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날의 시작> 후기 - '그 여자'에 대해
<살아있는 날의 시작>은 유독 소설을 읽을 때는 불편했고, 세미나가 끝나고는 자의식이 많이 올라왔었다. 헛다리 짚고 쓸데없이 내 이야기를 많이 했나? 싶어 부끄럽기도 했다.;; 또한, 대체로 세미나가 끝나면 다른 샘들의 말씀에 동의가 되는 부분이 많았는데... 이번 세미나는 유독 '나 혼자 딴생각하고 있나?'싶었다. 물론, 나 역시...
“70년대 초에 태어나 ‘그 여자’가 놓인 시대에 사회. 남녀의 일상적 차별, 직장생활로 아이 양육에 소홀히 하고 있다는 죄책감 사회 시스템 자체가 여성에서 열등감과 죄책감을 내재화하는 거대한 가스라이팅의 구조라는 후에 따라온 인식.(도레미샘)”,“가부장제 이데올로기가 구체적으로 가정이라는 일상적이면서도 사적인 공간에서 어떤 방식으로 재현되며, 여성 억압의 기제로서 구조화되고, 재생산되는지를 압축하여 보여주기로 작정한 소설인 것 같았다.(먼불빛샘)”
위 말씀들에 모두 동의하고 분노를 느꼈다. 그런데 나에게 청희는 딱 희생자로만 정의하기 어렵게 복잡한 캐릭터로 느껴졌었다. 나는 그 여자, 청희가 (가부장제 권력에 가스라이팅 당한)불쌍한 여자라기보단... 논쟁적인 여자로 읽혔다.
소설의 초반부부터 청희에게 연민보단 존경심을 먼저 느꼈다. 빌런스런 남편(인철)까지 케어하며 시어머니(송여사)를 모진 수고와 고생으로 돌봄하면서도, 시어머니(송여사)에 대한 인간적인 애정을 놓지 않고 있다는 면에서.. 놀라웠다. 그래선지 웬만한 종교지도자보다 더 종교인 같이 영적인 사람으로까지 보였다. 마치 호피스피 병동에서 돌봄 노동을 하는 수녀님들을 보는 듯... 그래서 인철이 옥희를 통해 자기 “청춘을 복습”하며 이기적이고 덜 숙성된 인간성으로 비쳐지는 데 반해, 청희의 이런 돌봄 노동은 숭고하게 서술돼 있는 면이 있다고 보았다. (나는 이 지점에서 박완서 작가님이 여성의 돌봄 노동에 대해 혹 종교적인 의미를 두시거나 하는 게 아닌지 궁금증이 생겼었다.)
그래서인지 옥희(인철과의 사건, 난 옥희 자신은 '강간을 당했다는 걸' 아직 해석하지 못하고 있지만... 청희는 강간으로 그 사건을 보고 있다고 읽었다)에 대한 청희의 태도가 극단적으로 다르다고 느껴졌던 거 같다. 왜 그 여자의 영적일 만큼 숭고한 돌봄이, 가족 안에서만 작동했던 걸까. 나는 '그 사건을 겪고' 옥희도 돌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청희 역시 피해자일 수 있는 입장에서 어려운 일일테지만...
여기서 뭘 더 써보려 해도, 다시 말문이 막히는데... 나 역시 그 여자, 청희에게 너무 많은 걸 요구하고 있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쯤에서 혹 내가 청희를 꼬아서 보거나, 지나치게 영적으로 보고 있었나... 라는 의문도 든다. 고백하자면... 나는 '그 여자'에게 분노와 숭고함이나 안타까움 등을 느끼긴 했지만... 뜨거운 연대의 감정은 느끼지 못했다. 왜 그렇게 '그 여자'를 똑바로 못 볼까... 혹 내 안에 정상.중산층 가정이 되지 못 한다는 긴 무기력감이 있어, 필터링이라도 하고 있는 걸까. 아... 모르겠다.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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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정돈이 안 됐지만... 더 생각이 나아가지가 않아, 여기서 짧게 마칠게요. ;;
그리고 이번 세미나가 끝나고 질문이 있었는데... 놓쳤어요.
텍스트주의자라는 건 어떤 태도로, 어떻게 텍스트를 읽는 걸까요? 텍스트주의자가 되면... 괜찮은 오독을 할 수 있는 거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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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날의 시작> 후기 - '그 여자'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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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쿠바 | 2026.05.10 | 239 |
저는 청희가 자신이 온 힘을 기울여 지켜왔던 ‘아내’의 자리를 ‘버릴 수’ 있었던 힘을 그녀가 자기 주도성을 발휘하여 미용실이나 미용학원을 경영했던 경험이나 대학을 나온 지식인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탁샘이 주디스 버틀러의 ‘수행성’개념을 말씀하셨어요. 청희의 ‘모반’을 ‘행위자‘가 아닌 ’행위‘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뭐 이런 말씀이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저는 ‘주디스 버틀러’는 이름만 알뿐이고, ‘수행성’이란 말을 처음 들었기 때문인지 계속 ‘주디스 버틀러’, ‘수행성’이 머리에서 맴돌았습니다. 해서 찾아보니
주디스 버틀러의 수행성은 ‘젠더가 생물학적 본성이나 내면의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지속적인 행동과 언어적 실천을 통해 사후적으로 만들어지는 결과물’이라는 이론이었습니다.
그리고
‘행위자가 아닌 행위가 주체를 만든다’ 는 말은 ‘여성’ 혹은 ‘남성’이라는 본질이 먼저 존재하고 그 본질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방식으로 걷고, 입고 말하는 반복적인 행위들이 쌓여서 비로소 여성성이나 남성성이란 환상이 생성된다는 것, 따라서 젠더는 우리가 무엇인가(being)가 아니라 무엇을 하는가(doing)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사회가 정해놓은 젠더 규범 안에 놓이는데, 이 규범을 끊임없이 반복함으로써 사회적으로 ‘정상’이라 간주되는 성 정체성을 획득하게 되는데
그렇다면 전복의 가능성은 어디서 나오는가 하면
젠도가 반복을 통해 유지된다는 점은 역설적으로 변화의 가능성을 시사하는데, 완벽한 반복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미세한 균열이나 ‘잘못된 복제’가 발생할 수 있다고 합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머리가 짜르르 울렸습니다. 미세한 균열!
그리고 이 ‘미세한 균열’이 일어나려면 지속적인 행동과 언어적 실천이 있어야 하는 것으로 ‘수행성’개념을 이해했습니다.
‘청희’는 아내나 엄마, 며느리, 미용실 원장등 그녀를 둘러싼 기존의 젠더 규범을 성실히 반복하며, 그 틀에 맞추는 과정을 열심히 해왔습니다.
그런데 어디서 ‘미세한 균열’을 일으켰을까요. 저는 그녀가 미용학원에 ‘진짜’학원생을 위한 커리큘럼을 고민했던 일, ‘옥희’를 집으로 데려온 일, 상류층 과외 모임에서 결국은 이탈한 일, 그리고 ‘옥희’에게 자신의 ‘집’을 넘겨준 일, 이런 일들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물론 이런 acts 들에 100%의 진실성을 담보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리고 거기에 자신 깊은 곳에 위선의 조각들이 있더라도 말입니다.
그래서 ‘옥희’도 청희가 건네준 ‘새로운 곳’에서 뭔가 지속적인 행동을 통해 ‘미세한 균열’을 가져왔으면 싶습니다.
세미나에서 나왔던 버틀러의 [수행성]에 대해 다시 짚어주셔서 감사~ 쌤 후기를 읽다보니, 저도 생각이 조금 정리되는 느낌이예요.
세미나 말미에 문탁쌤이, 저는 '정동'으로~ 당신은 '수행성'으로~ 주목하려는 징조를 말하셨는데, 어쩌면 이 지점에서 총합? 연결?될 수도 있다는 막연한 느낌적 느낌이 듭니다.
'미세한 균열'을 일으키는 청희는 그 '균열'을 스스로는 감지하는 듯도 하고 아직은 역부족인 듯도 해 보입니다. 때로는 기존 관념에 대해 거의 투항하다시피 스스로를 '연기'하기도 하고, 또 공모? 협잡?한다는 의혹이 들기에 충분한 태도를 보이기도 하고, 또 자기비판(위선에 대한)의 시선을 스스로 내리꽂기도 하고...... 그 속에서 일어나는 지속적인 수행과 그것의 어긋남, 미끄러짐... 등이 청희의 새로운 수행적 정체성을 구성하는 것이 가능하게 만들어줄 것이고.... 또 이 지점에서 그와 같은 '어긋남, 미끄러짐, 균열'이 표면적으로 등장하는 장소가 청희의 몸이며, 그곳에서 일어나는 정동적 징후를 포착하고, 해석하고 싶은 것이 저의 욕망(이번 생에 실현될까 모르겄슈 ㅎㅎ)이라는 거쥬~
저도 이번에 '수행성'개념이 무지 궁금해졌었어요.... (분명 함께 공부했는데... 기억이 안나더라구요.-_-;;) 주디스 버틀러 책의 그 부분만이라도 함... 다시 보고 싶어졌습니다.
'미세한 균열'...! 일어나길!!!
[이쿠바쌤 후기에 대한 덧붙임] 미세한 생각의 가지들이 뻗어나가는 쌤 모습이 보이는 듯해서, 저는 막막 공감했어요 ㅎㅎ
어쩌면 쌤 말씀대로 "대체로 동의"와 "유독 '나 혼자 딴생각'이 오락가락하는 게, 세미나의 존재이유가 아닌가싶어요. 오락가락하는 그 불편함과 고단함이 있어야만 내가 성장하는 것이고, 그게 공부이니까요.
'텍스트주의자'는, 사실 제가 약간 자조적? 자기반성적?으로 쓰는 말인데요, 실제로는 신비평((New Criticism)이나 구조주의 비평에서 작가의 의도나 사회적 배경보다 텍스트 자체의 언어적 구조, 수사, 기법에 집중하는 방식을 가리키는 태도를 가리키는 겁니다만....
그보다는 소위 '먹물/ 가방 끈 긴 X / 책상물림' 등과 비슷한 맥락으로 제가 오용(?)하고 있습니다. ^^;;;;;
박완서 소설에서도 문장의 배치라든가, 인물 지칭, 혹은 단어의 쓰임이나 구조 등등에 주목하는 건 매우매우 필요하고 중요한 일이긴 하지만, 때때로 텍스트의 세계에 함몰되어서 소설을 마치 진공상태의 박제품처럼 다루는 경직성이 나타날 위험이 큽니다. 주로 학술논문류의 글쓰기가 행하는 잘못 중 하나이고, 저는 시시때때로 저런 짓을 저지르는 사람이라ㅠㅠ 스스로 자기경계성 발언으로 '텍스트주의자'라고 지칭한 거였습니다.
또 그와는 대척적으로 문학작품을 자기위안(?)으로만 소비하는 태도도 매우 위험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면 박완서도 그랬네, 나도 예전에는 이러이러했어.... 잠깐의 아련한 회상, 그리고 묘한 안도와 자기 위로... 그리고 땡!하고 마는 것 말입니다. 물론 '위안'은 문학의 아주 중요한 역할이자 장점입니다만, 그것이 찰나의 소비로만 끝나는 것인가, 그 이후 나에게 다른 생성을 촉발하는 것인가는 아주 다르지요.
하여간.... 그러해서, 저는 제 스스로의 경계라는 의미에서 '텍스트주의자'를 운운했습니다만,
텍스트에 충실하되 그것으로부터 무한한 해석과 무한한 생성을 가능케하는 독법(거의 대가의 경지네요 ㅋㅋ)을 꿈꾸고, 그 꿈을 위해 쌤들과 함께 [박완서 세미나]를 하고 있습니당~
'텍스트주의자'에 그런 여러 의미가 있는 줄 몰랐어요. 쌤의 언어로 듣고 싶었는데, 이렇게 세세하게 답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텍스트에 충실하되 그것으로부터 무한한 해석과 무한한 생성을 가능케하는 독법"... ! 오... 너무 멋집니다... 그런 경지...
글구 메모글 내린 거 올렸어요... (제가 이렇게 소심하고 유치합니다. ㅎㅎ 본의아니게 신경쓰이게 해서 죄송했어요. 또 신경써주셔서 감사하고요). 이번만큼... 세미나가 끝나고 여러 생각이 올라오던 때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락가락하는 불편함과 고단함"이 이상한 게 아니라고 공부가 될 수 있다고 말씀주시니... 마음이 놓여요. 조금씩 다시 해보겠습니다...
소설을 읽으며 버틀러의 수행성 이론이 생각났으나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어서 세미나에서는 단발마처럼 언급만 했던 (원인?) 제공자로서, 후기는 좀더 구체적으로 써봐야겠다고 생각만 하다가 시간이 갔습니다. 그 사이 줄무늬 샘께서 정리를 해주셨네요. 버틀러는 너무 어려워서 2년 전 공부하며 끄적여놨던 것들을 읽어도 잘 모르겠는...ㅠ.ㅠ 암튼, 정리를 해보면..
주디스 버틀러의 젠더 수행성은, 젠더가 타고난 것이 아니라 사회적 규범을 반복 수행하는 과정에서 형성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반복 수행을 통해 어떤 ‘본질적인 정체성’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마치 그런 본질이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효과가 만들어진다는 것. 그런데 이 반복이 이루어지는 자리에서 완전히 같을 수 없는 미세한 어긋남이 발생하고, 그 틈이 규범에 균열과 변화의 가능성을 만듭니다.
‘그 여자’ 문청희는 현모양처가 되기 위해 부덕을 실천하면서 단란한 가정을 일구려 애씁니다. 그러나 가정의 단란함과 남편 정인철과의 완전한 결합에 점차 의구심을 품게 되죠. 흡연을 둘러싼 장남 명구와의 갈등("우선 있는 그대로의 우리를 이해해주세요")이나, 명구의 흡연이 걱정스러워 인철과 상의하고 싶었으나 말이 통할 것 같지 않아 남편과의 소통을 포기하는 순간, 암에 걸린 장모를 대하는 인철의 태도를 목격하며 청희는 "신앙처럼 떠받들고 헌신하던 가정의 화합이란 게 실은 허구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합니다.
버틀러에 따르면 ‘어긋남’은 어떤 특별한 사건에서만 생기는 것이 아니라 반복 수행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생길 수 밖에 없는 틈이라는 점에서, 이러한 대목은 새로운 균열을 만들어냈다기보다 이미 반복 수행 속에 내재해 있던 어긋남이 드러나는 장면이라고 봐야할 것 같습니다. 청희는 현모양처라는 사회적 각본을 충실히 재현하려 했지만, 바로 그 수행이 이루어지는 가정 안에서 불통과 이중잣대를 경험하며 자신의 정체성이 자연스러운 본질이 아니라 반복된 수행의 효과였음을 자각하게 되는 것이죠. 청희가 느낀 의구심과 소외감은 외부에서 침입한 것이 아니라, 현모양처라는 역할을 '똑같이' 복제해내려는 불가능한 시도 속에서 늘 잠복해 있던 노이즈가 임계점에 도달해 터져 나온 것입니다......맞는 말을 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ㅠ
푸코와 버틀러를 언제 공부하지? 난 푸코와 버틀러를 다루었던 해의 개념학교를 건너뛰었고, 수업 중 이들의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언젠가는 공부를 해야만 할 것 같은 부담감이 팍팍 느껴진다. 수행성 이론을 몇 번 귀동냥한 게 전부이지만, 암튼 이 소설이 이 이론과 들어맞는다는 느낌적 느낌이 있다(문탁 샘이 수업 중 말씀하실 때 수긍이 되었고 또 샘들의 후기를 보면서 더 확실하게 느끼게 됨). 이미 줄무늬 샘과 도레미 샘이 수행성 이론을 잘 정리해 주셨기 때문에 (반복이 되긴 하지만) 개인적으로 좀더 이해하기 위해 후기조는 아니나 몇 자 보태본다.
이 이론으로 소설을 다시 보니, 이야기 전체가 미세한 정동적 균열들로 가득차 있는 것처럼 보였다. 지금까지 작가의 소설을 읽으면서 신체 반응과 감정의 묘사가 탁월하다는 생각을 늘 했었다. 왜 몸과 감정에 천착했을까, 그 함의는 무엇일까에 대한 감이 잘 오지 않았고 아직도 온전히 이해되는 것은 아니다. 수업을 마치고 든 생각은 버틀러의 이론이 나오기 전인데, 일상 세계에서의 미시적 저항을 신체적 정동과 감정으로 풀어냈다는 게 놀라웠다. 소설가라서 이론화를 안 시켰을 뿐이지 박완서 작가는 아마 수행성과 정동을 꿰뚫어 보고 작품을 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재임이 틀림없다!
2장이 특히 청희의 신체적 반응, 감정적 변화 등이 잘 드러나 있다고 느꼈다. 규범적으로 주어진 엄마역할, 아내 역할, 며느리 역할에 대해 청희가 진저리치는 장면들이 많이 등장했고, 정동적, 감정적 반응들이 매우 적나라했다. 명구와의 대화가 제대로 되지 않고 엄마의 역할이 무엇인지 회의적이 되면서 어깨는 초라해지고 얼굴은 일그러졌으며 “고약한 무력감”을 맛보았다. 식구들이 둘러 앉은 식탁 앞에서 청희는 “주부 노릇의 무의미성에 몸서리”치며, 가정의 화합의 구심점으로서의 역할을 해온 것에 대해 “소리없이 절규”했다. 말이 전혀 통하지 않는 인철을 보고 다시는 “완전한 결합”을 원하는 “나의 갈망을 기만”하지 않으리라는 장면이 나온다.
그렇다고 해서 이게 저항으로 바로 이어지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청희의 경우 몸의 다양한 반응들은 수치심과 불안감으로 연결되었다. 또 그 혼란 속에서도 완전한 결합과 화해를 꿈꾸기도 했다. 복잡하고 뒤섞여 있고 모순적인 정동과 감정들 사이에서 청희는 왔다갔다를 반복했다. 그녀가 놓치지 않았던 것은 역할 수행의 한계에 다다랐을 때의 생긴 정동적 불협화음들을 계속 느끼고 반응하는 것이었다. 신체적 반응으로 나타나는 균열과 불협화음에 주목하고 귀기울였기 때문에 줄무늬 샘이 언급하신 모반적 행위들이 가능하지 않았었나 생각된다.
마지막 장면에 나온 청희의 전복적 행위에 박수를 칠 수만은 없었다. 그녀가 감당해야 할 것들이 너무나 많아 보였기 때문이다. 80년대라는 시대적 맥락에서 일하는 기혼 여성들은 자기의 존엄을 지키는 동시에 타자들과 같이 살아가기 위해 어느 선까지의 모반이 가능했을까?
와우~ 결자해지(원인제공자라 자칭하신 듯하여 ㅋㅋ)의 정신으로 버틀러를 정리해주신 도레미쌤 감사해요. 덕분에 논의가 한층 더 선명해지는듯요.
아마도 '수행'과 '복제', '균열'은 박완서의 다른 소설에서도 계속 주목할 지점이 될 거 같아요.
그리고 해야쌤이 박완서에게 놀랍다 하신 것처럼, 예술가는 예민한 촉수로 시대의 징후를 먼저 포착해 '몸'과 '감정'으로 증명해내는 존재라면, 푸코나 버틀러같은 연구자들은 그것을 논리적 언어로 세우는 사람들이겠지요. 이렇게 양손에 소설과 이론이라는 떡을 든 우리들의 행복함이 넘쳐납니다 ㅋㅋㅋ 저도 다시 버틀러(그외 등등) 공부를 해야겠다고 다짐해봅니다 ^^;;;;;;
문탁샘의 메모 독촉 카톡을 보다가, 제가 후기를 남기지 않았음을 깨달았어요. ㅠㅠ 아직 소설을 "이야기"로만 읽는 수준이라, 세미나를 거듭하면서 분석적, 비판적 읽기에 대해 참 많이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계~속 합니다. 이번에도 버틀러의 수행성 이야기를 들으면서 같은 생각을 했고요. 그러려면 더 읽고 공부할 시간이 있어야 할 것 같은데, 그러지 못하는 현실에서 '언젠가'라며 제 현실에 안주하고 공부를 미루는 저란 인간이란... (^^;;;)
그날 이야기하고 들었던 것 외에, 생각은 스쳤으나 나누지 못한 게 하나 있는데요. 그간 읽은 박완서의 이야기에서 '도덕적 쾌감'이 거의 항상 나오는 것 같았거든요. 단어로도 나왔고, 찌질해지던 등장인물이 '자기는 그래도 더 도덕적'이라며 자존감을 회복하는 장면도 많았고요. 그런데 이번에는 명구의 담임선생이나 애리 엄마와 같이 비도덕적 행위에 솔직한 것으로 쾌감을 느끼는 다른 유형의 사람들이 인상적이었던 것 같아요. 언제부터 시늉조차 하지 않고 솔직한 것 자체가 당당함의 표상이 되었던가...라며 곰곰히 생각해 보게 되었고요. 시절이 조금씩 변할 때마다 사람들의 사고나 심리가 조금씩 달라지는 것을 예리하게 포착해서 글 위에 펼쳐 놓는 박완서 선생님의 예민함에 또 한 번 감탄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지난 시간에 그믐쌤이 이 책을 읽는 것이 괴롭기보다 힐링이었다고 하신 말씀도 인상적이었어요. 청희와 유사한 인생을 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을까...라는 생각도 들었고, 청희와 같은 인물의 존재 자체나 거기서 벗어나려는 용기를 내보려는 애씀이 누군가에게는 분명 위로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그간 괴로워하면 읽는 것을 안괴로워하며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이런 시점에 마침 가부장제가 아닌 다른 테마 차례가 되어 다행입니다. 이따 뵙겠습니다- ^^