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서 13회 후기-그해 겨울(2) 성녀의 꼭두각시 놀음
호기롭게 질문을 준비해 봤는데, 명확한 질문을 하지 못한 것 같은 찜찜함에 머리 속 정리를 좀 해봤다. 마침 내일 쉬는 날이고, 날 것의 후기를 빨리 써야 나중에 에세이 쓰기 편하다는 문탁샘 이야기도 떠올라서... 생각을 정리해 보는 김에 후기도 먼저 남겨본다. (^^;;;)
나는 박완서가 늘 인물의 내면을 적나라하게 표현한다고 느낀다. 사람이 자신에게도 항상 솔직할 수는 없고 때때로 자기 자신을 기만하기도 하는데, 박완서의 인물들은 대체로 매우 정직하다. 복잡하고 뒤엉키고 모순적이고 찌질하고 모호한 감정들이 낱낱이 드러난다. 그래서인가. 내 눈에는 도덕적 우월감이나 도덕적 쾌감이라는 모순되어 보이는 단어와 감정들이 유독 눈에 띈다.
"이제야 나도 뭔가를 좀 알 것 같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폐품 수집해서 이웃돕기 한다고 빈 병이나 헌 잡지를 가져오랄 때마다 우리 아이들은 옳다꾸나 콜라를 사달래서 마시고는 빈 병을 가져가거든. 우리 집에선 콜라가 아이들 몸에 안 좋다고 딴 때는 절대로 못 먹게 하니까. 그럴 때마다 차라리 콜라 한 병 값을 돈으로 내라지 뭣 때문에 억지 폐품을 만들게 할까 분개해서 학교에다 전화까지 걸고 법석을 떨었었는데 이제야 알겠어. 가장 어리석은 짓 같은 게 실은 가장 약은 짓일 수도 있다는 걸. 다 그렇고 그런 게 우리들이 사는 세상이라는 걸." (199-200쪽)
수지가 만든 네크워크 집단은 이렇게 '한동안 세상에 비친 자신의 허상을 자신의 참모습으로 착각하며 자연스럽게 성녀의 꼭두각시 놀음을 해냈다(199쪽)' 살만 한 집단에 든 이들은 놀이하듯 도덕적으로 우월해 보이는 일을 한다. 수지는 이러한 '성녀 노릇에 모멸감을 느꼈(156쪽)'지만, 포기하지 못한다.
"그게 좋은 걸 어쩌란 말인가? 잘못 맛들인 쾌락처럼 도저히 그만둘 수 없는 걸 어쩌란 말인가?" (156쪽)
수지는 자기 배곯이가 싫어 피난 길에 동생 손을 놓아버렸고, 남 잘되는 꼴을 보면 배가 아파 옛 애인 인재와 동생 목이에게 상처를 줬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웃과의 나눔 활동을 통해 자신은 도덕적으로 우월한 인간이라는 쾌락을 즐기다 못해 포기하지도 못한다. 오늘 중상위층의 쇼윈도 부부 개념에 대해 이야기 나누었지만, 그들에게 쇼윈도 모럴리티 또한 빠질 수 없는 생필품인 것은 아닐지. "보이기 위한 삶"을 사느라 "진짜 삶"에 허기진 중상위층들에게, 자신들의 삶이 좀 가식적이어도 진짜 먹고 살기 바쁜 하층민들이 나눌 수 없는 '도덕성'이라는 게 있다는 왜곡된(?) 원한 감정이 생긴 것 같다.
하지만 수지가 오목에게 느끼는 죄의식은 단순한 자기 방어 기제를 넘어 진심인 것 같다. 수지가 고아원 봉사 활동에서는 신체적으로 거리를 두고 싶어했던 시각적, 후각적 요소들이 오목의 가족을 만났을 때는 불편함 없이 받아 들여지는 것을 보면, 그녀에게 무거운 죄책감이 있는 것은 틀림없다. 그것에 대해 참회하는 과정과 방식에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지만, 그리고 아무 죄도 없이 비참한 인생을 살아야 했던 오목이 가장 억울한 것은 틀림없지만, 나는 수지에 대한 연민 또한 버릴 수가 없다. 전쟁만 아니었다면, 그리고 그때 그렇게 어린 나이가 아니었더라면, 수지가 평생 짊어질 죄의식의 원흉인 그 사건(?)이 일어날 일은 없지 않았을까. 그래서 오목이도 가족들에게 사랑받으며 아웅다웅 살 수 있지 않았을까. 영화 라라랜드 마지막 장면처럼, 예전에 이랬다면 저랬다면 어땠을까...라며 그들의 삶을 플래시백 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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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회 공지_ 서 있는 여자]_ "꾸준히 피곤하게 하는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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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 13회 공지-그해 겨울(2)] 기생충 반지하의 계보학과 유령의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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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회 공지-오만과 몽상(2)] 그 때, 그 시절, 그 젊은이들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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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회 저문날의 삽화1~5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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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탁 | 2026.05.17 | 277 |
“난, 아직도 이 세미나에 적응이 덜 돼 어리버리하고 있는 중인가 봅니다.ㅠㅠ
어제 밤 기차간에서야, 메모 제출과 후기쓰기가 한 세트로 묶여있다는 사실을 알았답니다. 오늘 쉬는 날인줄도 모르고 사무실 나왔다가, 주절주절 후기 올립니다.”
(2권 스토리 개요) 수지는 여러모로 자신과 비슷한 인간인 기욱이와 결혼을 앞두고,
인재와 오목이를 엮어 둘을 동시에 정리하여 죄의식에서 벗어날 꼼수를 부리다가 자기 생각돼로 안된채 기욱이와 결혼을 한다.
오목이는 인재의 아이를 낳고 이때부터(일환이와 살면서 인재의 아이를 낳은) 일환이와 목숨을 건 치열한 투쟁에 들어간다. 눈물없이 읽을 수 없는 오목이의 죽음에 이르는 곡진한 삶이 시작된다.
수지와 오목이가 다시 만나게 된 것은, 수지의 집 보일러를 고치려 온 보일러기술자 일환이에게 수지가 성적매력을 느끼면서 생긴 친밀감에서 시작된다. 일환이는 이 친밀감을 수지의 인간적 호의로 알고, 중동노무자로 나가는 일자리를 부탁하고, 수지는 수철에게 부탁해서 실현된다. 이 계기로 둘은 10년 만에 다시 재회한다.
둘의 재회 후, 수지는 오목이의 죽음을 뒤처리하는 역할을 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자신의 중대범죄도 용서받으려고 했으나, 그것은 모호한채로 남기고 소설은 끝난다.
나는 이 소설에서, 작정하고 오목이를 버리는 수지의 행동(1권)과 양부모 집에서 나와 일환이를 찾아가는 오목이의 행동(2권)에 내내 의문이 많았다.
주인공의 이 행동이 없다면 이야기는 시작도 전개도 할 수 없었다는 점에서, 이후의 전개되는 모든 이야기들은 이 두 가지 행동을 발판 삼아 전개된다는 점에서 이 두 가지 행동을 어떻게 보고 어떻게 정리해야 하는지가 잘 안돼어서 힘들었다.
수지의 이 행동을 전쟁으로 인한 어쩔 수 없음이 아니라 이상성격자, 이후에 이상성격범죄자로 발전할 수 있는 것으로 보였고, 실제로, 읽는 내내 주인공 수지를 이상성격을 확인하는 과정같았다.
오목이는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지만 제법 개인주의적이고 독립적이고 자신의 삶을 똘망하게 이끌어 갈 인간으로 그려졌는데, 양부모 집에서 나오는 오목이의 모습은 적어도 그랬는데... 갑자기 일환이한테 몸을 의탁하러 가는 대목이 어이가 좀 없었다. 왜? 아직 임신 사실도 모르고, 새로운 시작을 하려고 한 오목이가 왜? 이후 전개되는 비극의 여주인공을 만들려고 그랬는지....
비록 2권의 마지박 부분을 가서는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읽었지만, 다 읽고 나서 드는 생각이, 작가는 인물들의 행동에 대한 개연성과 보편성을 전쟁이라는 요술방망이로 너무 쉽게 해결해버리는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이렇다 보니 박완서 소설을 읽으면 읽을수록 박완서의 신문소설과 김수현의 방송드라마 대본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라는 궁금증이 생긴다.
<죄의식보다 무거웠던 기득권의 무게>
작품에 대한 많은 이야기 중 수지의 죄의식에 대해 한번 더 정리해 보려고 한다. 그 죄의식은 수지 개인의 것인지, 전쟁과 산업화와는 무관한 것인지.
죄의식의 근원은 배고픔을 참지 못해 동생을 버린 행위 자체에 있다. 전쟁 중이었고, 마침 피난을 가야 하는 극한의 상황이었으며, 수지는 어렸다.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상황이었기에, 이는 아이의 악랄함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문제는 이후 수지가 그 기억을 소환하며 살아가는 방식, 그리고 오목이를 다시 만나며 행했던 선택들에 있다.
수지는 평생 그 죄의식을 덜어내고 싶어 했다. 그러나 정면으로 마주하기보다 누군가와 그 책임을 나누기를 원했다. 오빠 수철과, 때로는 인재와도 나누고 싶어 했다. 마침내 누구와도 나눌 수 없음을 깨달은 후에는 오목이에게 '산뜻한 참회'—감정적 카타르시스만으로 해결되는 위선적 참회—를 할 수 있기를 바랐다. 죄의식을 느끼는 동안에도 정작 그 책임은 짊어지려 하지 않은 것이다. 이는 죄의식이 수지에게 실질적 윤리적 행동을 이끌어내는 힘이 아니라, "적어도 나는 뉘우칠 줄 아는 사람"이라는 자기 이미지를 지켜주는 방어기제로 기능했음을 보여준다. 이 지점에서 수지는 비난받아 마땅하다. 죄의식을 실질적 책임으로 전환하지 못한 채 평생 자기 위안의 도구로만 사용한 것, 그것은 명백한 도덕적 실패다. 다만 수지를 비난하는 것과, 왜 이런 상황 자체가 발생했는지를 묻는 것은 다른 질문이다.
전자는 개인의 윤리적 실패에 대한 판단이고, 후자는 그 실패가 가능해진 조건에 대한 물음이다.
후자의 질문을 따라가보면, 수철이 오목이를 끝내 가족으로 받아들이지 않은 것도, 인재가 오목이를 대역으로 삼고 저버린 것도, 그 배경에는 이미 굳어진 계층 질서가 있다. 수철에게 가족은 ‘병충해’로부터 지켜야 할 ‘배타적 행복’이었고, 이미 계층이 달라진 오목이는 그 꽃밭에 들일 수 없는 존재였다. 인재 역시 수지가 가진 중산층의 배경을 놓치고 싶지 않았고 오목이는 눈에 들어오지 않는 ‘이름없는’ 사람에 불과했다. 오목이를 밀어낸 것은 수지 한 사람의 악의만이 아니라, 계층 상승과 그 유지를 위해 약자를 배제하는 것을 당연시하는 시대의 가혹한 논리였다.
소설이 끝난 후 수지가 실제로 다섯 아이를 온전히 품어내지 못할지라도(지금까지의 패턴을 보면 그럴 가능성이 더 높아 보인다.), 이 지점까지 도달하는 것 자체가 왜 그토록 힘들었을까를 생각해본다. 그 죄의식의 무게는 과연 개인이 홀로 감당할 수 있는 무게였을까. 여기에는 두 겹의 공포가 있었을 것이다. 이 원죄가 온전히 자신으로 인해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직시하는 데 대한 공포다. 오목이의 삶 전체를 처참한 계층으로 떨어뜨린 시발점이 바로 자신이 전쟁통에 동생을 버렸다는 사실인 것이다. 하지만 어렸으니 그럴 수 있다고, 전쟁중이었고, 모두 굶주렸으니 그럴 수 있다고 털어놓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참회하고 나면 오목이를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더 힘들었을 것이다. 수철과도 공유하는, '스위트홈'의 표상과도 같은 중산층 기득권을 내려놓는 데 대한 공포가 얹힌다. 다만 수철에게는 이 계급적 공포가 전부였다면, 수지에게는 그 위에 원죄의 공포가 이중으로 겹쳐 있었다는 점에서 두 사람의 무게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이런 설명이 수지의 책임을 대신 갚아주는 것은 아니다. 수지에게는 여전히 윤리적 책임이 요구된다. 다만 그 개인적 실패를 비난하기에 당신은 떳떳한가를 작가는 반문하는 것만 같다. 당신은 '이름 없는' 이들에 대한 죄의식에서 자유로울 수 있느냐고.
그 해 겨울을 따뜻했네 두번째 세미나에서 집중적으로 나누었던 이야기가 <정상가족이데올로기>와 <죄책감>이었다.
현재시점 한국사회에서도 여전히 그 강력한 위력을 발휘중인 <정상가족이데올로기>에 대한 집착과 욕망이 수지-수철로 대표되는 중산계급에게 뿐아니라 가족을 가져보지 못한 고아출신이 이룬 프로레타리아 가족 오목-일환에게 오히려 더 강력한 욕망으로 작용되었던 거 같다는 영자샘의 코멘트가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들 가족을 통하여 비로소 무언가 '생기'가 발견된다. '질곡의 가족'이 아니라 '동지이자 살맛'의 가족으로 거듭나고 있는 “찐가족”은 오목-일환-일남이 이뤄낸 가족이었다니. 놀랍고 당황스러운 발견이다.
한편 수지의 '죄책감'과 '참회'의 문제를 바라보는 다양한 의견들이 오고갔다. 나는 처음부터 수지의 죄책감이 위선에 불과했다고 비웃었다. '산뜻한 참회'를 거쳐 그가 오목에게 용서받고 죄책감을 떨쳤다며 개운해 했을지는 모르지만 본질적으로 수지는 자신(과 가족)의 경계 안에 한치도 오목의 그림자를 들여놓지 않은 채 적당한 정도의 '자선'이나 제공하고 살아갔을 거라고 짐작했다. 그런데 세미나를 통해서 몇몇 샘들이 말씀하신 구원서사로서의 오목과 대응되는 지점에서의 수지의 위치를 생각한다면 단편적인 해석이나 평가는 의미가 없을 수 있겠다는 의견도 들었다. 가장 약자인 오목이 잔인할 정도로 폭력적인 일환을 견뎌내며 끝내 포기하지 않으려 했던 것은 무엇일까? 일환에 대한 이해/ 통찰/ 성숙한 태도로 볼 여지는 없을까 오히려 오목은 구원서사를 가장 잘 구현한 인물이 아닌가? 그럼에도 오목에게 가해지는 폭력의 정도는 너무 극악하다. 그렇게 까지 ( 결국 죽음에까지 이를정도로) 오목이를 구원의 서사로 위치시킨다는 건 너무하다...
수지의 죄책감과 관련해서 또 다른 얘기 하나. 수지는 죄책감을 그냥 갖고만 지내왔던 건 아니었다. 끊임없이 오목을 찾아냈고 오목의 주변을 빙빙돌며 이런저런 도움도 주었다. 물론 큰 타격을 주기도 했지만. 그런데 수철은 어떠했나? 어느 순간 오목을 자신의 경계에 들여놓지 않기를 결심하고 마음의 죄책감? 일말의 책임감 조차 깔끔하게 정리해버린다. 수지가 오목이 남겨질 다섯아이에 대한 책임을 나눠지고 싶어서 찾아간 그 날 , 수지는 결국 그 마음을 접고 온다. 견고한 수철부부의 성안으로 오목을 들여보낼 수 없음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어째서 수지는 여전히 위선과 죄책감 사이를 오가며 갈등하고 다가섰다 물러서기를 반복하면서도 끝내 오목-일남의 손을 놓지 못하는데 (그것이 위선이든 죄책감, 참회이든 무엇이든간에) 수철의 선긋기는 왜 그리 쉽고 단호할 수 있었던 걸까? 이 차이는 어디에서 비롯된것일까? 궁금증 하나가 여전히 남았다.
다양한 입장과 의견들이 오고갔다. 작가는 우리에게 '결론'을 주지 않았다는 파랑샘의 마무리에 이르러서야 그렇겠구나 한다. 세 시간 가까운 세미나를 했는데도 13번째 세미나를 했는데도 박완서 작품이 여전히 만만치가 않다가 오늘의 내 결론이었다.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역시 이해하기 어려운 인물들로 가득했다. 박완서 작가는 늘 이런 식이다. 덩달아 나도 늘 이런 식이 된다. 그의 소설을 읽기가 너무 힘들다.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이해할 수 있는, 아니 이해하고 싶은 인물이 하나도 없다...
세미나에서 수지의 죄책감을 이야기할 때, 난데없이 이런 생각이 들었다. 박완서의 소설에서 주요 인물의 회심과 그에 따른 행동은 어디 한 구석 시원스럽거나 번듯한 곳이 없고, 왜 그리 감질나고 찜찜하기까지 할까? 영자의 죽음을 겪고서야 내내 외면해왔던 삶의 질문들과 대면하는 『오만과 몽상』의 현이도 그랬고, 여자의 삶을 남자에게 걸었다가 실패한 앞선 여자들의 얼굴을 뒤죽박죽 떠올리며 야학으로 돌아가려던 결심을 번복하고 구주현과의 결혼을 택한 『도시의 흉년』의 수연이도 그랬다. 그런 인물들을 통해 작가는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걸까.
이 감질남은 우연일까? 『목마른 계절』에서 박완서는 진이의 입을 빌려, 전쟁이 남긴 광기와 죽음을 기억하고 그 기억을 다음 세대에 전하는 일이야말로 전쟁 이후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 말한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책임질 사람은 책임지지 않았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치유받지 못한 채 각자도생을 삶의 윤리처럼 받아들이며 욕망을 향해 달려가는 삶을 살게 되었다. 박완서 소설 속 중산층의 풍경이 욕망에만 충실한 인물들로 가득한 것도 그래서가 아닐까. 그러한 세상이 그나마 유지되려면, 자기 삶을 조금이라도 다른 방향으로 움직여 보려는 최소한의 양심만은 남아 있어야 한다고, 작가는 오래도록 같은 이야기를 반복해 온 게 아닐까.
그러고 보면 수지의 죄책감도, 현이의 번민도, 수연이의 자립을 향한 미미한 걸음도 같은 자리에서 나온 것 같다. 거창한 각성이나 해방이 아니라, 자기 삶을 조금이라도 다른 방향으로 움직여 보려는 최소한의 안간힘. 그 미미한 안간힘이 이 세상을 그래도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곳으로 만드는 최소한의 윤리라고 작가는 말하는 것 같다.
오목이가 살아낸 삶을 빠르게 스캔한다. 오목이는 '나는 버려진 아이가 아니다.'라는 믿음을 굳건히 하면서 은 표주박을 간직한다. 그러나 은 표주박은 버려진 아이의 증거물이다. 오목이는 왜 버려졌을까?
전쟁 중이었고 엄마의 사랑이 부재했고 언니는 자기몫의 먹을 것을 동생과 나누기 싫어서 손을 놓아버리면서 버려진다.
전쟁 중이라는 극한 상황이었는가?
엄마의 사랑이 부족한 정서적인 허덕임은 배가 불뚝하게 먹는 것으로 번지는 문제일까?
넉넉한 살림의 외가는 피난민들에게 밥상을 제공한다. 더구나 외할머니는 손녀들에게 간식까지 제공한다.
자기 먹을 것을 빼앗은 동생이 싫어서 슬그러미 손을 놓아버리는 장면~~~~~.
혼자 읽을 때도 개연성이 없어서 '왜 이런 설정이었나' 의문이었는데 아직도 그대로다.
동생을 버리고 피난길에 올랐지만 폭격으로 엄마가 죽는다. 일곱 살인 아이는 자기에게 내려진 천벌로 받아들이고 울지도 않는다. 곧바로 받은 벌로 모든 게 묻혀지고 전쟁통에 어쩔 수 없었다는 이유로 용서되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영악한 일곱 살 아이의 선택의 결과는 평생 죄책감과 상처로 이어진다. 전쟁과 굶주림 때문에 일어난 비극이라는 설정(?)에는 동의하지 못하지만 수지가 오목이를 가족으로 인정하고 긴 참회를 마치는 장면까지 읽고 나서야 수지가 짠해졌다. 평생 죄책감으로 편하지 못했던 수지의 삶을 중심으로 후기를 써 보고 싶었는데 개연성이 없었다는 것에 꽂혀서~~~. 돌아갈 수 없어서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