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만과 몽상>1부 후기_낯설지 않은 가난

기린
2026-05-22 17:36
135

『오만과 몽상』은 가난의 문제를 전면으로 내세운 작품이다. 1부를 읽으면서 가난과 관련해서 떠오르는 것들이 내내 겹쳤다. 남상의 가족이 살고 있는 동네를 묘사할 때는 『도시의 흉년』에서 비슷한 환경이었던 순정이 떠올랐다. 철거민촌의 화장실 문제나, 현이 살고 있는 공간을 묘사할 때는 영화 <기생충>에 나왔던 반지하에 살던 주인공의 몸에서 나는 냄새가 떠오르기도 했다. 남상이 제대 전에 일했던 공장의 사장은 번듯한 단독주택을 짓고 새로운 공장부지도 마련하여 승승장구하는 3년의 시간, 자신의 가족에게는 아무런 변화로 일어나지 않은 사실을 확인하는 모습에서는 그의 박탈감에 공명 되었다. 왜냐하면 남상이 목도한 현실이 여전히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이다. 가난이 대물림 되는 현실이 심심찮게 신문의 사회면을 차지하고, 이제는 개천에서 용 나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이 소설이 발표된 1980년에서 45년이 흐르는 동안 세상살이는 더 강퍅해졌다.

 

남상의 친구인 현은 집안의 지원을 받지 않고 독학으로 의대를 다니고 가난한 동네에 살면서 영자를 만났다. 현의 옆방에 살고 있는 영자와 같이 살고 있는 언니는 현의 공부에 방해가 된다며 그 좋아하는 라디오도 안 듣는다고 했다. 영자의 이야기에 현은 자신의 방이 따로 두 개나 마련되어 있는, 떠나온 집의 독립적인 기능을 떠올린다. 근대화를 통과하면서 한 집에 바글거리며 붙어 사는 문화는 미개한 것으로 치부되었다. 돈을 벌고 성공한다는 것은 번듯한 양옥을 짓고 자식들도 각자 방을 가지는 것이었다. 그렇게 독립성을 획득하기를 너나할 것 없이 지향했다. 그러면서 우리는 점점 더 가난에서 벗어났다고 여겼다. 하지만 또 다른 가난이 계속해서 들이닥쳤다. 상대적 빈곤, 상대적 박탈감 등의 이름으로.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자기만의 독립적인 공간을 가지고 있는 환경이라도 우리는 여전히 가난 때문에 불행하다는 심리적 압박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소설 속 주인공의 가난이 낯설지 않으면서 갑갑하게 여겨진 지점이었다.

댓글 4
  • 2026-05-23 08:21

    이하는 <도둑맞은 가난>> 중 (문학동네 1권, 384)

    <상훈이와 '나'는 동거 중>

    "저하고 나하고 같이 살게 된 후 절약되는 돈 액수를 또 한번 조목조목 따져들어갔다. 나는 그것을 따질 때마다 신바람이 났다. 먼저, 절약되는 액수 중 제일 큰 몫을 차지하는 방세 사천원, 그리고 나서 연탄값, 반찬값, 양념값 등 덜 드는 걸 시시콜콜 다지면 한이 없었다..."

    <가난의 냄새>

    "내가 서름질(설겆이)을 할 때쯤은 나란히 달린 여섯 개의 방마다 서름질할 시간이었다...집주인이 셋방에 부엌을 만들어준답시고... 하늘을 막아버려.. 이 속은 침침하고 환기도 안 된다. 늘 연탄가스와 음식 냄새로 숨이 막힐 것 같다. 매캐하고 짜고 고리타분하고 시척지근한 냄새가 밖에서 갓 들어서면 눈이 실만큼 독했다. 이 냄새는 방에도 옷에도 이부자리에도 배어 있었다. 내 몸에서도 이 냄새가 날 것이다. "

    <가난과 부끄러움>

    "그러나 나는 이 냄새를 부끄러워하거나 싫어하면 안 된다. 우리 어머니와 아버지와 오빠가 이 냄새를 싫어했기 때문이다. 이 냄새를 맡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하고 어느날 죽어버렸기 때문이다. 나만 남겨놓고 죽어버렸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못난 부모 동기에게 복수하는 뜻에서도 이 냄새에 길들여져야 하는 것이다."

    <가난의 생기>

    "모든 것이 얼어붙은 겨울 아침의 산동네 골목골목은 살아 있는 것처럼 힘차게 꿈틀거리고, 만나는 사람마다 마치 여름 아침의 억센 푸성귀처럼 청청한 생기에 넘쳐 있다. 가난을 정면으로 억척스럽게 사는 사람들의 이런 특이한 발랄함을 우리 어머니는 얼마나 치를 떨며 경멸했던가. 배알도 없는 것들이 천덕스럽고 극성스럽기만 하다고. 그래서 어머니는 아버지와 아들을 꼬여서 같이 죽어버렸던 것이다...그들이 죽기를 무릅쓰고 거부한 가난을 내가 지금 얼마나 친근하게 동반하고 있나에 나는 뭉클하니 뜨거운 쾌감을 느꼈다."

    <가난이의 꿈>

    "나는 미싱을 놀리며 언제고 양재를 배울 것을 꿈꿀 때가 제일 즐거웠다. 옷다운 옷을 만드는 일류 재봉사가 되어 일류 양장점에 고용될 날을 막연히 꿈꾸며 재봉틀을 놀리면, 이런 단조로운 작업도 한결 덜 지루했다."

    "합심하면 살 수 있어요. 이 동네 사람들이 다들 그렇게 사니까 창피할 것 하나도 없어요. 아이들도 벌고 어른들도 벌고 노인들도 벌고, 개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살고들 있어요. 텔레비전 놓고 사는 집도 있고, 며칠에 한 번씩 돼지고기 구워 먹으면서 사는 집도 있고 아무튼 시끌시끌 노래도 부르고 낄낄낄 웃기도 하며 살고 있어요. 우리도 그렇게 살아요. 네, 우리 식군 노인도 없도 아이도 없도 다 벌 수 있잖아요. 서로 기대지 않고 다 나가서 벌면 못 살 것도 없단 말예요"

    <알고보니 상훈이는 대학생, 도둑맞은 가난>

    "그렇지만 가난뱅이 짓을 장난 삼아 해보는 부자들에 대해선 들은 바가 없다... 부자들이 제 돈 갖고 무슨 짓을 하든 아랑곳할 바 아니지만 가난을 희롱하는 것만은 용서할 수 없지 않은가. 가난한 계집을 희롱하는 건 용서할 수 있다손 치더라도 가난 그 자체를 희롱하는 건 용서할 수 없다. 더군다나 내 가난은 그게 어떤 가난이라고. 내 가난은 나에게 소명이다."

    "나는 그를 쫓아보내고 내가 얼마나 떳떳하고 용감하게 내 가난을 지켰나를 스스로 뽑내며 내 방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내 방은 좀 전까지의 내 방이 아니었다. 빗발로 얼룩덜룩 얼룩진 채 한쪽이 축 처진 반자, 군데군데 속살이 드러나 더러운 벽지, 지퍼가 고장난 비닐 트렁크, 절뚝발이 날림 호마이카 상, 제 몸보다 더 큰 배터리와 서로 결박을 짓고 있는 낡은 트랜지스터 라이도, 우그러진 양은냄비와 양은식기들-. 이런 것들이 어제와 똑같은 자리에 있는데도 어제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들은 다만 무의미하고 추했다. 어제의 그것들은 서로 일사불란 나의 가난을 구성하고 있었지만, 지금 그것들은 분해되어 추한 무용지물일 뿐이었다. ... 내 가난을 구성했던 내 살림살이들이 무의하고 더러운 잡동사니가 되어 거기 내동댕이쳐져 있었다. 나는 그것들을 다시 수습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내 방에는 이미 가난조차 없었다. 나는 상훈이가 가난을 훔쳐갔다는 걸 비로소 깨달았다."

    "나는 우리 집안의 몰락의 과정을 통해 부자들이 얼마나 탐욕스러운가를 알고 있는 터였다. 아흔아홉 냥 가진 놈이 한 냥을 탐내는 성미를 알고 있는 터였다. 그러나 부자들이 가난을 탐내리라고는 꿈에도 못 생각해본 일이었다. 그들의 빛나는 학력, 경력만 갖고는 성이 안 차 가난까지를 훔쳐다가 그들의 다채로운 삶을 한층 더 다채롭게 할 에피소드로 삼고 싶어한다는 건 미처 몰랐다."

    "나는 우리가 부자한테 모든 것을 빼앗겼을 때도 느껴보지 못한 깜깜한 절망을 가난을 도둑맞고서야 비로소 느꼈다."

  • 2026-05-26 15:56

    세미나를 끝나고 이 물음이 맴돈다. 가난이 왜 그토록 추악하게 된 걸까?

    『오만과 몽상1』에서 있는 집 자식인 현이의 가난 ‘코스프레’는 그가 가난을 실체적 체감으로 다가오면서 그만 정신적으로 무너져 내린다. 영자의 호의로 얻게 된 꽃 장판을 보면서 “그 아래 그 썩어가는 것이 가려져 볼 수 없게 된 후부터 그 썩어가는 것들이 ...장판의 부식에 기식하던 온갖 징그러운 버러지들이...가려진 것에 대한 이러한 궁금증보다.....습기 찬 부식의 영토에서 번영에 번영을 거듭한 벌레들이 떼 지어 살인을 모의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터무니없는 두려움 때문에 ... 한꺼플 비닐을 들춰보는 수고를 마냥 보류하고 있었다.. “한 번도 마음으로부터 몸담은 일 없이 관조 하던 궁핍이 그 구체적인 실상을 한 조각 비닐로써 감쪽같이 보이지 않게 한 후부터 오히려 떼어버릴 수 없는 피부적인 게 되고 있었다.”

    가난이 관념적인 것에서 실재적으로 체감될 때 가난은 생존의 문제와 직결된다.
    자본주의 시스템은 화폐경제 가치로서 인간의 삶을 매김질 한다. 자본 사회에서의 가난은 생존과 직결된다. 소설 속 B동 철거민 마을은 상수도나 하수도시설이 변변찮아 위생과 주거가 무너져 내린 곳이다. 철거민 마을에 “한 개의 공동수도가 들어오기 위해 그들은 석 달이나 싸웠고” “푸석 바위 위를 후비적후비적 보시기처럼 파고 거적이나 비닐 조각을 엉성하게 두른 뒷간은 몇 집이 어울려서 하나씩이었기에... 늘어나는 오물 문제를 야밤을 틈타 고개 너머 똥을 이고 지고 나르는 일이....얼어붙은 개천에다 버리기 시작했다. 그 똥물이 어디로 흘러 어디서 또 무슨 난리가 날지 모르지만 당장은 그 방법 밖에 없었다.”
    “쓰레기 처치하듯 내다버려진 철거민 촌에서의 첫겨울이 참으로 가혹했던 까닭은 결코 똥에 있지 않았다. 부스럼 딱지처럼 허술한 집에서 첫겨울은 연탄가스 중독사를 속출했다. 거의 매일 사람이 한두 명씩 죽어나갔었다. 앞으로도 아마 그런 일은 그치지 않으리라.“
    자본사회에서 가난의 환경은 삶을 부식시킨다.
    생존에 대한 공포와 함께 ‘가난’과 ‘가난한 사람’은 동일 시 된다.
    가난은 단순 경제의 어떤 상태일진대, 주인공 남상이는 “그의 가난과 그의 이웃의 가난은 죄책감 같은 거라고 느끼는”것처럼 가난은 단순한 결핍을 넘어 무능, 게으름, 불결함....으로 인간 자체에 대한 평가로 이어진다
    이웃동네의 고급 주택가 사람들은 철거민 촌이 들어선 걸 마치 “자기네 등더리에 몹쓸 부스럼이 돋아난 것처럼 끔찍해하면서 몸서리치며...” 철거민들을 문둥이처럼 꺼려했다.
    위생이 특별히 강조된 환경에서 자란 정결하고 영양 좋은 꼬마들은 가끔 고개 위에 까지 올라와 이 신기한 동네를 구경하면서.... 그 부스럼딱지 위에서 사는 사람들을 신기해하면서 두려워했고 때로는 이유 없는 적개심으로 돌팔매질을 하기도 했다..... 매해 크리스마스만 되면 1년 내 모은 돼지저금통을 불우한 이웃을 위해 아낌없이 깨는 건 착한 꼬마들이 몸소 실천하고 있는 선행이자 연중행사였다. 그러나 꼬마들이 배워서 알고 있는 불우 이웃이란 꼬마들의 착한 마음이나 마찬가지로 추상적인 것이었다..... 불우이웃이 그들의 위생적인 행복한 보금자리와 바로 등을 맞댄 지척에 구체적인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걸 꼬마들은 이해할 수 없었고 어른들 역시 아이들 보다 별로 나을게 없었다.... 어른들은 아이들이 못된 버릇을 배울까봐, 상스러운 욕을 배울까봐, 몹쓸 병을 옮을까 봐도 걱정이었지만 정작 큰 걱정은 동네 집값이 떨어지는 거였다.“
    이런 일들은 현실에서도 일어나는 일이 아니던가. 소득으로 강남과 강북이라는 계층이 구분되고 부모의 소득은 아이의 장래와 연결되는 상황들을 보면서 남상이가 군 제대 후에도 가난이 도무지 벗어나지 못하는 현실을 직시한건 “그가 타고난 가난을 쉽게 벗어날 수 없는 것처럼 현이 역시 타고난 부유를 결코 벗어날 수 없다”는 거였다.
    오늘날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난은 단순히 생존의 결핍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끊임없는 비교 속에서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과 불안이 더 큰 심리적 가난으로 작동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 2026-05-26 21:04

    “나는 오만과 몽상을 다만 젊음의 특질, 특권으로 보았을 뿐이다” 『오만과 몽상』을 쓴 박완서 작가의 말이다. 이 말을 지렛대 삼아 다시 보니 현과 남상이 그리고 영자 등의 나이가 고3인 열아홉부터 시작해 스무 네댓살, 그러니까 젊음의 한복판의 나이다. 이른바 질풍노도의 시기. 극심한 감정 기복과 이유 없는 반항, 사회적 규범에 대한 거부감, 그리고 심리적으로는 자아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겪는 극심한 내면의 혼란과 갈등의 시기.

    이 시기는 삶을 추상적으로 받아들이기 쉽다. 그래서인지 현이는 자신을 배반한 남상이에게 복수하는 길은 남상이와 똑같은 가난뱅이로 출발해 기어코 의사가 되겠다는 ‘몽상’을 갖는다. 그러나 가난뱅이의 구체적 현실에 놓인 현이는 독방을 고집하며 자신을 둘레의 사람들과 유리시킨다. 현이에게 궁핍은 관조의 대상이다. 현이가 경험한 가난은 세상엔 이렇게 어렵게 사는 사람도 있구나 하는 타인들의 어려움에 대한 발견이 아니다. 그저 자신에게 그런 걸 견딜 힘이 있다는 걸 확인하고 만족하는, 자신의 잠재력에 대한 발견일 뿐이었다. 그리고 남상이와 똑같은 가난뱅이가 돼서 복수하고자 청춘의 길고 긴 7년 세월을 보냈다. 하지만 ‘역한 고등어 냄새, 강한 지린내, 닭 비린내, 애꿎은 아이들을 패주면서 화풀이하는 여편네의 악다구니 소리 그리고 꽃비닐 장판에서 끊임없이 기어나오는 벌레’등 추상이 아닌 구체적 가난 앞에서 결국 나동그라진다. 결국 ‘팔자라는 체념 없이는 도저히 오래 참고 견딜 수 있을 게 못 되는게 가난’임을 깨달은 그는 곧바로 자신의 안온한 양옥집으로 돌아선다.

    남상이는 또 어떤가. 현이가 실제의 가난을 피부로 몸서리치게 체감하자마자 자신의 안온한 집으로 돌아섰다면, 남상이의 삶 역시 환상과 현실의 괴리를 보여준다. 현과의 우정의 파국은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는 한 장의 한문투성인 ‘사발통문’때문이었다. 사실 현과의 파국을 보채다시피 재촉한 건 그의 할아버지였다. 남상이는 자신이 건넨 모욕과 절교 선언이 현에게 주었을 충격에 대해서도 좀 헤아려보았으면 좋았으련만, 그는 오로지 자신이 받은 충격 속에서만 허위적거리며 헤맨다. 그리고 현실에 발을 붙이기 시작하면서 남상이가 은근히 믿고 있는 독립투사의 후예로서의 자부심, 자랑과 의리의 마음 이런 것들이 실은 불고기 맛보다 믿을 수 없고 소주보다도 열정없음에 놀란다. 그리고 일터 사장의 직원들의 동정을 살피라는 프락치 노릇의 강권에 ’사장님, 사람 잘못 보셨습니다!‘라는 강단 있는 외침은 독립투사의 후예인 남상이의 입안에서만 맴돌뿐이었다.

    영자는 자기만은 ’재봉틀 기름이 되지 않으려고‘ 타인(현이)이 진짜 식구가 되기를 열망하지만 현이에게 영자는 피하고 싶은 ’악취‘나는 존재일 뿐이다.
    으레 현실은 환상을 지우는 법이다(329쪽). 이 청춘들이 나름 각자의 환상에 따라 분투한 다음 현실에 어떻게 낙착하게 될까. 그리고 젊음의 이 위대한(?) 오만과 몽상들이 어떻게 현실과 맞부딪히면서 어떤 모습을 만들어 낼까. 그리고 나에게도 당연히 있었을 젊은 날의 오만과 몽상은 내가 현실을 직시하는데 어떻게 작용했을까. 추상에서 구체로 살아가고 있을까.

  • 2026-05-30 10:02

    ‘오만과 몽상’은 박완서 작가의 대표적 문제 의식이라 할 수 있는 도시 중산층의 경제적 성공담 이면의 허위 의식과 그 한계에 대한 비판과는 좀 결이 다르다. 타고난 빈곤층인 남상이와 자발적 가난을 택한 현이가 지향하는 중간 즈음이 ‘중산층의 꿈’일까? 부자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더라도 의대를 졸업한 현이는 성혜와 같은 부류의 여자와 결혼해서 안정적인 중산층의 지위는 누렸을 것이다. 남상이는 어떨까? 1권까지는 사장의 밀정 노릇 요구에 복종하는 것으로 빈곤에서 벗어나려 한다. 군수의 폭정에 대항해 사발통문을 돌렸던 동학농민군의 자손이지만 각자의 노~력으로 중산층의 꿈을 이루기를 다그치는 1980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남상이는 속물적이고 비굴 해져야만 한다. 현이는 남상이와 같은 조건에서 남상이가 포기해 버린 의사가 되는 것으로 복수를 꿈꿨지만, 현이는 남상이네 집을 아무리 뒤져도 나올 리 없는 값비싼 패물을 들고 나올 수 있었고, 무기력한 부모가 남상이에게 떠넘긴 가장의 짐도 없었다. 궁상이 흐르는 좁은 방을 기어다니는 벌레들을 잡아 죽일 수는 있었지만 장판 아래 벌레들의 심연은 외면했던 현이의 가난은 그래서 체험일 수밖에 없다. 가난을 극복의 대상으로 치부했던 경제 성장 시대. 현이는 남상에게 ‘너 같은 놈은 잘 될 수 있어’라는 식으로 이죽거린다. 가난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야 말로 오만과 몽상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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