &lt;그 산이..&gt; 등을 읽으면서 좀 새로운 느낌이 들었어요. </span><br />
<span style="font-size:14px;color:#800080;">이렇게 엄마의 이야기를, 혹은 엄마와 나의 이야기를 써볼 수는 없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지요.</span></p>
<p> </p>
<p><span style="font-size:14px;color:#800080;">그러면서 박완서의 새로운 점, 내가 느끼는 흥미로움은 어디서 오는 걸까? 방법론일까? 문체일까? (두 개가 별개가 아닐 수도)</span><br />
<span style="font-size:14px;color:#800080;">그걸 생각해보다가 우선 박완서에게 눈에 띄는 점이 전쟁 경험의 반복이라는 데에 생각이 미치고 자료를 정리하기 시작했어요.</span></p>
<p> </p>
<p><span style="font-size:14px;color:#800080;">이 작업은 불과 3주전에 시작한 거에요.</span><br />
<span style="font-size:14px;color:#800080;">자료 정리를 통해 방법론을 정리하고 그 다음 제 글의 개요를 짜야겠다고 생각한거죠.</span></p>
<p> </p>
<p><span style="font-size:14px;color:#800080;">그런데...안타깝게도 올 12월 나이듦연구소 포럼에서 발표하려고 한 계획은 미룰 수 밖에 없게 되었어요.</span><br />
<span style="font-size:14px;color:#800080;">그 전에 빨리 털어야 할 원고가 있어서요. ㅠㅠㅠ</span></p>
<p> </p>
<p><span style="font-size:14px;color:#800080;">그래서 그 산이 공지를 하는 김에</span><br />
<span style="font-size:14px;color:#800080;">지금까지 자료정리 한 것을 여러분하고 공유해야겠다고 생각한 거죠.</span></p>
<p> </p>
<p><span style="font-size:14px;color:#800080;">그런데 제주도여서...제 옆에 책들이 쫙...있어야 하는데...없어서 제주도 도서관을 다 뒤졌답니다. ㅋㅋㅋ</span><br />
<span style="font-size:14px;color:#800080;">아무튼... 공지를 빙자한, 어마무지 시간이 많이 걸린, 정리 자료와 질문들(?) 올려봅니다.</span></p>
<p> </p>
<p>==================================================================================</p>
<p> </p>
<p><span style="font-size:20px;color:#ff00ff;"><strong>1. 박완서 씨는 몇 살 때부터 그렇게 잘썼나? 처음부터?</strong></span></p>
<p> </p>
<p><img class="aligncenter" src="https://naidum.org/wp-content/uploads/kboard_attached/25/202610/6ac4918bc97719608995.jpg" alt="" /></p>
<p> </p>
<p>이번 ‘그 산’의 해설을 쓴 김병익 선생은 두 개의 질문을 던집니다. 하나는 “박완서라는 작가는 어떻게 어린 시절부터 인간의 허위와 세상의 이중성을 알아챘을까”이고, 또 하나는 “‘문청시절’...습작의 시절도 가질 수 없었던 그가 어떻게 돌연히 &lt;나목&gt;에서 시작하여 왕성한 창작의 성과를 올릴 수 있었던 것일까?”입니다.</p>
<p> </p>
<p>지난번 ‘싱아’ 공지에서 파랑샘은 “박완서의 자전적 글쓰기는 기억을 복원하는 방식부터가 매우 독특”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 [미망] 완결 이후 3년 만에, 환갑의 나이에 이르러 자신의 원체험이자 삶의 출발점으로 돌아간 것은 어떤 의미였을까요”라는 질문을 던집니다.</p>
<p> </p>
<p>미망 후기에서 이쿠바 샘은 또 이렇게 쓰셨죠.</p>
<p> </p>
<p>“박완서 작가님의 소설을 읽으며 계속 느끼고 있지만, 어느 시대든 어느 공간이든 한 인간을 이렇게 다면체로 볼 수가 있는건지, 너무나 감탄합니다....인간을 보는 관찰력? 안목?이라는 건 타고나는 걸까요? 인생을 겪어내면서 성장하는 걸까요?”</p>
<p> </p>
<p>김병익 선생이나 파랑샘이나 나아가 이쿠바 샘을 비롯한 우리들 모두는 같은 질문을 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p>
<p> </p>
<p> </p>
<p>-박완서는 왜 쓰게 되었나?</p>
<p>-박완서는 왜 그렇게 늦게 등단했는가?</p>
<p>-박완서는 어떻게 쓰나?</p>
<p>-박완서에게 어머니, 오빠, 전쟁의 경험은 글쓰기와 관련하여 무엇이었나?</p>
<p>-박완서는 왜 중산층 허위의식에 주목하는가?</p>
<p>-박완서는 왜 60이 넘어 다시 나목의 시절로 돌아갔는가?</p>
<p>-박완서에게 글쓰기는 무엇인가?</p>
<p>-박완서는 왜 그렇게 잘 쓰나?</p>
<p> </p>
<p>결국 이 모든 것은 한 곳으로 모입니다.</p>
<p> </p>
<p>박완서를 읽을 때마다 우리가 느끼는 박완서 글쓰기의 그 놀라움을 <b>어떻게 설명하고 위치 지울 것인가</b><b>? </b><b>그의 작품을 어떻게 다시 언어화 </b><b>(</b><b>비평</b><b>) </b><b>할 수 있을까</b><b>? </b></p>
<p> </p>
<p> </p>
<p><span style="font-size:20px;color:#ff00ff;"><strong>2. 전쟁과 작품 (연표작업 중)</strong></span></p>
<p> </p>
<p>어떤 경험은 절대 잊혀지지 않는 것일까요? 아니면 어떤 기쁨도 슬픔도 시간이 가면 빛이 바랠 수 밖에 없나요? 저는 비교적 후자 쪽이었습니다. 과거의 상처를 두고두고 곱씹는 주변 사람들에겐 쓴소리도 마다하지 않았었죠. 그래서 제 여동생은 저를 미워한답니다.^^</p>
<p> </p>
<p>그래서 박완서가 계속 전쟁 이야기, 그러니까 ‘벌레’였던 경험과 오빠의 죽음, 그것으로 인한 어머니의 참척의 고통을 반복해서 쓰고 있는 것에 대해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거죠.  박완서는 왜 계속 반복해서 전쟁 이야기를 쓰고 있는 걸까요?</p>
<p> </p>
<p>몇가지 가능한 답이 있을 것 같습니다.</p>
<p> </p>
<p><span style="color:#0000ff;"><strong>-깊은 트라우마여서? (치유의 글쓰기!)</strong></span></p>
<p><span style="color:#0000ff;"><strong>-망각에 저항하고 싶어서?( 증언의 글쓰기!)</strong></span></p>
<p><span style="color:#0000ff;"><strong>-자기 삶 속에서 그것의 의미가 매번 다시 해석되기 때문? (자기 해석의 글쓰기!)</strong></span></p>
<p><span style="color:#0000ff;"><strong>-</strong></span></p>
<p><span style="color:#0000ff;"><strong>-</strong></span></p>
<p> </p>
<p>어쩌면 이것은 각각 다른 범주일 수도 있고, 연결되는 것일 수도 있고, 매번 다른 각각의 것이 더 도드라지는 것일 수도 있을 겁니다.</p>
<p> </p>
<p>그래서 저는 박완서 글쓰기의 전쟁 반복 문제를 생각하기 위해 우선 박완서 작품 중에서 전쟁을 다룬 것들을  시대적 맥락 속에서 다시 정리해봤습니다. (물론 제가 읽은 것만 가지고요)</p>
<p> </p>
<p> </p>
<p><span style="color:#800080;font-size:17px;"><b><i>A &gt;박정희 </i></b><b><i>~ </i></b><b><i>전두환 시대 </i></b><b><i>(</i></b><b><i>빨갱이 컴플렉스와 자기검열</i></b><b><i>)</i></b></span></p>
<p> </p>
<p><strong>1) 1970</strong> (40세) <strong><span style="font-family:georgia, palatino;">나목</span></strong></p>
<p>우리가 읽은 것은 스토리 생략합니다</p>
<p> </p>
<p><strong>2) 1971</strong> (41세) 한발기 → 1978 (48세) <strong>목마른 계절</strong></p>
<p> </p>
<p><strong>3) 1980</strong> (50세) <strong>엄마의 말뚝1 (단편)</strong></p>
<p><span style="font-size:15px;">박적골에서 서울로 옮겨 온 유년과 어머니가 서울 문안에 말뚝을 받으려고 애쓰는 과정 (‘그 많던 싱아’ 앞부분과 거의 같은 내용)</span></p>
<p> </p>
<p><strong>4) 1981</strong> (51세) <strong>엄마의 말뚝2 (단편)</strong></p>
<p><span style="font-size:15px;">중산층 전업주부가 된 ‘나’... 어머니의 낙상과 섬망. 그러나 그것은 6.25때 죽은 오빠에 대한 기억 혹은 트라우마. (전쟁 부분이 ‘그 산..’ 과 겹침)</span></p>
<p> </p>
<p><span style="font-size:15px;color:#ff0000;">*한국전쟁을 다룬 우리 소설의 백미라는 평가와 함께 이상문학상 수상</span></p>
<p> </p>
<p><strong>5) 1983</strong> (53세) <strong>그해 겨울은 따뜻했네</strong></p>
<p> </p>
<p><span style="font-size:17px;"><strong><span style="color:#800080;"><i>B&gt; 소위 </i><i>87</i><i>체제 이후 </i><i>(</i><i>민주화와 소비사회</i><i>, </i><i>소</i></span><span style="color:#800080;"><i>위 </i><i>‘</i><i>개취</i><i>’ </i><i>등장</i><i>)</i></span></strong></span></p>
<p> </p>
<p><span style="color:#ff0000;"><strong>1988 (58세) 5월 남편, 8월 아들 사망</strong></span></p>
<p> </p>
<p><strong>6)</strong> <strong>1989</strong> (59세) <strong>복원되지 못한 것들을 위하여(단편, &lt;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gt;)</strong></p>
<p><span style="font-size:15px;">나는 어느 문예지 수기모집에서 심사. 최우수작으로 &lt;복원&gt;을 뽑았지만 막상 수상자가 “상을 안 받겠다”고 선언. 이후 당사자를 찾아감. 그 과정에서 &lt;복원&gt;에서 다룬 선거부정의 당사자가 1987 이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공화당 후보의 핵심참모라는 것을 알고 서둘러 ‘고발장’을 회수했다는 것을 알게 됨. 이야기는 역시 민주화 이후 납북문인의 복권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가면서.. 자신의 스승이었던 송석묵 선생 이야기가 이어짐 (송석묵은 숙명여고보 때 스승인 박노갑)</span></p>
<p><span style="font-size:15px;">*나무위키 박노갑 :<a href="https://namu.wiki/w/%EB%B0%95%EB%85%B8%EA%B0%91?uuid=3dc0f18e-8370-4874-b325-57eff6878f97">https://namu.wiki/w/%EB%B0%95%EB%85%B8%EA%B0%91?uuid=3dc0f18e-8370-4874-b325-57eff6878f97</a></span></p>
<p> </p>
<p><strong>7) 1991</strong> (61세) <strong>엄마의 말뚝3 (단편)</strong></p>
<p><span style="font-size:15px;">수술 후 7년을 투병하던 엄마의 죽음과 장례 과정</span></p>
<p> </p>
<p><strong>8)</strong> <strong>1992</strong> (62세) <strong>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strong></p>
<p> </p>
<p><span style="font-size:15px;">*김윤식- “만일 이 작가의 전 작품을 골똘히 읽어 온 독자라면 &lt;그 많던 싱아…&gt;라는, 전대미문의 '기억력에만' '순전히' 의존한 이 작품은 이 작가가 조심스럽게 써 온 &lt;엄마의 말뚝&gt; (4)임을 알아차릴 수 있겠지요. 말뚝(1)이 박적골에서 서울로 와 바느질품팔이로 현저동에 머문 기숙己宿 여사의 몸부림이라면, 말뚝(2)가 그다음의 이야기고, 말뚝(3)은 기숙 여사의 죽음을 다룬 것 아닙니까.” (&lt;그 많던 싱아&gt; 해설, “기억과 묘사”)</span></p>
<p> </p>
<p><img class="aligncenter" src="https://naidum.org/wp-content/uploads/kboard_attached/25/202610/6ac492a40f4561322552.jpg" alt="" width="692" height="519" /></p>
<p> </p>
<p> </p>
<p><strong>9)</strong> <strong>1995</strong> (65세) <strong>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strong></p>
<p> </p>
<p><strong>10)</strong> <strong>2002</strong> (72세) <strong>놓여나기 위해, 가벼워지기 위해 (칼럼)</strong></p>
<p> </p>
<p><strong>11) 2009</strong> (79세) <strong>빨갱이 바이러스 (단편, &lt;그리움을 위하여&gt;)</strong></p>
<p><span style="font-size:15px;">나는 우연히 세 여자를 재워주게 됨. 익명성이 보장된 그 밤에 여자들은 각자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비밀( 의처증 남편 때문에 뛰어내려 다리를 절게 되었으나 그 때문에 자유를 얻어 외도를 즐김, 남편이 담뱃불로 지진 것. 이유는 장애아를 갖다 버린 트라우마, 손주의 과외선생과 바람 피는 사이 손주가 죽게 됨 등)을 털어놓음. 하지만 ‘나’는 끝내 자신의 비밀을 말하지 않는다. ‘나’에게는 한국전쟁 당시 ‘빨갱이’였던 삼촌과 아버지, 그리고 집 마당에 얽힌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못한 기억이 있음.</span></p>
<p> </p>
<p><strong>12) 2010</strong> (80세) <strong>석양을 등에 지고 그림자를 밟다 (마지막 단편, 2010.2, 월간 &lt;현대문학&gt;)</strong></p>
<p><span style="font-size:15px;">마지막 자전 소설</span></p>
<p> </p>
<p><strong>13)</strong> <strong>2010</strong> (80세)<strong> 에세이,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마지막 에세이집, &lt;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gt; 2010.08)</strong></p>
<p> </p>
<p><span style="color:#ff0000;"><strong>2011. 1.22. 담낭암으로 투병하다 사망</strong></span></p>
<p> </p>
<p> </p>
<p>지금까지 정리한 것을 표로 만들면 (AI한테 시켰어요)</p>
<p> </p>
<p><img src="https://naidum.org/wp-content/uploads/kboard_attached/25/202610/6ac49aa732a639793686.png" alt="" /></p>
<p> </p>
<p> </p>
<p> </p>
<p><span style="font-size:20px;color:#ff00ff;"><strong>3. 박완서에게 전쟁이란?- 육성</strong></span></p>
<p> </p>
<p>자, 그럼 이번에는 박완서의 육성을 직접 들어볼게요. 박완서는 소설과 에세이, 칼럼 등에서 사람들로부터 “우려먹는다”는 이야기를 들을 정도로 같은 이야기 (전쟁경험)를 반복해서 쓰는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역시 작품 시대 순으로 정리해볼게요.</p>
<p> </p>
<p> </p>
<p><b>1) 1981 (51</b><b>세</b><b>) / </b><b>엄마의 말뚝</b><b>2</b><b>와 이상문학상 수상소감</b> (제가 원문 확인을 아직 못했습니다. 인터넷 검색으로 찾은 내용입니다.)</p>
<p> </p>
<p><img class="aligncenter" src="https://naidum.org/wp-content/uploads/kboard_attached/25/202610/6ac49220865472223283.jfif" alt="" /></p>
<p> </p>
<p>"부끄러울 따름이다.</p>
<p>이번에 상 받게 된 이야기는 내가 여태껏 여러 번 써왔던 이야기다. 그만큼 우려냈는데 무슨 맛이 남아 있을까마는 <span style="color:#ff6600;">어머니의 고통을 되씹지 않을 수 없는 내 마음속의 매듭</span> 때문에 슬픈 마음이 앞선다. 다시 쓸 때마다 이것이 마지막이라고 거의 안간힘쓰듯이 별렀었다. 상까지 받았으니 정말 마지막이 되었으면 싶다. 이런 이야기로부터 가까스로 벗어났다 싶어 훨훨 자유로웠던 것은 번번이 일시적인 환상일 뿐 이내 그 이야기에 발목을 단단히 잡힌 채인 자신을 발견하는 게 여태껏의 내 이야기의 한계였다."(수상소감) <a href="https://blog.naver.com/allin69_/90165521666"><u>https://blog.naver.com/allin69_/90165521666</u></a></p>
<p> </p>
<p>“이 상 역시 제 마음자리 가장 깊은 곳에 소중하게 간직했다가 소설 쓰는 일에 바치는 수고에 지쳤을 때, 그 일이 허망하고 허망해서 망막해졌을 때 꺼내 볼 겁니다. 그때 그것은 한가닥 빛으로든, 모진 채찍으로든, 저에게 큰 용기가 되어줄 겁니다.” (수상소감)  <a href="https://www.khan.co.kr/article/202406131811001?utm_source=chatgpt.com"><u>https://www.khan.co.kr/article/202406131811001?utm_source=chatgpt.com</u></a></p>
<p> </p>
<p>“우리나라의 분단은 이제 하나의 기정사실입니다. 분단은 오래 전에 피를 흘리기를 멈추고 굳은 딱지가 되었고 통일을 꿈꾸지 않은 지도 오래된 것처럼 보입니다. 통일이란 말이 도처에 범람하고 있습니다만 분단의 고통을 겪은 자의 애절한 꿈으로서가 아니라 한낱 구호로서 행세하고 있을 뿐입니다. 어떤 이들은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구호를 만들어 내어 분단을 치장하면 된다고 생각하지만 진실로 통일이 꿈인 사람은 끊임없이 분단된 상처를 쥐어뜯어 괴롭게 피 흘릴 수밖에 없습니다.</p>
<p>토막 난 채 아물어 버리면 다시는 이을 수 없게 되리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문학이 구호에 봉사하느냐, 이런 숨겨진 처절한 아픔 편에 서느냐, 기로에 서 있다고까지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span style="color:#ff6600;">우리의 이웃이 부당하게 겪는 아픔과 슬픔, 몸부림, 그러면서도 결코 단념할 줄 모르는 그들의 꿈, 그런 것들과 무관하지 않기 위해선 끊임없이 정신을 쥐어뜯어야 할 만큼, 우리를 일률적으로 행복하고 편안하게 해주는 구호의 최면술은 날로 막강</span>해지고 있습니다. ”</p>
<p>(&lt;엄마의 말뚝 2&gt;에 관한 작가의 말로 인터넷에서 검색되나 수상소감인지, 이후 엄마의 말뚝2에 덧붙인 말인지 원출전은 아직 확인 못함)</p>
<p> </p>
<p><b>2) 1983 (53</b><b>세</b><b>) / </b><b>그해 겨울은 따뜻했네</b></p>
<p> </p>
<p><em><strong>작가의 말</strong></em></p>
<p>"이 이야기는 전쟁중 피난의 혼잡 속에서 일곱 살짜리 언니가 동생의 손목을 슬쩍 놓아 버림으로써 헤어지게 된 후 자매이야기이다...내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span style="color:#ff6600;">모르는 척의 교묘함，그 자기기만</span>에 대해서이다. <span style="color:#ff6600;">모르는 척이야말로 우리 시대 중산층 이상의 안이하고 우아한 생활이 보편적으로 향유하고 있는 악</span>이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p>
<p><a href="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75543">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75543</a></p>
<p> </p>
<p><b>3) 1989 (59</b><b>세</b><b>) / </b><b>복원되지 못한 것들을 위하여 </b><b>(&lt;</b><b>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b><b>&gt; </b><b>문학동네 박완서 단편소설 전집 </b><b>5)</b></p>
<p> </p>
<p><em><strong>소설 본문 중에서</strong></em></p>
<p>“참 세상 좋아졌죠? 예전 같으면 감히 그런 걸 폭로할 엄두를 어떻게 냈겠어요?”</p>
<p>“특출한 기술방법”..“깨진 그룻의 파편을 주워모아 원형을 재현하듯이 우직하고 꼼꼼하게”</p>
<p>“<span style="color:#ff6600;">척결 척결 허지만서두 복원두 허들 않고 척결부터 허겠단 소릴 누가 믿남</span>.”</p>
<p> </p>
<p><b>4) 1992 (62</b><b>세</b><b>) / </b><b>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b><b>(</b><b>세계사판 </b><b>19)</b></p>
<p> </p>
<p><em><strong>작가의 말</strong></em></p>
<p>“이런 글을 소설이라고 불러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 순전히 기억력에만 의지해서 써보았다.</p>
<p>쓰다보니까 소설이나 수필 속에서 한두 번씩 우려먹지 않은 경험이 거의 없었다..그러나..소설적 윤색을 거치지 않은 경험..이번에는...기억을 꾸미거나 다듬은 짓을 최대한으로 억제한 글쓰기를 해보았다...그러나 기억의 더미로부터 취사선택이 불가피..상상력으로 연결고리를 만들어주지 않으면 안 되었다.</p>
<p>더 큰 문제는 기억의 불확실성... 기억이라는 것도 결국은 각자의 상상력일 따름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화가가 자화상 한두 장쯤 그려보고 싶은 심정 정도로 썼다...</p>
<p>뼛속의 진가지 다 빼주다시피 힘들게 쓴 데 대해서는 아쉬운 것 투성이지만 40년대에서 50년대로 들어서기까지의 사회상, 풍속, 인심 등은 이미 자료로서 정형화된 것보다 <span style="color:#ff6600;">자상하고 진실된 인간적인 증언을 하고자 내 나름으로는 최선</span>을 다했다.” (작가의 말)</p>
<p> </p>
<p><em><strong>소설 본문 중에서</strong></em></p>
<p>“나는 <span style="color:#ff6600;">밤마다 벌레가 됐던 시간들을 내 기억 속에서 지우려고 고개를 미친 듯이 흔들며 몸부림쳤다</span>. 그러다가도 문득 그들이 나를 벌레로 기억하는데 나만 기억상실증에 걸린다면 그야말로 정말 벌레가 되는 일이 아닐까 하는 공포감 때문에 <span style="color:#ff6600;">어떡하든지 망각을 물리쳐야 한다는 정신</span>이 들곤 했다.”(268)</p>
<p> </p>
<p><em><strong>김윤식 해설, “기억과 묘사” (초판본, &lt;내가 읽은 박완서&gt;(김윤식))</strong></em></p>
<p>“...이러한 순종의 혈통이 80년대 중반에 이르면 여지없이 흔들렸고...잇달아 소설 아닌 이야기 범주 (삼국지류 또는 역사와 관련된 황당무계한 이야기 계보)의 맹렬한 분출과 아울러, sf스런 것이라든가 포스트 모던스런 베끼기, 장르 해체론의 것들이 기승을 부리는 90년대가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참담해라, 90년대여, 라는 말이 입속에서 튀어나오는 분도 있겠지요...여기까지 물어본 사람이라면, 작가 박완서가 어째서 이 시대의 거인인가를 조금은 알아차릴 수 있지 않을까....</p>
<p>기억의 도움으로 가능한 회고형식이야말로 진짜 순종 소설의 혈통이라는 사실... 왜냐하면 기억만이 묘사를 가능케 하기 때문입니다. 박완서야말로 이 점에서 순종이며, 이를 위협하는 온갖 포스트모던 상황에 맞선다는 의미에서 거인이지요”</p>
<p> </p>
<p><em><strong>스티븐 앱스타인 해설</strong></em></p>
<p>“1992년 당시, 경제번영과 이제 막 민주화된 정치체제...성인 독자들이 그런 격동의 시기를 얼마나 멀게 느끼고 있는지를 예리하게 간파...그녀는 교훈주의를 삼가며 꼭 필요한 정보를 독자들에게 들려주고 있다” (세계사판, 295)</p>
<p> </p>
<p><b>5) 1995 (65</b><b>세</b><b>) / </b><b>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b></p>
<p> </p>
<p><em><strong>작가의 말</strong></em></p>
<p>"‘우리가 그렇게 살았다우...</p>
<p>그 예쁜 동산을 어쩌면 그렇게 감쪽같이 잊어버릴 수가 있을까? 아니면 일부러 시침을 떼는 걸까. 그 동산이 없어져서 잘된 사람도 없지만 아쉬운 사람도 없는데 웬 걱정이냐는 투다. <span style="color:#ff6600;">불도저의 힘보다 망각의 힘이 더 무섭다. 그렇게 세상은 변해 간다</span>. 나도 요샌 거기 정말 그런 동산이 있었을까, 내 기억을 믿을 수 없어질 때가 있다. 그 산이 사라진 지 불과 반년밖에 안 됐는데 말이다.</p>
<p>’우리가 그렇게 살았다우’</p>
<p>이 태평성세를 향하여 안타깝게 환기시키려다가도 <span style="color:#ff6600;">변화의 속도가 하도 눈부시고 망각의 힘은 막강하여, 정말로 그런 모진 세월이 있었을까, 문득문득 내 기억력이 의심</span>스러워지면서, 이런 일의 부질없음에 마음이 저려오곤 했던 것도 쓰는 동안에 힘들었던 일 중의 하나다" (작가의 말)</p>
<p> </p>
<p><b>6) 2002 (72셰) </b><b>칼럼 </b><b>/ “</b><b>놓여나기 위해</b><b>, </b><b>가벼워지기 위해</b><b>”</b></p>
<p> </p>
<p>“아직도 내 기억은 6.25동란에 못 박혀 있다. 못이 녹슬고 썩고 삭아서 흙이 되고도 남을 세월이 지났건만 못 자국의 통증은 자주 도진다.</p>
<p><span style="color:#ff6600;">6.25는 내 기억의 원점이다. 나는 지금도 그때의 고통이 도져서 혼자 신음하며 울 적이 있다</span>. 4.19 때 온몸이 폭발할 것처럼 기뻤던 것도 거짓말을 한 대통령을 용서 못하는 마음 때문이었을 것이다....</p>
<p>마음 속에 나를 억압하는 찌꺼기가 없어져서 못쓰는 거라면 그 또한 얼마나 좋은 일인가. 결국은<span style="color:#ff6600;"> 가벼워지기 위해 썼다</span>는 게 가장 맞는 말이 될 것이다. (박완서, “놓여나기 위해, 가벼워지기 위해”, / 한국일보, 2002년 6월 6일 <a href="https://www.hankookilbo.com/news/article/200206060082603221">https://www.hankookilbo.com/news/article/200206060082603221</a> / &lt;두부&gt;에 재수록)</p>
<p> </p>
<p><b>7) 2009 (79</b><b>세</b><b>) / </b><b>빨갱이 바이러스 </b><b>(&lt;</b><b>그리움을 위하여</b><b>&gt; </b><b>문학동네 박완서 단편소설 전집 </b><b>7 )</b></p>
<p> </p>
<p><em><strong>소설 본문 중에서</strong></em></p>
<p>“<span style="color:#ff6600;">아무에게도 발설하지 못한 골육상잔의 기억은 돌파구를 찾지 못해 나하고 한 몸이 되었다. 내 몸은 툭하면 떨리고 아팠다.</span> 떨고 있는 내 몸을 보호하고 힘이 되어 줄 보호막이 필요했다. 그건 권력이었다.”</p>
<p>“나의 입과 우리 마당은 동일하다. 둘 다 폭력을 삼켰다. 폭력을 삼킨 몸은 목석같이 단단한 것 같지만 자주 아프다. …… 어떤 상처하고 만나도 하나가 될 수 없는 상처를 가진 내 몸이 나는 대책 없이 불쌍하다.”</p>
<p> </p>
<p><b>8) 2010 (80</b><b>세</b><b>) </b><b>석양을 등에 지고 그림자를 밟다 </b><b>(&lt;</b><b>그리움을 위하여</b><b>&gt; </b><b>문학동네 박완서 단편소설 전집 </b><b>7 )</b></p>
<p> </p>
<p><em><strong>소설 본문 중에서</strong></em></p>
<p>“막내까지 초등학교에 들어가고 잔 손 갈 일이 없어지자 비로소 이제부터라도 염두를 내야 할 것 같은 엄청난 욕구가 내 안에 있다는 걸 느꼈다. 그 걷잡을 수 없는 욕구는<span style="color:#ff6600;"> 증언의 욕구</span>였다. 6·25 때 오빠하고, 끝내 자기 자식을 두지 못해 나에게는 아버지와 다름없었던 삼촌이 비참하게 죽었다. 남들이 다 남쪽으로 피난가 있는 동안 남아 있던 우리 식구들은 강제로 찢기고 일부는 북으로 끌려가야 하는 고난을 겪었다. 그러는 과정에서 살아남기 위해 무슨 일인들 안 당했겠는가. <span style="color:#ff6600;"><span style="color:#000000;">인간 같지 않은 인간들로부터 온갖 수모를 겪을 때 그걸 견딜 수 있게 하는 힘은 언젠가는 저자들을 악인으로 등장시켜 마음껏 징벌하는</span> 소설을 쓰리라는 복수심이었다. <span style="color:#000000;">왜 하필 소설이었을까. 소설로 어떻게 복수를 할 수 있단 말인가.</span> 그래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그 시기를 견딜 수 있게 하는 힘이 되었고, 위로가 되었다.</span></p>
<p>세상도 나도 그때로부터 너무 멀리 와 있었다. 전쟁이 할퀴고 간 상처를 다독이고 가난을 딛고 살림을 일으키기 위해 사람들은 과거를 잊고 현실에만 충실했다. 6·25 때 얘기만 나오면 아이들까지도 궁상떨지 말라고 핀잔을 줄 정도로 잊고 싶은 과거가 된 지 오래였다. 잘살아보자는 구호가 동희 옥상에서 온 동네로 울려퍼지던 경제제일주의시대였다. 그런 시대의 흐름에 뒤처지지 않으려고 부지런히 중간쯤을 달려온 중산층적인 삶에 안주해 있던 나에게 느닷없이 엄습해온 그 엄청난 욕구는 신선한 충격이자 이물감이었다. 내가 누려온 안일이 하염없이 누추하게 여겨졌다. 사람이란 고통받을 때만 의지할 힘이나 위안이 필요한 게 아니라 안일에도 위안이 필요했던 것이다. 증언의 욕구가 이십 년 동안이나 뜸을 들였다가 결실을 맺게 된 것은 아마도 최초의 욕구가 증오와 복수심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증오와 복수심만으로는 글이 써지지 않는다. 우리 가족만 당한 것 같은 인명피해, 나만 만난 것 같은 인간 같지 않은 인간, 나만 겪은 것 같은 극빈의 고통이 실은 동족상잔의 보편적인 현상이었던 것이다. 훗날 나타난 통계숫자만 봐도 그렇다<span style="color:#ff6600;">. 우린 특별히 운이 나빴던 것도 좋았던 것도 아니다. 그 끔찍한 전쟁에서 평균치의 화를 입었을 뿐이다. 그런 생각이 복수나 고발을 위한 글쓰기의 욕망을 식혀주었다.</span></p>
<p>그러나<span style="color:#ff6600;"> 세월이 지나도 식지 않고 날로 깊어지는 건 사</span>랑이었다. 내 붙이의 죽음을 몇백만 명의 희생자 중의 하나, 곧 몇백만 분의 일로 만들어버리고 싶지 않았다. 그의 생명은 아무하고도 바꿔치기할 수 없는 그만의 고유한 우주였다는 게 보이고, 하나의 우주의 무의미한 소멸이 억울하고 통절했다. 그게 보인 게 사랑이 아니었을까.”</p>
<p> </p>
<p><b>9) 2010 (80</b><b>세</b><b>) / </b><b>에세이</b><b>, </b><b>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b><b>(2010 &lt;</b><b>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b><b>&gt;)</b></p>
<p> </p>
<p>“경인년이고 또 경인이기 때문에 내 생전에 또 전쟁을 겪게 될까 봐 두려운 것이다. 6·25가 난 해도 경인년이었으니 꽃다운 20세에 6·25전쟁을 겪고 어렵게 살아남아 그해가 회갑을 맞는 것까지 봤으니 내 나이가 새삼 징그럽다. <span style="color:#ff6600;">더 지겨운 건 육십 년이 지나도 여전히 아물 줄 모르고 도지는 내 안의 상처이다. 노구老軀지만 그 안의 상처는 아직도 청춘이다</span>.”</p>
<p>“<span style="color:#ff6600;">6·25의 경험이 없었으면 내가 소설가가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나도 느끼고 남들도 그렇게 알아줄 정도로 나는 전쟁 경험을 줄기차게 울궈먹었고 앞으로도 할 말이 얼마든지 더 남아 있는 것처럼 느끼곤 한다</span>. 지금도 문학강연 같은 걸 하게 될 때는 소설이 지닌 이런 미덕, 쓰는 이와 읽는 이가 함께 누릴 수 있는 <span style="color:#ff6600;">위안과 치유의 능력</span>에 대해 말하곤 한다. 나는 내가 소설을 통해 구원받았다는 걸 인정하고 소설가인 것에 자부심도 느끼고 있지만 그렇게 말하고 나면 마치 허세를 부린 것처럼 뒷맛이 허전해지곤 한다.</p>
<p>내가 가정적으로 안정되었을 뿐 아니라 우리 사회도 전반적으로 전후의 가난을 딛고 경제성장기에 접어들었을 때였다. 전쟁 때 죽은 이들도 전사자 얼마 얼마, 민간인 희생 얼마 하는 통계숫자로 일목요연하게 정리돼 있을 때였다. ‘잘살아보자’는 민족적 열망은 자식도 남편도 가슴에 묻기보다는 통계숫자 안에 안장을 시켰다. 나 혼자만 당한 일이 아니라는 게 위로가 될 수도 있다는 건 모르지 않으면서도 나는 바로 그 점이 더 괴로웠다. 내 피붙이가 나에게 특별한 것처럼 죽어간 내 피붙이는 각자 고유하고 특별한 자기만의 세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만의 세계는 아무도 함부로 할 수도, 바꿔치기할 수도 없는 그들만의 우주였다. 하나의 생명의 소멸은 그들에게 있어서는 우주의 소멸과 마찬가지이다. 어떻게 몇백만 분의 일이라는 숫자 안에 도매금으로 넘길 수 있단 말인가. 나는 내 피붙이만은 그 도매금에서 떼어 개별화시키고 싶었다. 몇백만 분의 일이라는 죽은 숫자에다 피를 통하게 하고 싶었다. <span style="color:#ff6600;">그들의 고통, 그들의 억울한 사정을 외치고 싶어서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span>”</p>
<p> </p>
<p><img class="aligncenter" src="https://naidum.org/wp-content/uploads/kboard_attached/25/202610/6ac492d8c04c09277690.jpg" alt="" width="695" height="521" /></p>
<p> </p>
<p> </p>
<p> </p>
<p><span style="font-size:20px;color:#ff00ff;"><strong>4. 왜 반복해서 말하는가? - 가늠</strong> </span>(여기부터는 자료에 대한 약간의 해석이 덧붙여집니다. 당근, 가설입니다)</p>
<p> </p>
<p><span style="color:#0000ff;font-size:17px;">첫 번째 질문 : 트라우마 때문일까요?</span></p>
<p> </p>
<p>네, 그런 것 같습니다.</p>
<p> </p>
<p>1981년(51세) 때는 그것이<span style="color:#ff6600;"> “어머니의 고통을 되씹지 않을 수 없는 내 마음속의 매듭”이라고</span> 말했고, 1992년(62세)의 소설 속에서 <span style="color:#ff6600;">“나는 밤마다 벌레가 됐던 시간들을 내 기억 속에서 지우려고 고개를 미친 듯이 흔들며 몸부림”</span> 칩니다. 70이 넘은 2002년 칼럼서도<span style="color:#ff6600;"> “6ㆍ25는 내 기억의 원점이다. 나는 지금도 그때의 고통이 도져서 혼자 신음”</span>한다고 말합니다. 심지어 죽기 일 년 전, 여든이 된 2010년에도 6.25는<span style="color:#ff6600;"> “육십 년이 지나도 여전히 아물 줄 모르고 도지는 내 안의 상처”</span>라고 말합니다.</p>
<p> </p>
<p>박완서에게 전쟁은 지나간 사건이 아니라 몸 안에서 계속 도지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니 반복의 한 원인은 분명 상처의 지속성에 있습니다. 하지만 잊을 수 없는 상처 혹은 고통스러운 기억 만으로 그것을 꼭 써야 했는지를 말할 수는 없습니다. 트라우마는 끊임없이 기억을 되살리기도 하지만, 반대로 그 기억을 떠올리거나 말하는 것을 회피하게 만들기도 하니까요.</p>
<p> </p>
<p><span style="color:#0000ff;font-size:17px;">두 번째 질문 : 그러면 박완서에게 전쟁을 쓰는 것은 치유의 과정이었을까요?</span></p>
<p> </p>
<p>아마 어느 정도는 그랬던 것 같습니다.</p>
<p> </p>
<p>2002년에는<span style="color:#ff6600;"> “놓여나기 위해, 가벼워지기 위해”</span> 쓴다고 했습니다. 80세의 회고 속에서 40세의 등단 이유(증언 욕망)를 <span style="color:#000000;">“인간 같지 않은 인간들..을 악인으로 등장시켜 마음껏 징벌하는 소설을 쓰리라는 복수심”이었다고 말합니다. 소설로 복수를 할 수 있을지 애매함에도 불구하</span>고 그런 생각만으로도<span style="color:#ff6600;"> “힘이 되었고, 위로가 되었다”</span>고 합니다. 역시 같은 해에 “소설이 지닌 이런 미덕, 쓰는 이와 읽는 이가 함께 누릴 수 있는 위안과 치유의 능력”에 대해서 말합니다.</p>
<p> </p>
<p>하지만 치유를 위해 쓰고, 치유가 되기도 했지만, 매번 치유는 완성되지 않습니다. 이상 문학상 수상소감에서 <span style="color:#ff6600;">“이런 이야기로부터 가까스로 벗어났다 싶어 훨훨 자유로웠던 것은 번번이 일시적인 환상일 뿐 이내 그 이야기에 발목을 단단히 잡힌 채인 자신을 발견”</span>하고, 80에 와서도<span style="color:#ff6600;"> “소설을 통해 구원받았다는 걸 인정하고 소설가인 것에 자부심도 느끼고 있지만 그렇게 말하고 나면 마치 허세를 부린 것처럼 뒷맛이 허전해지곤 한다.”</span>고 합니다.</p>
<p> </p>
<p>그렇다면 박완서가 계속 다시 쓰는 것은 상처를 없애는 일이라기보다, 상처를 안고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런데 이게 치유의 글쓰기인가요? (갑자기 치유가 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p>
<p> </p>
<p><span style="color:#0000ff;font-size:17px;">세 번째 질문 : 박완서에게 전쟁의 증언은 어떤 의미일까요?</span></p>
<p> </p>
<p>치유의 불가능성은 증언으로 이어지는걸까요? 그런데 박완서 육성을 분석하다 보면 그 증언은 어느덧 중산층의 안일함에 빠진 자기 자신(<span style="color:#ff6600;">“내가 누려온 안일이 하염없이 누추하게 여겨졌다</span>”, 2010)에 대한 ‘치유’의 측면(따라서 이때 치유는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잊혀가는 고통을 다시 현재화하는 역설적인 의미를 띱니다)과 소위 87체제 이후 모두가 '민주주의'를 구가하는 상태에서 다시 전쟁의 참혹성에 대한 ‘진실한’ 증언이라는 사회적 측면, 이 두 가지 방향으로 진행된다는 생각이 듭니다.</p>
<p> </p>
<p>우선 구원으로서의 증언 (자기치유)과 관련하여 1981 이상문학상 수상소감이 눈에 띕니다.</p>
<p>“우리의 이웃이 부당하게 겪는 아픔과 슬픔, 몸부림, 그러면서도 결코 단념할 줄 모르는 그들의 꿈, 그런 것들과 무관하지 않기 위해선 <span style="color:#ff6600;">끊임없이 정신을 쥐어뜯어야 할 만큼, 우리를 일률적으로 행복하고 편안하게 해주는 구호의 최면술은 날로 막강</span>해지고 있습니다. ”</p>
<p> </p>
<p>그리고 &lt;그해 겨울은 따뜻했네&gt;에서 작가가 말한 “모르는 척의 교묘함, 그 자기기만”도 눈에 띕니다. 작가는 <span style="color:#ff6600;">“모르는 척이야말로 우리 시대 중산층 이상의 안이하고 우아한 생활이 보편적으로 향유하고 있는 악”</span>이라고 보는 것이죠. 이쯤 되면 70년대의 중산층 핵가족의 허위의식을 까발리는 박완서의 소설이 전쟁 증언과 무관한 게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p>
<p>박완서는 전쟁 이야기하고, 그다음 중산층 이야기하고, 다시 전쟁 경험으로 돌아온 게 아니라 전쟁 경험을 매번 다시 쓰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어요.</p>
<p> </p>
<p>또한 주목해야 할 부분은 &lt;그 많던 싱아&gt;와 &lt;그 산이&gt; 등이 소위 “90년대 소설”이라는 겁니다. 미시정치가 논의되고, 성 정치학이 등장하고, 김건모가 “애인을 친구에게 뺏긴” ‘잘못된 만남“을 부르고, 운동권 집회에서 서태지가 불립니다. (저는 큰 아이를 출산하고 2년 만인가, 간만에 진보정당 수련회에 참석했는데, 거기에서 누군가가 서태지의 ‘난 알았어’를 개사한 노래를 서태지 춤을 추면서 부르는 것을 보고, 천지개벽, 경천동지를 느꼈어요.^^)</p>
<p>김윤식과 스티븐 앱스타인이 주목하는 것도 그런 시대적 맥락 속에서 박완서의 자기 쓰기, 전쟁 쓰기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입니다.</p>
<p> </p>
<p>그렇다면 박완서에게 증언이란 과거의 일을 단순히 재현하는 게 아니겠죠. 그에게 증언이란 현재의 물질적 풍요, 정신적 안일을 심문하는 일인 것 같습니다. 전쟁은, 아니 이웃의 고통은 나의 안락함을 뚫고 매번 현재화합니다.</p>
<p> </p>
<p><span style="color:#0000ff;font-size:17px;">네 번째 질문 – 전쟁을 다시 쓰는 것은 사랑이라는 말에 대하여</span></p>
<p> </p>
<p>하지만 제게 가장 뭉클하게 다가온 것은 여든의 박완서가 자신의 글쓰기를 돌아보며 한 말입니다. 그는 섣불리 용서나 화해, 완성된 치유를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노년의 박완서에게서 에드워드 사이드가 아도르노의 베토벤론을 빌려 말한 ‘말년성(lateness)’을 떠올리게 됩니다. 말년성이란 나이가 들면서 삶의 모순이 조화롭게 해소되고 마침내 원숙한 화해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끝내 화해되지 않는 모순과 긴장을 그대로 간직하는 태도를 가리킵니다.</p>
<p> </p>
<p><span style="color:#ff6600;">"그렇다. 우린 특별히 운이 나빴던 것도 좋았던 것도 아니다. 그 끔찍한 전쟁에서 평균치의 화를 입었을 뿐이다. 그런 생각이 복수나 고발을 위한 글쓰기의 욕망을 식혀주었다."</span>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피붙이(개개인) 의 <span style="color:#ff6600;">“고통, 그들의 억울한 사정을 외치고 싶어서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span> 그리고 그것은 치유도 증언도 아니고 ‘사랑’이라고 말합니다.</p>
<p> </p>
<p>이쯤 되면 전쟁 때 죽은 오빠, 그 트라우마에 평생 시달린 엄마 뿐 아니라, 사별한 남편, 가슴에 묻은 청년 아들의 죽음까지 (나아가 모든 가슴 아픈) 뭇 중생들의 죽음은 포개지고, 그들의 사멸에 대한 애통함이 흘러 넘칩니다. 자비심입니다. (물론 이런 저의 해석이 과하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p>
<p> </p>
<p> </p>
<p><span style="font-size:20px;color:#ff00ff;"><strong>5. 지금 여기에서 자기를 다시 쓴다는 것은?</strong> </span></p>
<p> </p>
<p> </p>
<p><img src="https://naidum.org/wp-content/uploads/kboard_attached/25/202610/6ac494231906a3948925.jpg" alt="" /></p>
<p> </p>
<p>5에서는 김윤식의 해설에 대해 분석하고, 그 다음 "경험한 것이 아니면 쓰지 않는다"는 아니 에르노의 '오토픽션' 혹은 자기사회학적 글쓰기(auto-socio-biographie), 그리고 "수치를 쓴다"는 디디에 에리봉의 비판적인 ‘자기기술지’(auto-ethnography) 등과 함께 비비안 고닉이나 오드리 로드 등 페미니스트의 자기 서사를 경유하면서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어떻게 부모서사를, 혹은 부모와 나 자신의 관계를 다시 쓸 수 있을까를 탐색하려고 했으나... , 더 쓰는 데 육체적 한계를 느껴 이번 공지는 이것으로 마감하려 합니다. ㅎㅎㅎ</p>
<p> </p>
<p> </p>
<p><span style="font-size:20px;color:#ff00ff;"><strong>6. 메모는 c조 입니다</strong></span></p>
<p> </p>
<p>가능한 두 개 정도의 토픽을 선정하시고, 제목을 질문형으로 해주세요. (주제가 잘 드러나게. 토론이 원활하게^^)</p>]]></description>
			<author><![CDATA[문탁]]></author>
			<pubDate>Tue, 06 Oct 2026 15:03:06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naidum.org/?kboard_redirect=25"><![CDATA[집중탐구학교]]></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치매세미나] 5회차 공지]]></title>
			<link><![CDATA[https://naidum.org/?kboard_content_redirect=710]]></link>
			<description><![CDATA[<p>이번 주 읽을 책은 &lt;돌봄, 동기화, 자유&gt; 입니다.</p>
<p>일본의 '요리아이의 숲'이라는 특별양호노인홈의 이야기입니다.</p>
<p>이 책은 요양시설이지만 집 같은 곳에서 노인들이 모여살면서 어떤 돌봄이 가능한지를 잘 보여줍니다.</p>
<p>약간은 낯선 '동기화', 노인 요양시설과 어울리기 힘들 것 같은 '자유' 가 어떻게 펼쳐지는지 살펴봅시다.</p>
<p> </p>
<p>  자유롭지 않게 된 몸은 나에게 새로운 자유를 가져다준다. 시간을 가늠할 수 없게 됨으로써 나는 시간에서 자유로워진다. 내가 있는 공간이 어딘지 모르면 상황에 맞춰 언행을 주의해야 한다는 규율에 얽매이지 않게 된다. 설령 누워서만 지내게 되어도 정신까지 그 자리에 묶여있지는 않는다. 자식의 얼굴을 잊어버림으로써 부모의 역할에서 벗어날 수 있다.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루하루가 신서하다. 분노와 증오에서 잘 벗어나게 되고, 기쁨을 느끼기 쉬워진다. 내가 지지고 있던 자기 개념이 무너지는 동시에 내가 나 자신에게 부여했던 규범에서 해방된다. 나라면 이래야 한다는 믿음이 해체되면서 새로운 자유가 생겨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나는 자신을 읽어버리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내가 변화하여 새로운 '나'로 바뀔 뿐이다. 돌봄이란 그 과정을 함께 하는 일이 아닐까. (64-65)</p>
<p> </p>
<p>  나에게 돌봄이란 그 노쇠한 육체에 손대는 것에서 시작됐다. 나이가 들수록 예전에는 가능했던 일이 하나씩 하나씩 불가능해진다. 몸은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게 된다. 노쇠한 사람은 자신의 몸을 타인에게 맡길 수 밖에 없다. 타인 또한 그 몸을 맡을 수밖에 없다. 적어도 어르신들이 돌봄을 기꺼이 받지는 않았다. 돌보는 나도 돌봄을 기꺼이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어쩔 수 없이 시작되는 일이었다. 노쇠한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의 몸에 손대게 한다. 그 몸을 맡은 사람도 어쩔 수 없이 손을 댄다. 그렇지만 나는 바로 어쩔 수 없이 시작된다는 점이 우리를 구제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것은 어떠한 방책도 남지 않았을 때 시작되는 협력 관계와도 비슷하다. 잘난 체라고는 하지 않는 두 사람이 어쩔 수 없이 서로 협력한다. 서로에게 큰 기대를 품지 않은 채 당면한 일과 마주할 수 있다. '어쩔 수 없다'에는 수용이나 공감과는 다른 긍정이 존재한다. 더 이상 손쓸 방법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안녕히'라며 작별조차 할 수 없는 어쩔 수 없음. 둘이서 하나의 행위를 완수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는 걸 합의'하는 것부터 시작하는 게 마음 편했다.(94-95)</p>
<p> </p>
<p>나이듦과 돌봄에 대해, 특히 치매와 돌봄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는 책인 것 같습니다.</p>
<p>나이듦, 치매, 돌봄을 주고 받는 관계에 대해 다른 시각으로 생각해보기. 이번 주 메모 올려주세요~~ </p>
<p> </p>
<p> </p>
<p> </p>]]></description>
			<author><![CDATA[인디언]]></author>
			<pubDate>Tue, 06 Oct 2026 05:38:19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naidum.org/?kboard_redirect=27"><![CDATA[단기세미나]]></category>
		</item>
				<item>
			<title><![CDATA[[나이듦대중지성_시즌3] &lt;생물과 무생물 사이&gt; 2회차 공지]]></title>
			<link><![CDATA[https://naidum.org/?kboard_content_redirect=709]]></link>
			<description><![CDATA[<p>&lt;생물과 무생물 사이&gt; 2회입니다.</p>
<p>생물에 대해 우리가 감각하고 있는 것에 대해 더 많은 이야기로 이어지면서 동적평형의 개념으로 나아갑니다.</p>
<p>"생명은 동적평형에 있는 흐름"이라는 후쿠오카 신이치의 정의에 동의 되시나요^^?</p>
<p>분자생물학의 세계로 분석한 생명의 세계에서 생각해볼 거리는 무엇이 있을까요^^?</p>
<p> </p>
<p>1) “동적평형의 상태란 끊임없는 아미노산의 유입과 체단백질의 합성과 분해가 생명현상 정가운데를 관통하면서 당당하게 흐른다는 것이다.”</p>
<p>“동적인 평형 상태는 가능한 한 그 결함을 메우기 위해 자신의 평형점을 이동시켜 조절하려 한다. 그런 완충 능력이 동적 평형이라는 시스템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평형은 자신의 요소에 결함이 생기면 그것을 메우는 방향으로 이동하고, 과잉 상태가 되면 그것을 흡수하는 방향으로 이동한다.”</p>
<p>“동적 평형계는 어떻게 해서든 그 자리를 메워서 시스템을 최적화하는 응답성과 가변성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동적인 평형의 특성이기도 하다. 평형은 모든 부분에서 항상 분해와 합성을 반복하면서 상황에 순응하는 유연성을 발휘한다.”</p>
<p>15장에 나오는 생명의 동적평형 상태를 설명하는 내용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생명의 이러한 유연성에서 떠올린 생각들을 정리해 보면 좋겠습니다.</p>
<p> </p>
<p>2) 이 책의 에필로그는 저자가 살았던 공간의 변화에도 여전히 그 자리에서 살고 있는 나무들이 나옵니다. 생명의 활동에 개입했던 저자의 실수에 대한 에피소드도 나옵니다. 이번 책을 읽으면서 생명을 보는 시각에 보충된 내용이 있다면 정리해 보면 좋겠습니다.</p>
<p> </p>
<p>이런 생각들과 더불어 여러분의 생각을 정리한 메모를 작성해 주세요~</p>
<p>10월 6일 화요일 밤 8시 줌에서 뵈어요^^</p>
<p> </p>]]></description>
			<author><![CDATA[기린]]></author>
			<pubDate>Sun, 04 Oct 2026 22:00:50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naidum.org/?kboard_redirect=10"><![CDATA[나이듦대중지성]]></category>
		</item>
				<item>
			<title><![CDATA[(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후기) 기억에 의지해서 소설을 쓸 수 있을까?]]></title>
			<link><![CDATA[https://naidum.org/?kboard_content_redirect=708]]></link>
			<description><![CDATA[<p>난초공원 선생님이 발터 벤야민의 ‘섬광’이라는 개념을 들춰주신 것이 신선했다. 과거와 지금이 섬광처럼 부딪혀 만들어낸 이미지는 과거의 그것이 아닌 새롭게 형성된 무엇이라고 공부했던 것이 얼핏 생각난다. 벤야민에 따르면 지나간 것들과 지금이 섬광처럼 만나 하나의 성좌(Konstellation)-별자리, 별들의 새로운 연결-를 형성한다고 한다. 챗 지피는 이를 과거와 현재가 어느 한 순간 충돌하면서 새로운 이미지가 번쩍 나타나는 것에 가깝다고 설명해주었다.</p>
<p> </p>
<p>박완서 작가는 “순전히 기억력에 의지해서” 이 책을 썼다고 했다. 하지만 작가가 고백했듯이 기억은 불확실하며 하나의 사건에 대한 기억을 공유하는 이들조차 각각의 상상력으로 각색된 기억을 갖는다. 만약 벤야민의 말처럼 각자가 지금 처한 사건을 만났을 때 기억의 파편이 섬광처럼 현재에 나타나 과거의 그것도 현재의 그것도 아닌 새로운 이미지를 형성한다면, 한 사람에게 하나의 기억이 반복되어 떠오른다 하더라도 매번 새로운 것이 만들어진단 말인가? 문득 박완서 작가가 자신의 경험을 반복해서 여러 작품에 썼더라도 매번 그 이미지는 작가 현재의 현재 상황에 따라 조금씩 달랐을거란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작가에게 글쓰기는 매번 기억의 이미지를 새롭게 하는 작업이 아니였을까?</p>
<p> </p>
<p>유난히 감각적인 단어와 표현들이 많았던 이 책은 읽는 이의 오감까지 열어제치는 것 같다. 아카시아 꽃 한송이를 먹었을 때의 “비릿하고 들척지근한 맛”, “입 안에 군침이 돌게 만드는 신맛”나는 싱아, 할아버지의 두루마리 자락의 서늘함, 우아한 목이 긴 초병, 낭자하게 피를 흘리는 것 같은 빨간 저녁 노을, 홍시빛깔의 잔광이 남아 있는 능선을 배경으로 텃밭머리에서 너울대는 수수이삭...그래서 였을까? 나도 모르게 문탁샘이 톡에 올린 『박완서의 낱말들』을 주문했다.</p>
<p> </p>
<p>시부모님의 경험을 기록하고 싶었다는 송이샘 말도 기억에 남는다. 우리 할머니도 비슷한 경험을 가지고 계셔서 나도 늘 돌아가신 할머니의 이야기를 그림책으로 써보고 싶었다. 제목도 정해두었다. ‘귀덕이“. 박완서 작가보다 두 살 많은 1929년생이신 할머니에게 귀하고 덕스럽게 살라는 이름은 과분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남도의 한 섬마을에서 태어난 우리 할머니는 작가의 시골 동무들처럼 소위 처녀공출을 피해 어린 나이에 시집을 가셨고, 6.25때 남편을 잃고 아이 셋을 키우셨다. 글을 읽으면서 나는 박완서 작가에게 질투를 느꼈다. 어쩜 그건 할머니의 질투였을지도 모른다. 겨우 두 살 차이인데, 할머니는 딸자식은 학교 근처에도 보내지 않았던 가풍에 따라 글을 배우지 못하셨다. 하지만 글을 배운 박완서 작가나 글을 배우지 못한 우리 할머니나 전쟁통에서 가족을 지키고 살았던 고통은 비슷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p>
<p> </p>
<p>여튼 벌칙(형벌)은 아니지만 발제문을 늦게 올린 댓가로 후기를 빨리 올리라는 연숙샘 말이 족쇄처럼 발을 끌어당기는 것 같아 늘어지고 싶은 토요일에 몸을 일으켜 컴퓨터 앞에 앉는다.</p>
<p> </p>
<p>세미나마다 튜터샘들은 에세이 마감 시간을 준수하라며 “잘 쓰려는 자의식이 글을 못쓰게 한다”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말씀하셨다. 지금 나는 발제문과 후기쓰는 데도 매번 시간을 어기고, 넘기고 있으니 이건 진짜 버릇일까 자의식일까? 그러면서도 또 세미나를 꾸역꾸역 신청하는 것은 뭘까? 사실 속으로는 직장에서 녹초가 되어 돌아오면 이것 저것 다 하기 싫어서 그런다고 핑계대고 있지만 솔직히 내가 퇴직을 한다고 해서 성실한 학인일 될 것 같지는 않다. 아직 혼구녕이 덜 난건가?</p>
<p> </p>
<p>1학년 아이들하고 공부를 하다보면, 내가 지금 뭐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때가 있다. 5분도 집중을 못하고, 모르는 말이 나오면 멍하게 앉아있는 아이들도 많고.. 그런데 또 이런 아이들이 학원 숙제가 많아서 힘들다고 한다. 그럴 때마다 울거먹는 레파토리가 있다. 선생님도 실은 숙제를 제 때 못해서 쩔쩔매고 함께 공부하는 선생님들에게 늘 혼난다고 말해준다.</p>
<p> </p>
<p>박완서 소설 읽기가 끝나간다. 소설 읽기는 재미있는데, 소설 세미나는 쉽지 않다. 연숙샘이 “고등학생들은 이 재미있는 『그 많던 싱아가...』를 교과서 문제로 푸니 얼마나 괴롭겠냐, 이 소설의 재미난 맛을 못봐서 안타깝다”라는 말을 하셨는데, 우리도 크게 다르지는 않다. 소설은 정작 재미있게 읽었지만, 세미나를 할라치면 어떻게 재미나게 읽은 이 소설을 분석해야하나 막막하다. 벤야민의 말을 내 식대로 이야기 하자면, 소설에서 하나의 문장이나 장면을 읽을 때 각자의 과거의 기억이 지금과 섬광처럼 만나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내서 그런 것이 아닌가 싶다. 게다가 소설이란 온갖가지 정서를 불러일으키는 글이 아닌가. 그러니 우리의 소설 세미나는 사공이 많아 산으로 가기 십상이 아닐까 T.T. 해서 방향타를 쥐고 나아가야할 튜터샘이 더욱 필요하겠지만....</p>
<p> </p>
<p>그래도 박완서를 떠올릴 때마다 이 세미나가 떠오르겠지? 그 때 이미지는 매번 다른 이미지일까?</p>
<p> </p>
<p> </p>
<p> </p>]]></description>
			<author><![CDATA[산책]]></author>
			<pubDate>Sat, 03 Oct 2026 15:20:32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naidum.org/?kboard_redirect=25"><![CDATA[집중탐구학교]]></category>
		</item>
				<item>
			<title><![CDATA[[4회차후기] &lt;나는 치매 의사입니다&gt; 불편하지만 불행하지는 않습니다]]></title>
			<link><![CDATA[https://naidum.org/?kboard_content_redirect=707]]></link>
			<description><![CDATA[<h2><span style="font-size:16px;">불편하지만 불행하지는 않습니다</span></h2>
<div>  세미나가 있던 날, 마침 어머니가 요양원에 입소했습니다. 알츠하이머 치매 때문입니다. 3년 전 아버지가 심장병과 혈관성 치매로 돌아가셨으니, 저 역시 치매가 될 가능성이 아주 높습니다. 저에게 치매는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div>
<div>이번 세미나에서 함께 읽은 하세가와 가즈오의 《나는 치매 의사입니다》는 일반적인 치매 안내서가 아닙니다. 평생 치매를 연구하고 수많은 환자를 진단하고 치료했던 의사가 자신이 치매 당사자가 된 뒤 쓴 책입니다. 저자는 ‘하세가와식 치매척도’를 만든 의사로 우리나라에서도 잘 알려진 분이고요. 저자는 누구보다 치매를 잘 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치매에 걸린 뒤에야 비로소 깨닫습니다.</div>
<div><b>'치매를 아는 것과 치매를 살아가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라는 것.'</b></div>
<div>그러면서 몇 가지 말이 기억에 남습니다.</div>
<div><b>--기억력은 떨어져도 '감정'은 남는다.</b></div>
<div><b>--판단력이 흐려져도 '자존심'은 남는다.</b></div>
<div>  치매가 되었다고 어느 날 갑자기 그 사람이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기억하지 못한다고 느끼지 못하는 것도 아닙니다. 어제 일을 잊어버려도 오늘 누군가 자신을 함부로 대하면 서운하고, 따뜻하게 손을 잡아주면 편안합니다.</div>
<div>  세미나에서 오모나샘이 한 말도 기억에 남습니다. 치매라는 사실보다 더 두려운 것은 치매가 되었다는 이유로 이전과 다른 사람으로 취급받는 것. 중요한 것은 치매가 있는 사람을 그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이라는 겁니다.</div>
<div>  인디언샘은 언제나 처럼 단호하게 말합니다. <b>“치매 예방? 치료? 그런 거 보다, 치매와의 공존!” </b>치매가 있으면 치매가 있는 대로,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치매가 있어도 할 수 있는 일은 많습니다. 산책할 수 있고, 꽃을 바라볼 수 있고, 좋아하는 음악을 들을 수 있습니다. 밥을 먹고, 웃을 수 있습니다. 어제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오늘 기분 좋은 햇볕을 느낄 수 있습니다.어쩌면 '치매와의 공존'이란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div>
<div><b>'잃어버린 것만 헤아리지 않고, 아직 남아 있는 것으로 오늘을 살아가는 것.'</b></div>
<div>세미나에서 또 기억나는 말이 있습니다.</div>
<div><b>--치매는 삶의 일부를 불편하게 만들 수는 있어도, 삶 전체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b></div>
<div>그래서, <b>불편하지만 불행하지는 않습니다.</b></div>]]></description>
			<author><![CDATA[한스]]></author>
			<pubDate>Sat, 03 Oct 2026 08:01:32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naidum.org/?kboard_redirect=27"><![CDATA[단기세미나]]></category>
		</item>
				<item>
			<title><![CDATA[&lt;생물과 무생물 사이&gt; 1회차 후기]]></title>
			<link><![CDATA[https://naidum.org/?kboard_content_redirect=706]]></link>
			<description><![CDATA[<p>&lt;생물과 무생물 사이&gt; 1회차 후기</p>
<p> </p>
<p>어제는 지인 두 명을 만났습니다.</p>
<p>거의 일 년 만에 만난 것 같습니다.</p>
<p>두 명 다 나보다 연배가 있는데 이번에 만나보니 작년보다 더 작아지고 마른 느낌이었습니다.</p>
<p>약간 짠하다는 생각이 드는가 싶더니 곧바로 ‘엔트로피’ 개념이 떠올랐습니다.</p>
<p>‘저분들도 엔트로피가 증가하고 있는 중이구나!’</p>
<p>나만 증가중이 아니라서 위로가 되었습니다.^^</p>
<p>메뉴를 정하고 식사를 시작하려는데 또 ‘부의 엔트로피(음의 엔트로피)’ 개념이 떠올랐습니다.</p>
<p>‘엔트로피 증가를 막으려면 먹는 게 필수지!’</p>
<p>무언가 적군을 막으려는 비장한 마음으로 식사를 했습니다.</p>
<p>식사 중 대화내용에는 각종 영양제 이야기, 운동 이야기, 병원이야기들이었습니다.</p>
<p>엔트로피는 계속 증가하려하고 우리는 그것을 막겠다고 발버둥치고 있었습니다.</p>
<p>식사도 많이 하지 않았습니다. 엔트로피 증가를 막으려다가 오히려 늘리는 결과가 올까봐 겁나기 때문입니다.</p>
<p>과학을 공부한다는 것이 이렇게 무섭습니다!</p>
<p>지인들과의 식사는 아무 생각 없이 맛있게 먹어야 하는데 낭만은 어디로 가고 물리적 신체만이 남아 막대기 같은 인생이 되었습니다!</p>
<p>나이듦 대중지성 세미나! 책임지세요!</p>
<p> </p>
<p>세미나에서는 각자 자기의 개성대로 발표를 해서 그런 거 보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특히 앙코르석공님의 바이러스와 진화 또는 돌연변이를 연결시켜서 설명하신 부분은 더 재미있었습니다.</p>
<p>&lt;생물과 무생물 사이&gt;는 처음에는 소설처럼, 수필처럼 시작되었습니다. 지은이가 미국의 록펠러 연구소 이야기를 시작으로 일본인 선배 노구치 히데오에 대한 이야기까지 재밌더라고요.</p>
<p>이제 본격적으로 유전물질이 단백질이 아니라 DNA임을 밝히는데 기초를 닦은 에이버리 이야기</p>
<p>샤가프가 DNA의 염기(A-T,G-C)의 1;1 결합 비율 법칙이 생명체의 정보와 복제의 핵심 열쇠임을 밝혀낸 이야기</p>
<p>또 PCR의 원리를 밝혀낸 낭만적인 천재 멀리스 이야기, 그 때가 1983년이니 참 얼마 안되었죠?</p>
<p>또 왓슨과 크릭, 샤가프의 법칙을 기초삼고, 로잘린드 프랭클린의 성과를 가로채다시피 해서 얻은 노벨상 이야기</p>
<p>그리고 생명은 어떻게 동적인 질서를 유지할까를 생각하면서 드디어 엔트로피 개념이 나옵니다. 엔트로피란 난잡함(불규칙성)을 나타내는 척도로 모든 물리학적 과정에는 물질의 확산이 최대 엔트로피의 방향으로 움직이고 거기에 도달함으로써 끝나는데 이를 최대 엔트로피의 법칙이라고 부릅니다. 살아있는 생명은 끊임없이 엔트로피를 늘리고 결국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러니 생명은 그것을 막으려면 끊임없이 ‘음의 엔트로피’를 늘려야 하겠지요.(158-161쪽) 그 방법이 바로 음식물 섭취입니다. 이는 동적평형이란 이론으로 9장부터 더 자세히 배우게 되겠죠.</p>
<p>저자는 어려운 생물책을 과학자들의 이기심, 알력 등을 적나라하게 나열하고, 수필처럼 자신의 겪은 일을 솔직하게 쓰는 형식으로 당의정을 입혀서 비교적 접근이 쉽도록 꾸며주어서 읽기가 좀 수월했던 것 같습니다. 물론 그래도 이해를 다 할 수는 없죠.</p>
<p> </p>
<p>2,30대에는 너무 정신적으로 치우쳐있었던 듯싶습니다. 몸은 없고 정신만 있는 듯이요.</p>
<p>50대 이후 노화가 오면서 점점 물질의 세계, 형이하학의 세계로 관심이 옮겨지는 걸 느낍니다. 이제는 공연도 연극보다는 무용이 좋고, 쇼도 좋더군요. 문학과 철학이 학문의 전부인양 생각했었는데 나이듦 대중지성을 접하고 물질의 세계를 다룬 책들도 접하게 되면서 좀 균형이 잡혀가는 느낌입니다. 물론 읽을 때는 괴로운데 다 읽고 나면 뭐라도 남는 것 같습니다. 물리적인 세상을, 생명을, 인간을, 나를, 노화를, 죽음을 좀 더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할까요?</p>
<p>나이듦 대중지성 세미나! 고마워요!</p>
<p> </p>
<p>ps, 원래 이랬다 저랬다 하는 게 제 특기입니다!</p>
<p> </p>]]></description>
			<author><![CDATA[니은]]></author>
			<pubDate>Fri, 02 Oct 2026 16:25:59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naidum.org/?kboard_redirect=10"><![CDATA[나이듦대중지성]]></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치매세미나] 4회차 공지]]></title>
			<link><![CDATA[https://naidum.org/?kboard_content_redirect=705]]></link>
			<description><![CDATA[<p> </p>
<p>명절은 잘 보내셨나요?</p>
<p>이번 주에는 &lt;나는 치매 의사입니다&gt;를 읽습니다.</p>
<p> </p>
<p>   공원을 걷고 있던 어린아이가 넘어져 울고 있자 어디선가 네 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가 한달음에 달려왔습니다.  넘어진 어린아이를 일으켜 세워주려는가보다 싶었는데 여자아이는 어린아이 옆에 자신도 배를 깔고 누워 그 아이를 보며 방긋 웃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울고 있던 어린아이도 따라 웃었습니다. 잠시 후 여자아이가ㅏ 일어나 "일어나자"하고 말하자 어린아이는 "응"하며 일어났고 두 아이는 손을 잡고 걸어갔습니다. (88쪽)</p>
<p>   "할아버지, 우리를 못 알아보시는 것 같은데 우리가 할어버지를 잘 알고 있으니까 괜찮아요. 걱정 안 하셔도 돼요"(171쪽)</p>
<p> </p>
<p>이 책을 다시 읽으면서 감동을 받았던 부분입니다.</p>
<p>여러분들이 감동받은 부분은 어느 곳들인지 함께 나누고 싶네요.^^ </p>
<p> </p>
<p> </p>
<p> </p>
<p> </p>]]></description>
			<author><![CDATA[인디언]]></author>
			<pubDate>Tue, 29 Sep 2026 05:36:31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naidum.org/?kboard_redirect=27"><![CDATA[단기세미나]]></category>
		</item>
				<item>
			<title><![CDATA[[나이듦대중지성_시즌3] &lt;생물과 무생물 사이&gt; 1회차 공지]]></title>
			<link><![CDATA[https://naidum.org/?kboard_content_redirect=704]]></link>
			<description><![CDATA[<p class="p1">&lt;생물과 무생물 사이&gt;(후쿠오카 신이치, 2007) 첫번째 시간입니다.</p>
<p class="p1">이 책의 저자 후쿠오카 신이치는 일본에서 가장 인기있는 과학자라고 하네요.</p>
<p class="p1">방송출연도 많이하고 심지어 교양프로그램의 진행자가 되기도 했다는데요</p>
<p class="p1">그렇게 된 계기가 바로 이 책 &lt;생물과 무생물 사이&gt;의 대히트 때문이었다고 합니다.</p>
<p> </p>
<p class="p1">발제문에는 자세히 적지 않았지만,</p>
<p class="p1">이 책에는 우리가 위대한 발견으로만 알고 있던 1953년 DNA 이중나선 구조를 발표한 제임스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에 대한 뒷 이야기가 담겨있습니다. 과학자들의 천재적 직관 뒤에 자리한 동료들간의 견제, 권력관계, 그리고 명예욕이 뒤얽혀 있어 마치 한편의 드라마를 보는듯 했습니다.</p>
<p> </p>
<p class="p1">이들의 발견 뒤에는 이름없는 영웅들이 존재했는데요,</p>
<p class="p1">DNA가 유전물질임을 밝혀낸 오즈월드 에이버리가 있었고</p>
<p class="p1">X선이 치명적인줄도 모르고 자신의 연구에 몰두해 ’51번 X선 사진’을 촬영했던 로절린드 플랭클린도 있었습니다.</p>
<p class="p1">생명과학은 이들의 공헌으로 생명이 DNA를 기반으로 한 설계도대로 작동하는 ‘분자기계’라는 패러다임으로 바뀌었지만</p>
<p class="p1">후쿠오카 신이치는 이 역시 생명이 특징을 밝히는 열쇠가 아니었음을</p>
<p class="p1">슈뢰딩거의 엔트로피와 쇤하이머의 동적평형 이론을 가져와 설명합니다.</p>
<p class="p1">동적평형에 관한 이야기는 뒷부분에서 더 자세히 이어지는데요,</p>
<p class="p1">여러분들은 이 책의 앞 부분 어떻게 읽으셨는지 메모를 통해 알려주세요.</p>
<p class="p1">월요일 오후 9시까지 올려주세요~</p>
<p> </p>
<p>이 책이 국내 출간되었을 당시 <a href="https://www.joongang.co.kr/article/3165704">중앙일보와의 저자 인터뷰</a>도 한 번 읽어봐 주세요.</p>
<p> </p>
<p> </p>]]></description>
			<author><![CDATA[서해]]></author>
			<pubDate>Sun, 27 Sep 2026 20:57:40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naidum.org/?kboard_redirect=10"><![CDATA[나이듦대중지성]]></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치매니까 잘부탁드립니다.]]></title>
			<link><![CDATA[https://naidum.org/?kboard_content_redirect=703]]></link>
			<description><![CDATA[<p>『치매니까 잘 부탁합니다』를 읽고 서로 평소에 경험한 부분을 중심으로 한 사람의 존엄과 자기 결정권에 대한 소중한 가치를 나눴습니다.</p>
<p> </p>
<p>저자는 가족 간 일어나는 에피소드로 잘 표현했습니다. 제목에서 "잘 부탁합니다."는 함께 살아가기 위한 신뢰와 관계에서 의미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치매가 온 사람을 나는 어떤 사람으로 바라볼 것인가?” -치매 진단을 받는 순간 그 사람의 기억은 조금씩 달라질 수 있다. 하지만 그 사람이 살아온 세월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좋아했던 것, 싫어했던 것, 사랑했던 사람, 자신만의 방식으로 살아온 시간은 여전히 그 사람 안에 있다. 우리들 이야기는 이 부분에서 오래 머물렀습니다.</p>
<p> </p>
<p>저자는 돌보는 자 입장에서 책 쓰기가 가능했던 이유는 가족과 의견을 묻고 대화하는 시간이 가능하여 첫 번째로. 찬찬히 영상 글쓰기 동의가 엄마에게 자연스럽게 이뤄졌습니다. 두 번째로 가능한 이유는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현실이 되었는데도, 할아버지가 돌봄을 선택하는 모습을 보면서 돌봄은 완벽하게 준비된 사람이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이 있어도 그 사람 곁에 있기로 결정하는 데서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p>
<p> </p>
<p>언젠가 누군가의 돌봄을 받게 될 수 있다.는 전제로 그렇다면 나는 어떤 돌봄을 받고 싶은가? 을. 생각해 보는 것으로 오늘 이야기 주제를 마무리하려 합니다. 내가 잊어가는 것을 가족이 대신 결정해 주는 돌봄보다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선택하고, 어려워진 것은 도움을 받으며, 마지막까지 나라는 사람으로 존중받는 돌봄을 받고 싶습니다.</p>
<p> </p>
<p>그래서 이 책을 읽고 나에게 치매는 더 이상 단순히 ‘기억을 잃는 병’으로만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치매를 만나는 순간은 가족이 그 사람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그리고 한 사람이 마지막까지 자신의 삶을 어떻게 살아갈 수 있는지를 묻는 시간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앞으로 치매를 공부하면서 ‘어떻게 돌볼 것인가’만 배우고 싶지는 않습니다. ‘어떻게 한 사람으로 대할 것인가’를 배우고 싶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내가 돌봄을 받는 사람이 되었을 때에도 내가 나인 것을 포기하지 않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그래서 이 책의 제목 **“치매니까 잘 부탁합니다”**가 이제는 나에게 다르게 들닙니다.. 그것은 단순히 가족에게 도움을 부탁하는 말이 아니라, “내가 조금씩 달라지더라도, 마지막까지 나를 나로 대해주세요.” 라는 부탁처럼 느껴집니다. 그리고 나는 그 부탁을 치매 환자의 부탁이 아니라, 언젠가 돌봄을 받게 될 우리 모두의 부탁으로 받아들이고 싶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 존엄성을 지키는 원천.</p>
<p> </p>
<p> </p>]]></description>
			<author><![CDATA[상주]]></author>
			<pubDate>Sun, 27 Sep 2026 12:14:52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naidum.org/?kboard_redirect=27"><![CDATA[단기세미나]]></category>
		</item>
				<item>
			<title><![CDATA[[박완서 18회 공지_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_ 기억, 그리고 다시 쓰는 삶]]></title>
			<link><![CDATA[https://naidum.org/?kboard_content_redirect=702]]></link>
			<description><![CDATA[<p><span style="font-size:20px;color:#000000;"><strong>1.명절....추석(秋夕)</strong></span></p>
<p> </p>
<p style="padding-left:40px;">선생님들~~</p>
<p style="padding-left:40px;">세미나 공지로 추석 인사 드립니다 ㅎㅎ</p>
<p style="padding-left:40px;">박완서 세미나가 딱 제철맞이 공부를 시켜주네요.</p>
<p style="padding-left:40px;">명절날처럼 복닥복닥거리고 풍성한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가 이번 차례입니다.</p>
<p> </p>
<p><img class="aligncenter" src="https://naidum.org/wp-content/uploads/kboard_attached/25/202609/6ab56969495258591939.jpg" alt="" width="332" height="334" /></p>
<p> </p>
<p style="padding-left:40px;">     </p>
<p><span style="color:#000000;"><strong><span style="font-size:20px;">2. 기억의 복원, 자전적 글쓰기</span></strong></span></p>
<p> </p>
<p style="padding-left:40px;"><strong><span style="color:#0000ff;">[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1992</span></strong><span style="color:#0000ff;">)</span></p>
<p style="padding-left:40px;">박완서 선생의 고향 개성 박적골에서의 어린 시절부터 서울에서 국민학교를 다니고 대학에 입학하기까지, 그리고 6.25를 거치는 스무 살 무렵까지의 이야기입니다. 그가 태어나 성장한 1931년부터 1950년까지는 식민지 지배와 태평양 전쟁, 해방과 전쟁으로 이어지는 격동의 시기였지요.</p>
<p style="padding-left:40px;">그 자전적 경험의 세계를 거의 기록에 가까운 서술방식으로 쓰고 있습니다.</p>
<p style="padding-left:40px;">그래서인지 작가 스스로도<span style="color:#0000ff;"> “이런 글을 소설이라고 불러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 순전히 기억력에만 의지해서 써보았다”</span>고 합니다.</p>
<p style="padding-left:40px;">그리고 <span style="color:#0000ff;">“쓰다 보니까 소설이나 수필 속에서 한두 번씩 울거먹지 않은 경험이 거의 없었다”</span>고 조금 머쓱해하는 것도 같습니다(&lt;작가의 말 - 자화상을 그리듯이 쓴 글&gt;, 1992).</p>
<p style="padding-left:40px;">실제로 [그 많던 싱아~]를 읽다 보면, 우리가 그동안 읽어왔던 [나목], [목마른 계절], [도시의 흉년], [미망] 등이 겹쳐지기도 합니다. 또 어떤 대목에서는 작가가 불쑥 등장해, 이 부분은 어디에서 어떻게 썼는지를 이야기하기도 하지요.</p>
<p style="padding-left:40px;"> </p>
<p style="padding-left:40px;">[미망]의 공지글에서 제가 박완서 선생의 표현을 빌려 “깍짓동”같이 퉁퉁한 이야기다발을 안고 있는 책이라 했습니다만, [그 많던 싱아~]는 또 다른 차원의 “깍짓동 이야기다발”인 듯합니다.</p>
<p style="padding-left:40px;">한 사람의 어린 시절과 성장 과정이 중심에 놓여 있지만, 그 안에는 가족 서사, 박적골과 서울로 대표되는 전근대/근대적 공간, 식민지 경험과 해방 이후의 이념 대립, 전쟁과 생존이라는 시대의 이야기가 함께 포개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흔히들 [그 많던 싱아~]를 두고 "성장소설, 역사적 증언으로서의 소설 쓰기"라고 말했더랬습니다.    </p>
<p style="padding-left:40px;">한 사람의 기억 속에 남아 있던 구체적인 삶의 풍경들이 개인의 이야기를 넘어 한 시대의 삶을 보여주는 이야기로 확장되는 방식.... 뭐, 그렇기도 합니다.</p>
<p>         코흘리개 아이에서 스무살 처녀로의 성장... 이도 그렇긴 합니다만... 이들로만은 충분치 않습니다. </p>
<p style="padding-left:40px;">[그 많던 싱아~]를 비롯한 박완서의 자전적 글쓰기는 기억을 복원하는 방식부터가 매우 독특합니다. </p>
<p style="padding-left:40px;">누구를 어떻게 기억하고 바라보는지, 무엇을 황홀하게 혹은 가차없이 그려내는지를  따라가다 보면, 기이하고 불편하고 모순된, 뒤죽박죽 엉켜붙은 편린들이 곳곳에서 빛을 냅니다.  </p>
<p style="padding-left:40px;">‘증언’이라는 말이 객관적 사실과 기록성에 무게를 두는 방식과도 퍽 달라보입니다. ‘성장’이라는 말이 미숙에서 성숙으로, 불완전에서 완전으로, 결핍에서 충족으로 변화하는 과정에 무게를 두는 방식과도 아예 달라보입니다. </p>
<p style="padding-left:40px;">그래서 [그 많던 싱아~]를 읽는다는 것은, 어쩌면 박완서가 책을 읽으며 느꼈다는 두 감각- ‘현실에서 붕 떠올라 공상의 세계에 몰입하는 재미’와 ‘현실을 지긋지긋하도록 바로 보게 하는 새로움’-을 우리도 함께 실감하는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p>
<p style="padding-left:40px;"> </p>
<p><span style="font-size:20px;"><strong><span style="color:#000000;">3. 삶의 출발점, 글쓰기의 원형</span></strong></span></p>
<p> </p>
<p style="padding-left:40px;">작가의 말에 따르면 [그 많던 싱아~]는 등단작 이후 처음으로 연재 없이 쓴 장편소설이라 합니다. 그런 만큼 연재와 마감이라는 외부의 힘보다, 스스로 쓰고자 하는 욕망이 더 크게 작용한 작품이라고 해석할 여지도 있지요.</p>
<p style="padding-left:40px;">또한 작가 연보를 살펴보면, [그 많던 싱아~]는 환갑에 이르러 그동안 “한두 번씩 울거먹은 경험”들을 집대성하다시피 소상하게 풀어낸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아울러 [미망](1985-1989) 이후 첫 장편소설이기도 합니다(1989년에 나온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는 &lt;여성신문&gt; 제11호(1989.2.17.)-제34호(7.28)에 연재된 작품이니, 실질적으로는 [그 많던 싱아~]가 [미망] 이후 첫 장편소설인 셈이지요.)</p>
<p style="padding-left:40px;">[미망] 이후 첫 장편 소설임을 굳이 거론하는 이유는 작가의 가족사 때문입니다. 남편과 아들을 연이어 잃으며 [미망]의 연재는 중단되었고, 1990년 [한 말씀만 하소서]에서 토해낸 절절한 글쓰기는 그 고통의 깊이를 짐작하게 합니다. 그 이후, 출판사로부터 성장소설을 써보라는 권유가 있었다고 작가 스스로 밝히기도 했지만, [미망] 완결 이후 3년 만에, 환갑의 나이에 이르러 자신의 원체험이자 삶의 출발점으로 돌아간 것은 어떤 의미였을까요.</p>
<p style="padding-left:40px;">어쩌면 이 질문은 [그 많던 싱아~] 안에서 쉽사리 결론지어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다만 1년 여에 걸친 박완서 세미나가 마무리를 향해 가는 지금, 한 번쯤 짚어볼 문제라는 생각이 듭니다.</p>
<p style="padding-left:40px;">다음 세미나 작품인 [그 산이 정말 거기에 있었을까](1995)가 [그 많던 싱아~]의 연장선에 있다는 점에서, 박완서의 삶과 글쓰기가 시작된 지점을 가늠해보는 일은 더욱 의미가 있어 보입니다.</p>
<p style="padding-left:40px;">결국 남는 것은 가장 오래되고 원초적인 질문, “왜 쓰는가.”</p>
<p style="padding-left:40px;">우리는 이 질문을 박완서에게, 그리고 우리 자신에게 들이밀게 될  듯합니다.  </p>
<p> </p>
<p> </p>
<p> </p>
<p><span style="font-size:17px;"><strong><span style="color:#0000ff;">B조 쌤들</span>,</strong></span> <span style="color:#0000ff;"><span style="font-size:17px;"><strong>수요일 저녁 9시까지</strong></span><span style="color:#000000;"> 발제문 올려주시어요</span></span><span style="color:#000000;">.</span></p>
<p>발제문은 씨앗문장을 뽑되(이건 마음대로~),</p>
<p>가능한 한, [주제] 하나를 부각하는 방향이었으면 좋겠습니다.</p>
<p><strong>보름달처럼 풍성한 발제문</strong>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p>
<p> </p>
<p> </p>]]></description>
			<author><![CDATA[파랑]]></author>
			<pubDate>Fri, 25 Sep 2026 02:21:02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naidum.org/?kboard_redirect=25"><![CDATA[집중탐구학교]]></category>
		</i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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